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되어 성추행 트라우마 극복한 여성대상범죄 전문 형사

조회수 2019. 6. 18. 16: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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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

최근 한 남성이 귀가하는 여성을 뒤따라 집에 침입하려다 실패하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일명 신림동 강간 미수 사건)이 공개됐다. 통계상의 성범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데, 그 빙산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걸까. 


여성범죄 전문이자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의 저자인 울산지방경찰청 소속 이회림(필명·39·여) 형사는 “신림동 사건 같은 일은 아주 흔하게 벌어진다”고 말했다.


6세 때 동네 화장실에서 낯선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한 그녀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경찰이 됐다. 이후 일선 경찰서에서 성범죄 수사 전담 요원 등 여성대상 범죄를 전담해 왔다.

지난달 28일 서울 신림동 사건 폐쇄회로(CC)TV 장면.

"성범죄 통계, 빙산의 일각입니다"

- 신림동 사건 같은 일이 흔하다니…


“암수범죄(暗數犯罪)나 피해자가 사건화를 거부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성범죄 통계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성폭행은 친고죄가 아니라서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아도 법적으로는 수사할 수 있지만, 피해 여성이 울며불며 하지 말아 달라는데 강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암수범죄는 범죄가 발생했으나 경찰이 모르거나, 알아도 용의자의 신원 파악 등이 안 돼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 범죄다. 2017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강간 강제추행 등 성범죄는 모두 2만4100건이며 이 중 강간은 5223건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범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 ‘빙산의 일각’이라 하셨는데, 물 속에 잠긴 빙산은 도대체 얼마나 큰 건가요.


“통계를 낼 수 없으니… 사건 예를 하나 들자면, 클럽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남자가 잡혔는데 피해자가 40여 명이나 됐습니다. 본인이 휴대전화에 어떤 식으로 했는지 적어 놨더라고요. 누구는 강간, 누구는 키스 이런 식으로… 그 피해자들 중 신고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은 ‘잊고 살고 싶으니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성병까지 옮았는데 신고를 안 한 경우도 있습니다.”

출처: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 신고가 적으면 죄를 지은 만큼 처벌할 수 없지 않나요.


“그렇죠. 방금 말한 40명에게 성범죄 저지른 범인은 5년 형을 살았습니다. (피해자가 40명인데 고작 5년이요?) 네. 신고하고 법정에서 진술한 피해자는 한 명이니까요. 보고서에는 40여 명이 다 적혀 있지만 나머지 피해자들이 나서지 않으니 판사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법정에서 그 범인 표정을 봤는데 가증스럽게도 반성하는 듯 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 사람이 출소 후 제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잘 지내냐면서요.”


- 소름이 돋는데요. 그런 일이 자주 있나요.


“어두운 쪽 사람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이상한 문자나 전화가 자주 옵니다. ‘여보세요’ 하면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툭 끊는데 누군지는 몰라요. 사건 관련자들일 수도 있고… 그래서 이름과 전화번호를 바꿀 생각입니다. 받아 놓은 이름이 있어요.”


- 책까지 썼는데도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필명을 사용하시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워낙 다양한 범죄자들을 많이 보니까요. 성범죄를 다루는 여경이라는 점에 자극돼 범행 대상으로 삼으려 드는 범죄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서 가족들을 보호하고도 싶고요. 제 얼굴이나 신상이 알려지면 범인 검거에 지장이 있기도 하니까요.”

출처: 경주=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묻자 이 형사는 “낭심 차기”라며 “한번 제대로 차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기자 정신이 약간 부족해 다리 걸어 넘어뜨리기로 대신했다. 설마 했는데 간단히 내팽개쳐진 것은 물론이고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별이 보였다. 장소제공 경주 한국체대유도관

이회림 형사는 여성들이 평상시 훈련을 해 놓는다면 유사시 대처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극도의 공포 탓에 제대로 저항을 못 하는 ‘긴장성 부동화’현상을 겪는다. 


이 형사는 경찰이 된 뒤 유도의 손목 빼기 기술을 배우고 ‘내가 이것만 알았어도 그렇게 맞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울컥했다고. 그는 대학생 때 만났던 남자친구로부터 심하게 폭행당해 경찰에 두 번이나 신고한 적이 있다고 했다.


-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더 큰 피해를 입는 것 아닌가요.


“물론 납치돼서 묶여 있거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범인을 자극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회를 노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깨물기라도 하면서 저항해야 도망치거나 살 수 있습니다.


무술을 잠깐 배운다고 일반 여성이 성폭행범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만, 무술로 범인을 이기라는 게 아니라 비상사태에서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경찰에 잡힌 가해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가만히 있는 여성을 자기 손으로 마음대로 하는 게 굉장히 짜릿했다는 거예요. 그들은 ‘못된 애들은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말을 자주 해요. 이 사람들이 말하는 ‘못된 애들’은 손 대려는데 저항하고 거부하는 여성들입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겪은 일인데, 버스정류장에서 취한 남성이 자기 옆에 앉아서 슬쩍 만지려고 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아이 씨’이러면서 일어나 멀쩡하게 갔다고 해요. 호신을 위해 무술이나 운동을 하면 ‘내가 이 기술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 생각이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몸이 뻣뻣하게 굳는 가운데서도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을 만드는 겁니다.”

출처: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사진 ⓒGettyImagesBank

- 신림동 사건에서는 경찰의 안이한 대응이 문제가 되었는데요. 


“좀 더 철저히 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신고 시간이 오전 6시 반쯤이던데, 그 시간이 하필 경찰들이 밤을 새우고 퇴근을 두어 시간 남긴 제일 피곤한 시간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방심한 게 아닌가 싶어요. 안타까운 건 그런 사건이 숱하게 벌어지는데도 시스템은 변한 게 없다는 점이에요.”


이 형사는 지역 특성에 맞는 범죄 예방 모델이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신림동은 혼자 사는 대학생, 젊은 직장인들이 많고 집들이 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어 지역적 특성이 분명한 곳이다. 그는 “나도 혼자 살아봤지만 밤에 문손잡이 흔드는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2007년 이전에 만든 전자키(디지털 도어록)는 전기충격을 주면 잠금이 풀린다. 특히 혼자 사는 여성들은 꼭 확인해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성범죄를 수사하며 그가 목격한 안타까운 상황 또 하나는 피해자의 가족, 지인, 경찰 등 주변 사람들이 ‘왜 기억 못 하냐’, ‘잘 생각해 보라’며 다그치듯 말하는 것이었다. 진술이 정확해야 범인을 잡을 수 있으니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만, 피해자들은 대부분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100%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주변의 독촉이 피해자를 더 위축시켜 진술을 흔들리게 만들기도 하고, 진술이 흔들리면 수사가 제대로 되기 어렵다.


“피해자들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에 빨리 잊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 자기 진술에도 확신이 없고, 수사 절차도 복잡하고 그러다 보면 중간에 포기하려 해요. 진술 도중 ‘너무 힘들다. 그냥 신고 안 한 걸로 해 달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변에서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씩 보태는 말들이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 원문: 동아일보 <“피해자 40여 명중 단 한명만 신고… 이게 성범죄 현실이에요”(이진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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