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클럭에 진공관을 쓴 이유가 있었네 - PrimaLuna EVO 100 DAC

조회수 2021. 5. 6. 10: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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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의 시청실에서 네덜란드 프리마루나(PrimaLuna)의 EVO 100 DAC을 한 달 넘게 들었다. 외관을 보면 아날로그 출력단과 정류단에 진공관을 썼고, 스펙을 보면 버브라운의 PCM1792A 델타 시그마 DAC 칩을 썼다. 사실, 이런 ‘DAC 칩 + 진공관 출력단' 구성의 DAC은 많다. 그런데 EVO 100은 결과물이 많이 달랐다. 비슷한 가격대의 DAC에 비해 음의 활기라든가 매끄러운 소릿결이 유난히 돋보였던 것이다.


이 때만 해도 프리마루나의 앞선 트랜스포머 제작기술이라든가, 진공관 증폭회로 설계 노하우, 아니면 내장 디지털 클럭의 낮은 지터 등이 그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업샘플링을 포함한 DSP 디자인, USB를 비롯한 입력 인터페이스 설계를 또다른 후보로 집어넣으면 될 듯 싶었다. 이것도 아니라면 평소 프리마루나 앰프에 가졌던 필자의 호감이 플라시보 효과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EVO 100 DAC은 전혀 짐작도 못했던 비장의 한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디지털 클럭에 6S6B라는 3극관을 써서 클럭에 유입되는 노이즈를 최소화했다는 것이다. 디지털 클럭에 진공관을? 그러면 흔히 사용되는 크리스탈 오실레이터(XO)를 쓰지 않았다는 것인가? 무엇보다 왜 진공관을 쓰면 노이즈가 줄어드는 것일까? 필자의 궁금증은 끊이질 않았다. 6S6B 실물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하필이면 왜 이렇게 작은 진공관을 쓴 것일까?


EVO 100 DAC 팩트체크

▲ PrimaLuna Evo 100 DAC

프리마루나는 네덜란드 태생의 허만 반 덴 둥엔(Herman van den Dungen)이 2003년에 설립, 올해로 18년차를 맞은 진공관 앰프 전문 제작사다. 2019년 4월 새 EVO(Evolution) 시리즈가 나오면서 라인업이 아주 심플해졌는데, 위부터 400, 300, 200, 100으로 내려가고 각 모델에 프리앰프, 파워앰프, 인티앰프를 마련한 방식이다. EVO 100에는 시리즈 중 유일하게 DAC 모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번 시청기인 EVO 100 DAC이다.


EVO 100 DAC은 기본적으로 버브라운의 PCM1792A 델타시그마 칩을 써서 PCM은 24비트/192kHz까지, DSD는 DSD128(DoP)까지 재생하는 디지털-아날로그 컨버터다. 컨버팅 앞단에 역시 버브라운의 SRC4192 칩를 써서 24비트/192kHz 업샘플링을 하고, 컨버팅 뒷단에는 쌍3극관 12AX7과 12AU7이 투입돼 각각 증폭과 버퍼 역할을 한다. 정류단에 다이오드 대신 정류관을 쓴 점도 눈길을 끈다. 무게는 13.15kg.

▲ PrimaLuna Evo 100 DAC

외관을 보면 전형적인 프리마루나 스타일이다. 시선을 잡아매는 것은 여러 가로 막대기를 걸친 독특한 디자인의 진공관 보호그릴. 이는 EVO 전 모델을 관통하는 디자인 아이덴티티다. 그 안에는 총 6개의 진공관이 채널별로 3개씩 좌우 대칭 형태로 장착됐다. 가장 큰 것이 정류관 5AR4, 그 앞에 있는 것이 증폭관 12AX7, 버퍼관 12AU7이다. 돌출된 커패시터는 파워서플라이에 들어가는 평활 및 정전용 커패시터다.


전면 패널에는 가운데 디스플레이를 두고 좌우 2개씩 입력선택 버튼이 마련됐다. AES/EBU, 동축, 광, USB 순으로 이어지는 심플한 구성. 하지만 실제 사용을 해보면 리모컨보다 빠르게 입력단을 선택할 수 있어 의외로 편리하다. 후면 역시 심플한데, 좌우 아날로그 RCA 출력단자 1조와 4개 디지털 입력단자, 그리고 전원 인렛단이 마련됐다. 전원 온오프 스위치는 왼쪽 측면에 있다.


