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조선팔도 누비던 보부상들, 서로 '저고리' 바꿔 입은 이유

조회수 2018. 6. 30. 10: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조선시대 직업 이야기

조선시대, 이리저리 떠돌며 물건을 팔아 생계를 잇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보부상 (褓負商)입니다. 


보부상은 봇짐장수 보상(褓商)과 등짐장수 부상(負商)을 합친 말입니다. 보상은 비단, 금은으로 만든 세공품, 필묵, 피혁과 같은 고가품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녔고, 부상은 생선, 소금, 나무제품, 토기 등 비교적 저렴하고 부피가 큰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녔습니다.

도로가 발달되지 않아 상품 유통이 어렵던 시대에 보부상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습니다. 5일장이 생겨난 뒤로는 장날에 맞춰 순회하는 장돌뱅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매매알선, 금융, 숙박업 등을 하던 객주 (客主)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구분이 뚜렷한 시대였기에 상인은 사람대접 받기 어려운 직업이었습니다. 게다가 보부상들은 자본도 없었기에 더욱 천시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동료를 모으고 계(契)를 맺어 끈끈한 조직을 이루었습니다. 보부상단은 읍내에 가게를 차리고 보부상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으며 장터가 서면 흥정꾼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행상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보물 제527호).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

보부상들은 나름의 철저한 질서 하에 움직였습니다. 부상과 보상은 각각의 상단(商團)으로 나뉘어 있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구분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상단은 군현을 묶은 관할마다 임소(任所)를 두고 그 우두머리인 본방(本房)을 선출하여 사무를 맡았습니다. 또한 본방 중에서 접장(接長)을, 접장 중에서 도접장(都接長)을 선출해 8도를 대표하는 전국적인 조직을 이뤘습니다. 이들은 이름과 취급 상품, 거주지 등이 적힌 신분증을 발급했고 세금도 납부했습니다.


혼자는 약하지만 조직을 이루면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탐관오리나 폭력배들의 횡포에 공동으로 대항했습니다. 보부상들은 탄탄한 조직력 덕에 역사의 주요 장면에 등장합니다.


상부상조 정신으로 똘똘 뭉친 보부상은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도왔고 성실히 일하되 같은 소속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일면식 없는 사이에도 객지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는 동료를 보면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고, 객사한 동료는 땅에 묻어 주었습니다.

바구니 장수.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

조직을 위협하고 상도덕을 어지럽히는 행위도 벌금과 곤장으로 엄격히 단속했습니다. 곤장은 일의 경중에 따라 적게는 10대에서 많게는 50대까지 맞았습니다. 본방어른을 속이면 40대,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와 다투면 50대의 가장 엄한 처분을 받았습니다. 혼인과 장례에 내는 부조 품목과 수량도 따로 정해져 있을 정도로 계산이 정확했습니다.


보부상들 특유의 문화에는 ‘저고리 바꿔 입기’도 있었습니다. 전국을 누비던 이들은 여행길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면 헤어질 때 서로의 저고리를 바꿔 입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보부상들은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1894년 경 전국 보부상 수는 25만 여 명 정도로 추산됐으나 길이 잘 닦이고 유통이 발달하면서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



※ 이 글은 동아일보 기사 <[조선의 잡史]<55>19세기 말 전국 보부상이 25만명
>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