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추억과 오늘의 기억을 품은, 여름문구사

조회수 2018. 5. 12.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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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돋는 공간으로 가볼까? 여름문구사로 Go~~!!

"우리 학교 끝나고 문방구 가자!"

제주 구좌읍 세화리에는 ‘여름 문구사’라는 작은 가게가 있다. 간판에는 ‘중앙 농약 종묘사’라고 쓰여 있어 잘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엉뚱한 구석이 있는 문구사.


작은 입구로 들어서면 생각보다 길쭉한 공간이 펼쳐지고, 그 안에 들어서서 이것저것을 구경하다 보면 어떤 일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잊고 있었지만, 기억하는 일들.

여름 문구사를 열기 전에는 용눈이오름 밑에서 물과 커피를 파는 상점을 했어요. 마을과의 계약이 끝나 다른 일을 찾다가 지금의 여름 문구사 자리를 발견했죠. ‘여기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문구사를 차리게 되었어요. 보통 가게를 차릴 때는 목적을 먼저 갖고 장소를 찾는데, 뒤바뀐 순서로 하게 되었죠.
집이 근처여서 지나다니며 늘 이 자리가 괜찮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어느 날 차 타고 가다가 문에 종이쪽지 하나가 붙어 있는걸 보고 내려서 바로 연락 드렸어요.
제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주변에 가게를 구하는 분들 보면 조심해야 할 점이 있더라고요. 제주에서 상가건물을 구할 때, 처음에는 주인분과 연세를 정하거든요. 그 가격으로 알고 계약서를 쓰려고 하면 자식과 상의를 한 후에 가격이 변해있는 경우가 있어요. 육지나 도시에 사는 자식과 통화를 한 후의 가격이 진짜 연세가 되죠.
이전에는 농약사가 30년 동안 있었다고 해요. ‘중앙 농약 종묘사’라는 글씨체가 네모반듯하면서도 동글동글한 것이 귀여웠죠. 30년이라는 긴 시간의 역사가 한 번에 없어져 버리는 게 아쉽다는 생각도 들고, 귀엽기도 해서 그대로 뒀어요.
가게 오픈하고 나서 농약사 아저씨께서 오셨거든요. 아저씨는 이 자리에서 자식들 유학도 보냈고 많은 일이 잘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제 그만 쉬려고 내놓은 거였으니, 저도 잘 될 거라고 응원해주셨어요.
‘아저씨처럼 30년 채우고 잘 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나가자!’ 이렇게 부적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동네 친구가 입간판을 만들어줬었거든요. 페인트칠도 못 하고 있다가 개업하던 날 급하게 스케치북을 찢어서 '오늘 개업'이라고 써서 붙여놓았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계속되고 있어요. 계속 스케치북을 찢어 뭔가를 써서 붙여두는 거죠.

바람에 날아가 없어져 버리거나 비를 맞아 쭈글쭈글해지면 새로운 문구로 바꿉니다.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대로 썼었는데, 언젠가부터 동네 꼬마들이 지나가며 “어? 바뀌었다!” 하고 문구를 소리 내어 읽는 걸 보고 난 후에는 뭐라고 쓸지 깊게 고민합니다.

저희 동네 세화리에는 저희 가게 같은 구조가 많은 것 같아요. 입구는 좁지만, 들어서면 문이 하나 더 있고 그 안에 하나가 더 있죠. 안으로 길쭉한 형태예요. 자주 가는 분식집도 그렇고 포목점도 그렇고.
농약사 주인분은 지금 계산대가 있는 안쪽 공간을 쉬는 곳으로 쓰셨다고 해요. 친구들이 놀러 오면 같이 민속화 공부도 하시고.
구조상 제가 문 안쪽에 숨어있게 되니까, 손님들은 제 시선을 신경 안 쓰고 실컷 구경할 수 있어 좋을 것 같아요. 물건을 안 사고 나가셔도 부담이 없을 것 같고요.
제게는 보험 같은 공간이에요. 늘 마음속에 ‘문구사가 망할 것 같으면 바깥쪽 공간은 문구사로 두고 안쪽공간에 다른 걸 차리자!’ 하는 대책을 세울 수 있는(웃음).
건물의 외벽도 내부도 모두 함께 시작해서 같은 나이를 먹었는데, 내가 편하자고 샷시문이나 창틀을 어설프게 바꿔서 겉도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그보다는 사실 인테리어비용에 쓸 돈이 넉넉지 않았습니다.
천장은 한쪽이 무너져 있어서 뜯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뜯고 나서 별다른 묘책이 생각나지 않아 시멘트색으로 페인트칠만 했습니다. 사실 모든 게 인테리어라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제주에는 정말 멋진 감각과 솜씨를 가진 분들이 너무너무 많거든요.
저는 ‘어떤 느낌으로 하자!’ 이러기보다는, 그냥 가진 것 안에서 해결했던 것 같아요.

우유 냉장고는 이웃이 식당을 정리할 때, 받았어요. 빵 상자는 어느 할아버지의 오래된 문구사에 들렸다가 발견하고 아주 저렴하게 사 왔고요.

책상이나 찬장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주운 것들이죠. 제가 처음에 제주에 왔을 즈음에는 주울 물건이 많아서 마음에 드는 걸 쏙쏙 골라 주울 수 있거든요.

요새는 눈을 씻고 다녀도 없더라고요. 버릴 것을 다 버리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경쟁자가 늘어난 건지(웃음)

나무선반은 소나무로 했고, 계산대 앞판은 적삼목, 상판은 집성목으로 만들었어요. 용도에 따라 좋은 나무를 고르지는 않았고, 구할 수 있는 나무 중에서 가장 예쁘고 튼튼한 거로 골라 만들었어요.
나무를 구할 때, 인터넷으로 구하면 아무래도 배송비가 비싸고 배송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래서 제주에 있는 목공소에서 구매해서 씁니다. 동네에 있는 목공소는 종류가 한정적이지만, 멀리 떨어진 큰 목공소로 가면 예쁜 나무 종류가 많아요.

많이 사지 않으면 배송을 안 해주어서 이웃에게 트럭을 빌려서 사러 가야 합니다. 나무 필요한 이웃이 있으면 모여 같이 한 번에 사기도 하고요.


혼자서는 살기 힘든 제주, 이웃과 함께해야 살기 편한 제주입니다.

옆 마을 하도리, 한동리, 중산간마을, 송당에 사는 꼬마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세화에 나왔다가 들려주어요. 그런 걸 보면 너무 귀엽고 뿌듯합니다.
세화초등학교 어린이가 문구사 소파에 앉아 사탕을 까먹으면서 “여기에 오면 추억에 젖는다.”라고 이야기해줬거든요. 그날, 너무 웃기면서 기뻤어요. 우리 어른들의 추억을 공유하려고 만든 가게거든요. 고작 2006년에 태어난 아이의 추억도 떠올리게 해주는 곳이 되었다는 생각에……. 아이의 추억이 무엇인지 웃다가 못 물어봐서 궁금하네요(웃음).
지금은 이름만 문구사이고, 소품이나 기념품이 많은데 동네 아이들을 위한 학용품을 하나둘 채우고 싶어요. 복사 문의도 많이 하는데, 돈 많이 벌면 복사기도 놓고 싶고요. 진짜 문구사처럼!
동네 아이들이 먼 훗날에 ‘우리 동네에 그런 문구사가 있었다.’라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추억의 문구사로 자리 잡고 싶어요. 그 추억 속에 저도 쿨한 이모로 기억되고 싶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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