한편 진공관이 장착된 상판 뒤의 큼지막한 케이스에는 토로이달 전원트랜스가 채널당 1개씩 자리잡고 있다. 제작사에 따르면 AC 오프셋 킬러(AC Offset Killer)라는 이름의 필터를 통해 트랜스 험과 EMI 노이즈를 획기적으로 낮췄다고 한다. 출력트랜스는 출력 RCA 단자 안쪽에 있는데, 버퍼관을 통과한 아날로그 신호가 최종적으로 빠져나가는 통로다. 진공관의 높은 출력 임피던스를 낮춰주는 임피던스 매칭 역할이 주된 임무다.


슈퍼튜브클럭(SuperTubeClock)에 대하여

▲ PrimaLuna Evo 100 DAC의 내부

EVO 100 DAC 내부를 본다. 진공관이 상판에 장착된 구조상 내부를 밑에서 볼 수밖에 없는데, 앞쪽의 파워서플라이와 증폭, 버퍼단은 하드 와이어링, 뒤쪽의 디지털 파트는 PCB 기판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디지털 기판 한 가운데에 눕혀진 상태로 장착된 미니 진공관.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6S6B 3극관이다. 프리마루나가 지난 2008년 프롤로그 에이트(ProLogue Eight) CDP에 일찌감치 투입했었던 슈퍼튜브클럭(SuperTubeClock)의 심장이다.


일단 제작사 설명을 들어보자. 프리마루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트랜지스터 오실레이터 대신 6S6B 같은 진공관 오실레이터를 씀으로써 유입되는 지터와 노이즈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한다(By using a tube, we have significantly lowered the amount of jitter and noise, resulting in superior detail retrieval).


그리고 6S6B는 러시아에서 개발된 군용 3극관이며 특별히 오실레이터 용도로 개발됐다고 한다(The tube is a very rugged, long-life Russian military Triode specifically designed for oscillation purposes). 이어 수명이 5~10년이며, 또한 크기가 아주 작기 때문에 마이크로포닉 노이즈가 무척 낮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하지만 고백컨대, 우문한 필자의 입장에서 디지털 클럭에 진공관을 투입하면 왜 노이즈가 줄어드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진공관이 하는 일이 도대체 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필자가 알고 있는 DAC은 대충 이런 세계였고, 슈퍼튜브클럭은 이 범주를 한참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1. DAC은 디지털 입력신호를 아날로그 출력신호로 바꿔준다.

2. 델타시그마 DAC은 중간에 1비트 PDM 신호를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3. R2R DAC은 저항들의 조합으로 즉각적인 아날로그 출력 전압을 뽑아낸다.

4. 입력되는 디지털 신호를 처리하기 위한 기준점을 제공하는 것이 클럭(Clock)이다.

5. 따라서 클럭은 시간축 오차, 즉 지터(Jitter)가 낮을수록 좋다.

6. 클럭은 수정(Crystal)을 이용하며 수정이 얇을수록 클럭 주파수가 올라간다.

7. 델타시그마 DAC을 거친 아날로그 신호는 전류(I)다.

8. 때문에 이를 전압(V)으로 바꿔주기 위한 I/V 변환회로가 필요하다.

9. 아날로그 전압 신호를 증폭하기 위한 소자로 트랜지스터와 진공관이 투입된다.

10. DAC 컨버팅을 하기 전에 통상 업샘플링을 한다.

11. 이는 디지털 입력신호는에 끼어든 양자화 노이즈를 줄이기 위해서다.

12. 업샘플링에 동원된 고주파는 컨버팅이 끝난 후 아날로그 로우패스 필터를 통해 제거한다.

결국 슈퍼튜브클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DAC에 대한 이 얄팍한 상식에서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DAC의 핵심 파트 중 하나인 디지털 클럭을 좀 더 살펴보면 이렇다.


