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밑천 없어도 '이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었다

조회수 2018. 8. 1. 0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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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금수저’와 ‘흙수저’는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빈부격차가 더욱 심하고 식량이 풍족하지 못했던 조선 시대 빈민들은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 없는 빈민들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짚신’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토정 이지함이 고을 사또가 되자 큰 집을 지어서 빌어먹는 백성을 모여 살게 하고 수공업을 가르쳤다. 가장 손재주 없는 사람은 볏짚을 주고 짚신을 삼게 했다. 하루에 열 켤레를 만들어 팔아 하루 양식을 마련하고 남는 것으로는 옷을 지어주니, 몇 달 만에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졌다.” ―목민심서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토정비결’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이 포천 현감을 지낼 적 일입니다. 토정은 먹고 살 길 막막한 백성들을 한 집에 모아 놓고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뭐든 곧잘 배웠지만 무엇을 가르쳐도 도무지 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곧잘 해낼 수 있는 게 바로 짚신 삼기였습니다.


짚신 삼기는 배고픈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부업이었습니다. 뛰어난 재주 없이도 할 수 있는 단순 반복 작업인 데다 하루 열 켤레만 만들면 먹고 살기 충분했습니다. 재료도 공짜였습니다. 볏짚, 왕골, 삼베, 부들, 심지어 폐지까지 주변에 널려 있는 것들을 주워다 만들면 그만이었습니다.


심지어 짚신은 오늘날의 신발과 달리 쉽게 닳아 없어지는 소모품이었기에 수요도 무궁무진했습니다. 솜씨 좋은 사람이 만든 짚신이어야 서너 달 남짓 신을 수 있었으며, 보통 짚신은 일회용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농사 짓는 사람들도 농한기나 궂은 날씨에는 집안에서 짚신을 삼았습니다. 방에 앉아 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습니다. 승려들도 가을과 겨울에는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렸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을 보면 승려에게 짚신을 선물 받았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아예 전업으로 짚신을 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구한말 이건창의 기록에는 강화도에 살던 유씨 노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유 노인은 무려 30년 동안이나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짚신을 삼았다고 합니다. 신을 완성하면 집주인에게 주고 시장에 가서 쌀로 바꿔 오게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흑산도의 신운서라는 사람은 짚신을 삼아 자식 네 명을 키웠습니다. 그는 짚신 만들 재료를 짊어진 채 아홉 살짜리 딸 손을 잡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짚신을 삼아줬습니다. 신 씨는 이렇게 딸 넷을 키워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짚신 생산자들 사이에도 남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심노숭의 ‘남천일록’에는 짚신 팔아 부자가 된 송세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송세흥은 낮에는 품팔이(품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해 주는 것)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습니다. 그는 어찌나 부지런했는지 잠을 쫓으려 후추를 찧어 눈 밑에 발라가며 짚신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밤낮 없이 일하던 송세흥은 돌연 출가해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절에 들어가서도 계속 짚신을 삼았습니다. 십 년이 지나자 돈 수천 냥을 모은 송세흥은 승려 노릇을 그만두고 속세로 돌아와 가정을 꾸렸습니다.


마을 제일가는 부자가 된 송세흥은 수만 냥의 재산을 모으고도 짚신 삼기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것(짚신 삼기)으로 집안을 일으켰으니 잊을 수 없다.”


송 씨는 부자가 된 뒤에도 승려처럼 검소하게 살았지만 결코 인색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큰 돈을 내놓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강에 돌다리를 놓아 주기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기념비를 세워 그에게 보답했습니다. 오늘날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청강교비(淸江橋碑)’가 바로 송세흥을 기리는 비입니다.


‘짚신 갑부’ 송세흥은 98세까지 장수하고 병 없이 편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손자 중 하나는 무과에 급제해 가문을 빛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베풀기 좋아한 덕에 복을 누린 것이라 칭송했습니다. 송세흥은 자기 상여를 메 줄 일꾼들이 신을 짚신 수십 켤레를 다 만들어 놓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이 기사는 동아일보 <[조선의 잡史]〈60〉도량이 컸던 ‘짚신 재벌’>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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