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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사람 대접 못 받던 직업

조회수 2018. 7. 30. 0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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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피가 끓던 백정 (白丁)

“서울의 푸줏간과 여염집에서 불법으로 도살하고 교외와 강가 포구 푸줏간에서 하루에 몇백 마리소를 잡습니다. 팔도(八道)를 통틀어 계산하면 하루에 잡는 소가 수천 마리는 될 것입니다.”


- 1858년 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

‘야연(野宴)’, 성협풍속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정은 고려 시대에 양수척 (楊水尺), 화척(禾尺) 등으로 불렸습니다. 몽골 일족인 달단 등으로 이뤄진 북방 유목민의 후예라는 설도 있습니다. 버들고리를 만들어 팔거나 사냥, 도축업을 하며 유랑생활하던 백정들은 조선 세종 때 이르러서야 호적에 편입됐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 백정들은 어엿한 직업인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강도나 살인사건이 일어나 범인을 잡고 보면 절반은 백정이었을 정도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많았던 데다, 살생을 한다는 이유가 겹쳐 꺼림칙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백정들은 소를 잡는 도축장을 천궁(天宮)이라고 불렀습니다. 죄를 지어 땅으로 내려온 옥황상제의 아들인 소를 다시 하늘로 돌려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도축은 스님이 경을 읽으며 의식을 치르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습니다.


농업 국가인 조선은 소를 중시하는 나라였습니다. 장정 10명이 할 일을 소 한 마리가 해낼 수 있었기에 소는 농사에 필수적인 일꾼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소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강력히 시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 도축은 계속됐습니다.


성균관 노비들이 살던 반촌(泮村)과 서울 안 24곳, 그리고 전국 300여 고을은 관에서 인정된 푸줏간(현방·懸房)이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소를 잡아 고기를 팔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를 잡아 팔면 무거운 벌금을 물었습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농사에 쓸 소 500여 마리가 매일 전국에서 도살된다며 씨가 마르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이렇게 소를 많이 잡는데도 씨가 마르지 않은 것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소의 사육 마릿수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입니다. 백정 일을 시작하는 일반 백성도 늘었고, 쇠고기를 팔아 얻는 이익이 컸기에 큰 부자가 되는 사람도 속출했습니다. 지방 수령과 하급 관리는 도살업자와 결탁해 백정을 보호하면서 고기를 얻었고, 심지어 왕손(王孫)이 백정을 동원해 몰래 소를 잡아 고기를 팔다가 발각돼 처벌받기도 했습니다.


도축 전문가인 백정 안에서도 세부 전공이 나뉩니다. 뼈와 살을 발라내는 거골장(去骨匠), 가죽을 제거하는 거모장(去毛匠),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피장(皮匠)이 있습니다.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라졌지만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1923년에는 참다 못 한 백정들이 차별을 없애 달라며 운동을 벌이기도 했죠.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을 하면서도 천시받는 직업이 백정이었으나 그들 덕분에 조선 사람들은 맘 편히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셈입니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



※ 이 기사는 동아일보 <유목민의 피가 끓던 ‘백정’>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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