1. 디지털 클럭은 수정 발진자(Crystal Resonator)와 앰프 회로(Amplifier Circuit), 오실레이터(Oscillator)로 구성된다

2. 수정 발진자에는 아주 얇은 석영 조각(Quartz Crystal)이 들어있다

3. 수정 발진자에 전압을 가하면 석영 조각이 떨리면서 사인파(Sine Wave)를 내보내는데 이것이 바로 수정 발진자의 고유 주파수다

4. 이처럼 수동 소자인 수정 발진자에 전압을 가하는 것이 앰프 회로다

5. 수정 발진자에는 반드시 커패시터가 2개 붙는데, 이들의 커패시턴스 변화에 따라 출력 사인파의 주파수가 줄어들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동작이 멈출 수도 있다.

6. 때문에 이를 컨트롤할 제2의 발진자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오실레이터다

7. 오실레이터는 수정 발진자의 출력 상태를 보고 입력단에 되먹임을 하는 일종의 피드백 회로를 구성한다

8. 오실레이터로는 트랜지스터 또는 진공관을 쓴다

9. 흔히 XO라고 부르는 크리스탈 오실레이터(Crystal Oscillator)는 수정 발진자와 OP앰프, 트랜지스터 오실레이터가 한 패키지 안에 들어가 있다

10. 디지털 클럭의 최종 출력 주파수는 톱니 모양의 방형파(Square Wave)다

사진1. XO 회로 블록 다이어그램. 수정 발진자와 바이폴라 트랜지스터 오실레이터, 커패시터, 저항 등으로 구성됐다.
사진2. EVO 100 DAC에 투입된 진공관 오실레이터(가운데)와 실버 메탈 케이스에 수납된 수정 발진자(아래 오른쪽)

너무 에둘러왔지만 슈퍼튜브클럭은 트랜지스터 오실레이터 대신에 진공관(6S6B) 오실레이터를 썼다는 것이 핵심이다. 결국 이 경우에도 수정 발진자는 따로 존재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EVO 100 DAC 내부 디지털 기판을 자세히 보면 6S6B 진공관 옆에 메탈 캡슐에 쌓인 24.576MHz 스펙의 수정 발진자가 표면실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3. 슈퍼튜브클럭의 42.2MHz 출력 주파수. 사각 방형파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어쨌든 수정 발진자와 진공관 오실레이터 조합의 슈퍼튜브클럭의 최종 출력 주파수는 42.2mHz. 한 사이클 당 걸리는 시간은 불과 5나노초(ns), 즉 50억분의 1초에 불과하다. 프리마루나에서 공개한 오실로스코프 그래프를 보면,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고주파 신호임에도 불구하고 방형파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만큼 디지털 기기에 정확한 타임 레퍼런스를 제공해준다는 뜻이다.


한편 프리마루나에 따르면 트랜지스터에 비해 대역폭이 좁은 진공관 오실레이터를 쓴 이유는 음악신호가 포진한 저주파 대역(10~100kHz)에서 진공관의 노이즈가 훨씬 낮기 때문. 유입 노이즈가 줄어들면 이에 영향을 받는 지터(jitter)도 줄어든다는 것이 프리마루나의 설명이다. EVO 100 DAC의 디지털 클럭 지터는 48kHz에서 160피코세컨드(ps), 96kHz에서 60피코세컨드(ps)에 그친다. 오차가 각각 160조분의 1초, 60조분의 1초라는 뜻이다.


시청

▲ PrimaLuna Evo 100 DAC

필자의 시청실에서 이뤄진 시청에는 프리마루나의 EVO 300 인티앰프와 맨리의 ML10 스피커를 동원했다. 소스기기는 왓슨오디오의 네트워크 브릿지 Emerson Digital. 동축케이블로 EVO 100 DAC과 연결해 주로 룬으로 코부즈 스트리밍 음원을 들었다.

