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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준으론 갑질인데, 미국 기준으론 그냥 일인 경우

조회수 2018. 7. 13. 09: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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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장관이 결혼 25주년을 맞았습니다. 어렵게 일정을 조정해 휴가를 낸 장관은 남편과 단 둘이 낭만적인 기념 여행을 떠나기로 했지만 집에 남을 아이들이 걱정입니다. 10대인 둘째 딸과 막내아들이 눈에 밟힌 장관은 집을 떠나며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내 비서관이 너희들 챙겨 주러 집에 올 거야. 그래야 내 맘이 편하거든.”

출처: CBS
CBS ‘Madam Secretary’의 한 장면.

장관이 떠난 날 저녁, 하루 일과를 마친 남성 비서관은 아이들을 살피러 상사의 집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없는 사이 자유를 만끽하며 집 안에서 공놀이 하던 막내아들이 비서관과 부딪혀 발목을 삐었습니다.


비서관은 이 사실을 장관에게 보고하고 아이를 응급실로 데려가 치료했지만 아이들은 난감한 비서관의 심정은 아랑곳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엄마에게 ‘아드님이 다친 건 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하는 건 까먹었나요?”라고 놀리기까지 합니다. 


“(네가 공 차다 그런 거니까) 내 잘못은 아니지”라고 반박해도 아들은 “전적으로 당신 잘못이죠”라고 우깁니다. 상황 정리를 도와준다고 달려온 여성 공보관도 “당신이 어른이고 책임이 있잖아. 그러니까 결국 당신 잘못인 거지”라고 거듭니다.


비서관이 “(다리를 다쳐 가만히 있어야 하니까) 숙제하긴 더 좋겠네”라고 말하자 아들은 “농담하세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최고의 핑곗거리가 생겼는데”라며 무시합니다.

직장 갑질 끝판왕 사례를 보는 것 같은 이 이야기는 여성 국무장관의 활약상을 다룬 미국 드라마 ‘마담 세크리터리(Madam Secretary)’의 한 장면입니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비서관은 갑질을 제대로 당한 셈입니다. 은혼식 휴가를 떠난 장관의 (버릇없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집안에서 공놀이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고 혼자 놀다가 다친 아들에 대한 책임까지 억울하게 져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갑질인 이 사례는 미국 기준으로는 그냥 ‘일’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경우 보좌관은 구체적인 역할과 책임이 분명히 적힌 직무기술서(Job Description)에 서명했을 것이고, 그 직무기술서에는 저런 업무까지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비서관은 나라일로 바쁜 장관 대신 자녀들을 챙기거나 장관과 이웃 주민 간의 사소한 마찰까지 해결해 줍니다. 장관이 사적(私的) 소모시간을 최소화해 공적(公的)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의 정식 업무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미국처럼 직무기술서를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작성하면 갑질이 사라질까요. 그렇진 않을 듯싶습니다. 갑질은 가해자인 갑의 착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갑의 권한은 을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잘 해내는 데 집중돼야 합니다. 그래야 을의 봉사를 받을 정당한 자격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장관은 긴박한 외교 분쟁 때문에 은혼식 여행을 하루 만에 접고, 언제나처럼 멋지게 문제를 해결한 뒤 국무부로 돌아옵니다.


“아드님이 발목 다치고, 숙제도 안 한 건 다 제 잘못입니다.”(비서관)


“집 안에서 절대 해선 안 되는 공놀이를 한 건 그 녀석이잖아요. 숙제도 결국 하긴 했어요.”(장관)


을보다 큰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하는, ‘갑어치’ 하는 갑이라면 갑질도 갑질 논란도 없겠지요.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



※ 이 기사는 동아일보 <[오늘과 내일/부형권]‘갑어치’하는 갑은 갑질도 없다
>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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