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그리워하던 정조대왕 효심, 이 그림에 담겼다

조회수 2020. 12. 30. 17: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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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화점X국립고궁박물관] 문화가 있는 수요일, 아름다운 유물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정조. 그는 아픈 기억을 안고 성장했지만 후세에 길이 남는 좋은 왕이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정조는 즉위 당일 발표한 글의 첫마디를 ‘아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잊지 않은 효자이기도 했습니다. 


1776년 스물다섯 살 나이에 즉위한 정조는 1789년 아버지의 묘를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매년 찾아갔습니다. 요즘은 서울에서 수원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훨씬 오래 걸렸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다녀야 하는 왕의 행차였으니 더욱 큰 행사였지요.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다녀온 화성 행차는 무려 7박 8일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평소 행차할 때는 하루만에 갈 수 있던 거리지만 60세가 넘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길이었기에 행궁(임금이 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묵는 별궁)에서 묵어 가며 이틀 만에 화성에 도착했습니다.


사진도 없었던 1700년대 화성 행차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지금까지 생생히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던 비결은 철저한 기록 덕분이었습니다. 조선의 기록 하면 역시 조선왕조실록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마련인데요.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뒤 민망해 하며 “이 일은 적지 말라”고 하자 사관이 “왕께서 말에서 떨어진 일은 적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기록해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각종 행사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행사 내용을 후대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인 ‘의궤’가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1795년 화성 행차 풍경은 특별히 ‘화성능행도 병풍’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화성능행도 병풍에 담긴 정조의 효심과 당대 기록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국립고궁박물관 신재근 학예연구사에게 들어보았습니다.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전체.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이 한 번 행차할 때마다 많은 비용이 들었을 텐데, 정조가 화성 행차를 매년 꾸준히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효심과 정치적 목적이 둘 다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이장한 정조는 매년 찾아가며 아버지를 기릴 정도로 효심이 깊었습니다. 물론 왕이 궁궐을 떠나 성대한 행렬과 함께 화성까지 가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효심이라는 개인적인 감정과 함께 정치적인 포석도 담겨 있었죠. 행차하면서 지나가는 지역들을 시찰하기도 했고요. 지역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또 지역 특별 과거시험을 치러 인재도 등용하고, 해당 지역 백성들의 사기를 높여주었고요. 그리고 안보와 군사 관련 목적도 있었습니다. 왕의 행차에는 경호를 위해 많은 군사들이 참여했는데요. 한양 주변 방위태세를 점검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는 기회도 되었지요.



정조대왕은 효자로도 이름이 높은데, 화성능행도 병풍에서도 정조의 효심이 나타난 부분이 있나요?


“네. 여러 번의 화성 행차 중에서도 특히 1795년 행차는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도 남달랐던 정조는 이 해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묘에 함께 행차했습니다. 


아버지 묘소에 인사를 드린 다음 화성에서 어머니 회갑잔치를 열었습니다. 어머니 회갑까지 겸한 특별한 행차였던 만큼 화성 지역 노인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기도 했죠. 화성능행도에는 어머니를 위한 잔치, 그리고 지역 노인들을 위한 잔치가 모두 그려져 있습니다.


또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행렬도 병풍에 그려져 있는데요. 이 행렬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가 그려져 있습니다. 장막으로 둘러싸인 가마에 혜경궁 홍씨가 타고 있습니다. 궁궐로 돌아가는 길에 정조가 어머니께 미음을 올리려고 잠시 행렬을 멈춘 것입니다. 정조의 효심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연 연회를 묘사한 '봉수당진찬도'.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기념해 지역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베푸는 모습을 담은 '낙남헌기로연도'.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반차도에는 약 1800명 정도 되는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관료들, 궁중 나인들,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을 들고 가는 사람들, 악대, 군인 등이 동행했습니다.


그림에 그려진 인원은 이 정도이지만 실제로 행렬에 참가하지 않은 담당자들까지 포함하면 총 6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현지에 먼저 도착해서 준비를 맡은 사람, 가는 길목 중간중간에서 지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다 합친 숫자입니다. 



당시 상황이 아주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네요. 그림은 누가 그렸나요.

이 병풍 그림을 누가 그렸다 하는 기록이 확실하게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조선시대 때는 왕실의 그림을 담당하는 도화서라는 관청이 있었습니다. 도화서 소속 화원들이 화성능행도 같은 기록화 제작을 담당했지요. 유명한 화가 김홍도도 도화서 화원이었고요. 김홍도는 정조의 신임을 받으면서 활동했던 당대 최고의 화가였습니다. 김홍도가 화성능행도를 직접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후배 화원들을 지도하면서 간접적으로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정조는 한양으로 돌아가던 도중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미음을 올리려고 잠시 행렬을 멈추었다. 사진은 '환어행렬도' 를 확대한 것.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기록 하면 조선왕조실록부터 떠오르는데 그림으로도 자세한 자료가 남아있네요. 이렇게 철저한 기록문화는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은 국가의 모든 일에 침여해서 직접 보고 들은 바를 기록했고 때로는 자기 생각을 덧붙여 남기기도 했습니다. 사관이 무엇을 적었는지는 왕이라도 함부로 볼 수 없었지요.


또 국가의 중요한 행사나 사업이 있을 때 ‘의궤’라는 기록 책자를 남겼습니다. 준비 과정, 절차, 소요되는 인력, 비용 등을 아주 상세하게 적은 책인데요. 그림으로 설명해야 하는 내용은 상세히 그려 넣었고요. 의궤 그림들도 도화서 화원들이 맡았습니다. 의궤는 후대에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도 있고, 업무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마련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

화성에서 치러진 야간 군사훈련을 묘사한 '서장대성조도' 부분.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기록의 나라’ 조선의 화원들이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기록한 화성능행도 병풍은 실제 생활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 연구사는 “조선시대 병풍은 오늘날처럼 전시용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바람을 막거나 장식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화성능행도 병풍도 왕실에서 쓰였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조의 효심과 애민정신이 담긴 화성능행도 병풍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청계천에 벽화로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렇게 깊은 역사와 사연을 담은 유물들이 가득한데요.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어 실제 유물을 감상하러 박물관에 갈 날이 기다려집니다.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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