Arne Domnerus ‘High Life’(Jazz At The Pawnshop)

먼저 안에 DAC을 내장한 에머슨 아날로그와 인티앰프를 직결해 들어보면, 색번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음이 나온다. 은근히 묵직하고 무대를 넓게 쓰는 것도 특징. 아주 간단하게 룬 네트워크 시스템이 완성된 것이다. 이어 에머슨 디지털과 EVO 100 DAC 조합을 투입하니, EVO 100 DAC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세다. 일단 시스템 게인이 늘어난 것이 분명하고, 인티앰프의 드라이빙 능력도 크게 좋아졌다. 무엇보다 음의 입자감이 고와지고 음수가 늘어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활력과 에너지, 여기에 다이내믹 레인지 특성이 좋아졌고 무대의 투명도도 급상승했다.

Anne-Sofie Von Otter ‘Baby Plays Around’(For The Stars)

EVO 100 DAC을 투입하니 역시 소릿결이 매끄러워지고 디테일이 늘어난다. 특히 재생음의 표면에서 윤기가 흐르는 점이 가장 돋보인다. 반대로 생각하면 왓슨오디오에서 에머슨 디지털을 내놓은 것도 이런 웰메이드 DAC을 활용하라는 취지다. 그만큼 스트리밍 음원이 훨씬 안락하게 들린다. 인과관계를 추적해보면, 역시 슈퍼튜브클럭으로 지터를 최소화한 점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 다음이 아날로그 출력단에 리니어리티가 좋은 쌍3극관을 쓴 점, AC오프셋필터를 통해 전원트랜스 험이나 EMI를 차단한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고음에서도 에너지를 잃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든다.

Gilbert Kaplan, Wiener Philharmoniker - Mahler Symphony No.2(Mahler 2)

에머슨 아날로그로 들어봐도 여린 음을 살뜰히 대하는 모습이라든가 총주에서 허둥지둥하지 않는 모습이 대견하다. 초간단 룬 네트워크에 DAC 기능까지 갖춘 실력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EVO 100 DAC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인지 음의 입자감이 아주 곱다거나 말러 2번이 아주 뜨겁고 파괴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에머슨 디지털과 EVO 100 DAC 조합을 투입하면, 단번에 SN비가 높아지고 한 음 한 음을 보다 분명히 내는 점이 역력하다. DAC의 기본 책무라 할 분해능이 늘어난 것이다. 총주에서 음들을 팍 터뜨리는 맛도 크게 늘었다. 음의 형체는 보다 단단해지고 스텝은 더욱 경쾌해졌다. DAC은 결국 지터와의 싸움인 것이다.


Nils Lofgren - Keith Don’t Go (Acoustic Live)

에머슨 아날로그 역시 임장감이라든가 해상력, 음의 싱싱함에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발휘한다. 특히 기타연주의 생생한 아티큘레이션은 이것이 이 가격대 DAC을 내장한 네트워크 플레이에서 나오는 것인가 싶을 정도. 하지만 EVO 100 DAC을 투입하면 ‘어나더 레벨'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음이 소프트해지고 무대가 더욱 커져서 그 안에 자리잡은 악기들과 뮤지션이 잘 보인다. 칠흑으로 변한 배경, 보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보컬도 눈에 띈다. 특히 보컬은 봄비가 적신 대지처럼 촉촉하기 짝이 없다. 리퀴드, 선명, SN비, 이 모든 것은 결국 한 지점으로 귀결된다. 디지털 음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타임 에러(지터)는 아날로그 재생음에 치명타를 미친다는 사실이다.

 

총평

오디오 기기를 리뷰하다보면 해당 제품의 시그니처를 따지게 된다. 남들과 다른 당신만의 장기나 차별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접해본 프리마루나의 EVO 인티앰프와 프리, 파워앰프는 ‘막강한 튜브 롤링’과 이를 가능케 한 ‘어댑티브 바이어스' 설계였다. 그러면 EVO 100 DAC은? 단언컨대, 디지털 클럭의 오실레이터를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슈퍼튜브클럭'이다.


물론, 오실레이터를 트랜지스터에서 3극 진공관으로 바꾸니 이 모든 결과가 나왔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기성 업샘플링 칩과 DAC 칩을 쓰고서도 이렇게 촉촉하고 정숙하며 선명한 아날로그 음을 얻은 데에 큰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여기에 리니어 전원부, 진공관 출력단, 진공관 정류단, 듀얼 모노 설계의 완성도도 변수였다고 생각한다. 정말, 세상에 없던 DAC이 나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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