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촬영장서 '무한 대기'..쓰러지는 아역배우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이모 씨(40)는 아홉 살 아들의 말에 그저 물을 건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7월, 한낮이면 35도가 훌쩍 넘어가는 폭염 속에서 아이는 네 시간씩 사흘간 야외촬영을 했습니다. 엄마 이 씨는 하루 촬영 시간을 줄여 달라고 요청했지만 제작사는 비용이 늘어난다며 거절했습니다. 결국 탈진한 아이는 열이 오르고 호흡이 가빠져 입원했습니다.
근무강도가 높기로 유명한 방송계에도 ‘워라밸’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지만 정작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 배우들에 대한 처우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2014년부터 시행된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 따르면 15세 미만은 근로시간이 주 35시간을 초과해선 안 됩니다.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 촬영하는 것은 휴일에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법을 지키는 제작현장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특히 아역배우는 촬영 순서가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아 ‘무한 대기’가 다반사입니다. 지상파 드라마에 촬영한 아역배우 A양의 어머니 박모 씨(38)는 “오후 4시로 예정됐던 촬영이 밤 12시를 넘겨 찍었다. 준비시간, 대기시간 합치면 10시간 넘게 걸렸다. 제작진은 ‘방영 3, 4일 전부터 촬영을 시작하니 이해하라’는 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학교 수업 때문에 촬영 일정을 조정하기도 어렵습니다. 한 아역배우의 부모는 “촬영 스케줄은 일방적으로 통보받기 때문에 시간을 바꿀 여지가 없다”고 했습니다.
촬영장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 스태프 간 오가는 고성, 욕설 등에 아이가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동배우들은 그저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다작(多作)스펙’을 갖춰야 섭외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한 단편 드라마에 출연시켰는데, 피디님이 주 40시간 넘게 촬영해야 한다고 요구했어요. 일주일만 고생하면 끝나니까 괜찮지 않냐고 말해서 당황했습니다.” (김모 씨·40)
해외에서는 아동 배우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있을까요. 영국에서는 어린이 배우가 하루 4시간 이상 촬영할 수 없습니다. 제작사들은 이 규정을 엄격히 지킵니다. 영화 ‘해리포터’는 촬영기간이 6개월 이상 걸렸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9세 미만 6시간, 16세 미만 7시간 등 연령별로 촬영 시간을 정해 두고 현장에 교사자격증을 보유한 선생님을 보내 아이 학습권도 보장합니다.
한 외주 제작사 PD는 “방송계 노동 여건을 개선할 때 성인뿐만 아니라 아동 배우들도 고려해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 이 기사는 동아일보 <폭염에 무한대기… 쓰러지는 아역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