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종 만든 주종장 "전두환이 친다더라..각하고 나발이고"

조회수 2018. 12. 31. 17: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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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고 나발이고 대통령 무서워서 작품 만들겠냐. 돈 도로 줄 테니 딴 데서 만들어라’라고 들이받았죠.

해마다 섣달 그믐날 밤 12시면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는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제야의 종’ 행사가 열립니다. 원래 1468년 제작된 보신각종(보물 제2호)을 쳤으나 균열이 생기는 등 타종이 어려워지자 새 보신각종을 제작해 1985년 8.15 광복절 40주년 기념 타종 행사 때부터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이 새 보신각종을 만든 이는 2016년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복원에 성공한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원광식 주종장(76·鑄鐘匠)입니다. 하지만 정작 경내에 있는 내력비에 그의 이름은 없습니다. 왜냐고 묻자 그는 “사람들하고 엄청 싸우고 옥신각신하다 ‘내 이름은 빼라’고 했다”며 보신각종 제작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984년 이맘때였어요. 새 보신각종을 설계는 서울대 공대 생산기술연구소, 디자인은 서울대 미대에서 했는데 종에 넣을 무궁화 모양이 이상했어요. 뿌리에 꽃이 바로 달렸더라고. 디자인도 시원찮고. 이상하지 않냐고 물으니 추상적인 디자인이라 하더라고. 


종이란 게 한 번 만들면 천 년을 가는 건데 문양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니라고 대판 싸우고 보름간 일을 안 했지요. 그랬더니 기흥 작업장으로 이종찬 씨가 갑자기 찾아오더군요.”


국가정보원장을 했던 그 이종찬 씨요?


“네. 그땐 민정당에 있었고, 보신각종 중주위원회 운영위원인가를 했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위원장이었지요. 


아, 글쎄 ‘각하가 광복 40주년에 맞춰 쳐야 하는데 왜 안 만드느냐’고 하더라고. 그때 내가 일을 안 하니까 용인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작업장에 쫙 깔려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각하고 나발이고 대통령이 무서워서 작품 만드느냐. 돈 도로 줄 테니 딴 데서 만들어라’라고 들이받았지요.”


무사하셨나요? 멀쩡한 사람도 잡아가던 시절인데…


“전두환이 참석해서인지 광복 40주년 타종 행사를 엄청나게 큰 행사로 준비한 것 같더군요. KBS가 10달 동안 작업 과정을 모두 촬영했으니까. 근데 내가 일을 안 해 종 제작도, 촬영도 멈추게 되니까 급했나 봐요. 당시 서울신문사 사장이 반포에 있는 팔래스호텔 양주 코너로 부르더라고.”

출처: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2월 26일 충북 진천 성종사 공장에서 자신이 만든 종을 살펴보고 있는 원광식 주종장. 그는 에밀레종, 상원사 동종을 복원하고 1997년에는 그동안 맥이 끊겼던 ‘밀랍 주조공법’ 재현에 성공하는 등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범종 제작의 1인자다.

서울신문 사장이 관련이 있습니까?


“그때 새 보신각종 제작비를 국민성금으로 모았는데, 서울신문사가 모금 집행기관이었어요. 그 사장이 나랑 대판 싸운 교수랑 함께 왔더라고. 내가 정치인도 아니고 어떻게 하기 힘드니까 이종찬 씨가 모금 집행기관 사장을 찔러서 어떻게든 해결하라고 한 거지요. 


술 엄청 먹고 서로 풀고 다시 일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여기에 내 이름을 넣을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그래서 ‘성종사 주종장 원광식’이라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름은 빼고 성종사만 넣으라고 했지요.”


그렇더라도 첫 타종식에는 가셨겠지요.


“안 갈 수야 없죠. 내가 만들었으니. 거기서 전두환을 봤는데…, ‘자네가 그렇게 고집이 세다면서?’ 하더라고. ‘웃기고 있네’라고 했지.”


대놓고 그랬단 말입니까?


“아니, 속으로. 하하하.”


원 주종장이 만든 새 보신각종은 기존 보신각종 대신 에밀레종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는 지금 보신각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 소리 환경이 좋지 않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조용한 산사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저 멀리 퍼지는 것처럼, 공간이 소리에 주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출처: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2월 26일 충북 진천 성종사 공장에서 자신이 만든 종을 살펴보고 있는 원광식 주종장.

에밀레종을 복원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워낙 유명한 소리니까…. 복원한 종이 그 소리를 따라잡지 못하면 난 죽는 거라고 생각했지요. 내 인생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2년여간 고생했는데, 그래도 우연의 일치인지 99.9%는 맞았다고 생각해요.”


에밀레종을 치면 ‘에밀레∼’ 소리가 난다던데…


“듣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들을 수도 있죠. 우리나라 종소리에서는 몇 초 주기로 소리가 작아졌다 다시 커지는 ‘맥놀이’가 일어나는데 그 울림을 듣다 보면 ‘에밀레’로 들리기도 해요.” 


녹음된 걸 아무리 들어도 그렇게 안 들리던데, 혹시 들리십니까?


“허허허, 난 뭐… 음…. 그렇게 생각하고 들으면 들린다니까. 하하하.”


※ 진동수가 거의 같은 두 소리가 중첩돼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는 현상을 맥박이 뛰는 것 같다고 해 ‘맥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종은 ‘우∼웅∼우∼웅’ 하며 소리가 크고 작아지기를 반복해 긴 여운을 남긴다.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스스로를 주철장(鑄鐵匠)이 아닌 주종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나는 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주철장은 틀에 쇳물을 부어 여러 물건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말하는 거고요. 나라에서도 주철장이라고 부르고 지금까지 모든 언론에서 주철장이라고 써 왔지만 난 주종장으로 불렸으면 해요.”


좀 무식한 질문입니다만, 종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50여 년을 물고 늘어지며 만들었는데 아직도 모르겠는데…. 안 풀리는 수수께끼도 너무 많고…. 예를 들어 종의 모든 부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만들면 소리가 좋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더 이상해. 


공기 중의 수분에 의해서도, 마르는 과정에서도, 또 주물을 붓는 과정, 문양의 모양 등등에서 알게 모르게 종이 ‘짱구’가 지는데 그 비대칭 속에서 희한하게 좋은 소리가 나오니까. 


아직도 모르겠어요. 과학 가지고 안 되는 분야가 이 분야지요. 그저 내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종이 답한다고 여길 뿐….”


※ 이 글은 동아일보 이진구 논설위원의 <“내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종이 답을 하겠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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