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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점심산책] 태극기 걸려있는 이발소..70년대로 시간여행

조회수 2020. 12. 15. 10: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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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회사와 거리두기]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오직 나만을 위한 점심시간 한 시간, 한낮의 산책을 즐기는 직장인의 이야기.


1974년은 임신 안하는 해

- 대한가족협회


흥화문 옆 좁은 골목길, '돈의문 박물관마을' 표지판 뒤로 쑥 들어가자 ‘임신 안하는 해’ 벽보가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다. 바로 옆에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라는 2020년 버전 벽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4~50년 전 서울의 일상 한 페이지를 석둑 잘라다가 2020년에 갖다 놓은 것 같은 이 동네는 원래대로라면 2003년 뉴타운 개발계획으로 전부 허물어졌어야 할 골목길이다. 서울시가 근현대 역사를 보존하는 의미로 일대를 개·보수해 박물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통 한옥과 전시관으로 채워진 레트로 테마 마을인 셈이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체험프로그램 등 운영을 상당 부분 축소했으나 전시관들은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돈의문박물관마을

주소 서울시 종로구 송월길 14-3(신문로2가 7-22) 돈의문박물관마을

문의 돈의문박물관마을 운영팀 02-739-6994

입장료 없음


※ 생활 속 거리두기 2.5단계 격상 이전에 방문하였습니다.

마을 중앙 넓은 광장에 자리한 마을안내소에 가서 체온을 재고 QR코드 등록을 마친 뒤 인증 스티커까지 받으면 드디어 구경 준비가 끝난다. 각 공간마다 관리자(주로 어르신들)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들어갈 때 스티커를 보여주면 된다. 각 전시관을 돌며 스탬프 투어 용지에 ‘돈의문박물관마을’ 글자를 다 찍으면 쿠키도 받을 수 있다.

삼거리이용원

흥화문 옆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용원. 꽃분홍색 수건과 낡은 미용의자에 가로로 길쭉한 꽃그림 거울은 물론 노란 장판 깔린 방까지 제대로다. 이용원을 지키고 계신 어르신과 잠시 대화를 나눠 보니 저 꽃그림 그려진 거울이 옛날에는 유행 아이템이었다고. 친구가 결혼할 때 선물로 사 줄 정도로 인기 있는 소품이었고 좀 꾸몄다 하는 가게에는 꼭 저런 거울이 있었다고 한다.


이발소 공간이니 작은 TV 하나쯤 있어도 어울릴 것 같은데, TV는커녕 적막만이 흐르는 공간이다. 심심하지 않으시냐고 여쭤보니 기다렸다는 듯 요즘 코로나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적어졌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으면 더 지루해서 못 견딘다며 말씀하신다. 코로나 발생 전인 작년에는 겨울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마을안내소 광장에서 붕어빵 구워 나눠주는 이벤트도 하셨다고. 또래 분들과 추억담도 나누고 젊은 사람들에게 옛 이야기 들려주는 재미도 쏠쏠했다고 한다. 이곳이 다시 붐비는 날이 오기를. 

돈의문콤퓨타게임장

이발소에서 광장 쪽으로 나오다 보면 콤퓨타(컴퓨터가 아니다) 게임장과 영화관이 나온다. 빠르게 스탬프 투어를 돌기 위해서 영화관은 패스하고 1층에 있는 게임장과 만화방만 휙 둘러보기로 결정. ‘콤퓨타’ 게임장 안쪽은 많은 관람객들이 즐길 수 있도록 넓게 만들어져 있었지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다.


이발소가 60년대 느낌이었다면 게임장 쪽은 한 8~90년대쯤 되는 분위기다. 문방구 공간을 보면 뽑기, 훌라후프, 알록달록한 공 같은 것들이 줄줄이 전시돼 있다. 역시 여기서도 빠지지 않는 노란 장판. 갑자기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전시장이라 생각보다 큰 감흥은 없었다. 여기는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와서 게임 한 판씩 해야 재미있을 듯.

돈의문구락부

출처: 돈의문 박물관마을 홈페이지

콤퓨타게임장과 문방구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고 생각할 무렵 돈의문구락부가 나온다.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쿠라부)을 다시 한자로 음차한 ‘구락부’는 외국인들과 개화파 인사들이 교류하던 사교공간이었다. 당장이라도 모던걸 모던보이들이 쫙 빼입고 나타날 것 같은 곳이다. 코로나 발생 전에는 구락부 2층을 대여해 진짜 파티장으로 쓸 수도 있었다고 한다.

박에스더의 집

출처: 돈의문 박물관마을 홈페이지

박에스더의 집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인 박에스더(본명 김점동·1877~1910)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관이다. 일반 가정집 구조를 살려 박에스더가 살았던 방이나 업무공간을 꾸며놓았다. 1800년대 후반 정동에 살던 박에스더는 당시 정동에 많이 들어온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서양식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된다.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진찰받는 것조차 꺼렸던 당시 조선 여성들에게 같은 여성 의사의 등장은 그야말로 구원과도 같았을 것이다.


박에스더는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는데, 열네 살 정도에 혼인하던 당시 조선사회 기준으로는 그것도 이미 늦은 나이였다고 한다. 같은 기독교 신자인 26세 청년 박여선과 결혼해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가 된 그는 남편과 함께 유학을 떠난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휴일도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진료하다가 폐결핵에 영양실조까지 얻어 3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생활사전시관

출처: 돈의문 박물관마을 홈페이지

박에스더의 집을 둘러보며 숙연해진 마음을 안고 바로 건너편 생활사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입장하는 순간 느껴지는 ‘찐’ 레트로의 향기. 넓적한 대야, 처음 보는 ‘이뿐이 비누’, 딱 봐도 시골 수돗가에 놓여있었을 법 한 샴푸통. 생활사전시관은 옛날 부엌과 거실, 학생 방 등 60년대부터 80년대를 망라해 생활공간을 재현해 둔 곳이다. 자개장, 미싱, 조그만 TV를 보면 꽤 잘 살았던 집이 아닐까 추정된다. 일력, 통기타, 교련복, 책상 위 태극기 액자까지 요즘과는 확연히 다른 인테리어가 신선하다.

코로나 종식되면 다시 와야 할 곳

스탬프 찍고 구경하다 보니 어느 새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재빨리 마을안내소로 가서 스탬프 8개 다 찍은 종이를 보여주고 쿠키 교환 쿠폰을 받았다. 쿠키는 박물관마을 안에 있는 ‘카페 서궁’에서 교환할 수 있다. 


1시간 안에 스탬프 투어를 끝내며 대표적인 전시관들을 둘러보기는 했지만, 전통음식과 공예 체험, 도슨트 해설, 영화 관람 등 다채로운 즐길거리가 남아있다. 코로나 종식 뒤  다시 와서 구석구석 구경하기로 메모해 둔다. 내년에는 모든 것이 더 나아지기를!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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