그리운 이름, 박완서 10주기..장녀 호원숙의 기억

조회수 2021. 1. 27. 17:5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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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엄마에서 소설가가 된 어머니를 보며 전 그저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늘 지혜로웠고, 항상 무엇인가 쓰던 분이었기에 제게 있어 어머니의 등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당선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담담하셨어요.”


다섯 남매를 키우며 살림에 교육, 글쓰기까지 모두 해낸 박완서 선생은 오늘날 상상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박완서 선생의 장녀 호원숙(67) 작가는 박완서 선생에 대해 “굉장히 집중력이 뛰어난 분”이라며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하기보다는 그때그때 몰입했고, 때마다 손길이 필요한 자식에게 더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호 작가는 밤이 되면 글을 쓰던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박완서 선생이 2006년 여름,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노란집 마당에 앉아 손수 가꾼 꽃을 바라보는 모습.

한국 문학의 거목 박완서 선생이 떠난 지 10년이 흘렀다. 호원숙 작가는 어머니가 남긴 경기도 구리 아치울 자택에서 10년간 지냈다. 어머니의 온기가 남은 그 집에서 지난 한 해 동안 지내며 애틋한 기억을 담담히 풀어낸 에세이를 출간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대면 행사는 열리지 않지만 독자들은 10주기 기념 신간으로나마 박완서 선생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호 작가는 요란하지 않게 맞이하는 10주기를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기념 출판을 하나씩 마무리하는 것으로 10주기를 맞았어요. 어머니께서 많은 글들을 남기셨고, 사후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는데 이번 일련의 출판으로 하나의 맺음이 된 것 같아요.”

어머니의 무게

호 작가는 어머니에 이어 글을 써오고 있다. 젊은 시절 월간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기자였던 그녀는 월간 ‘샘터’에 에세이를 쓰며 수필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2006년 첫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를 냈고, 박완서 선생이 살아 계실 적에는 그녀의 출간을 도우며 자신의 글을 써왔다. 

대단한 자식을 둔 부모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겠지만, 대단한 부모를 보고 자라온 자식은 그렇지 않다. 부모를 뛰어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 더욱이 같은 길을 걸어간다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박완서’라는 큰 산을 보고 자라왔고, 뒤를 이어 글을 쓰고 살아온 호 작가의 삶의 무게 역시 클 것으로 짐작됐다.


“그럴 때도 있었지만 이제 다 감사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베개를 적실 정도로 눈물이 났고, 후에는 그 집에 살면서 ‘내게 남겨진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부담으로 벌벌 떨 때도 있었어요. 첫해에는 계속 글을 청탁받았어요.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한 편 한 편 마치 숙제를 하듯이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렇게 책이 나오고 나서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힘들어도 써서 약속을 지켰다는 것에 감사하게 됐어요.”

10년, 하나의 맺음

생전 박완서 선생은 독자들뿐 아니라 여러 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최근에는 그녀의 작품을 찾아 읽으며 전쟁의 비극, 중산층의 삶, 여성문제 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젊은 층도 늘었다. 


직접 교류는 없지만 작품을 통해 박완서 선생을 깊이 추억하는 젊은 문인들도 상당수다.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잘 알려진 정세랑 작가는 호 작가의 신간 에세이 추천 글에서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아껴 읽는 사람들은 문장을 재해석하기도, 재발견하기도 해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호 작가는 이에 깊이 동의했다.


“어머니의 작품에는 많은 코드가 깔려 있어요. 몇 가지만 아는 독자가 있는 반면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지점까지 끌어내는 독자도 있죠. 어머니 작품은 항상 그대로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자꾸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때 읽는 ‘나목’과 30대에 읽는 ‘나목’, 지금 제 나이에 읽는 ‘나목’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요.”


칠순을 바라보는 호 작가는 소설가라는 직업의 무게를 견디며 글을 써내려간 장년의 박완서 선생 나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면 생전의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하게 될까. 호 작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늘 정신적으로 앞서 있는 당신을 다 이해하기 버거웠다며, 돌아가시고 나서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면…

자신의 글보다 어머니에 관한 기억,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바라는 이들의 청탁에 호 작가는 성심껏 응했다. “내가 아는 정보라든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어주고 싶다”고 말하며. 그러면서 자신은 남은 시간에 마당의 꽃을 가꾸고, 베이킹을 하며, 영화를 보는 것으로 조용히 삶을 즐기는 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을 때 제대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셔서 눌은밥을 해드린 적이 있어요. 훗날 어머니가 그날 일을 쓰시며 ‘한 술 떠 입에 넣는 순간 딸의 눈이 빛났다’고 표현해서 감사했어요. 음식이란 어떤 이벤트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삶의 지속성에서 오는 한 부분이죠. 어머니가 저희에게 해준 음식은 모두 정성이 담겨 있었고,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감사해요. 저 역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맞게 사랑을 담아 음식을 해드리고 싶어요.”


글 정혜연 기자·사진 홍태식 박해윤 기자

장소제공 워커힐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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