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런모델다운 가슴 설레는 음
필자가 오디오 리뷰를 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2004년 여름, 뉴질랜드 남섬에 간 일이 있다. 당시 임필성 감독의 영화 ‘남극일기’가 그곳 스노우 팜에서 한창 촬영 중이었고, 당시 필자는 영화 담당 기자여서 취재차 갔던 것이다. 과연 남극을 무대로 삼은 영화가 촬영지로 선택했을 만큼 끝이 안보이는 설원이 대단했다. 보이는 것은 파란색 하늘과 하얀색 눈, 두가지 뿐. 한국에서는 무더위와 열대야로 난리였는데, 두꺼운 양말까지 신은 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곳에서 2개월 이상 머물며 혼신의 연기를 다했던 배우 송광호 유지태 최덕문 등의 검게 그을린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뜬금없이 뉴질랜드 얘기를 꺼낸 것은 당시 그곳에서 매몰차게 불던 ‘하우통가’(Hautonga)라는 바람 때문이다. 하우통가는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 언어로 ‘남쪽에서 부는 바람’(southerly wind), 즉 남풍을 뜻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훈훈한 남풍과는 완전 180도 다른 의미다. 뉴질랜드는 남반구에 있고, 하우통가는 다름 아닌 남극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기 때문이다. 북반구에 있는 우리로 치면 북풍인 셈. 하여간 2004년에 맞은 그 하우통가는 정말 매서웠었다.
이 매서운 바람을 최근 다시 맞았다. 이번에는 인티앰프다. 그것도 2011년에 등장한 롱런 모델이다. 국내에도 유저가 많은 뉴질랜드 제작사 플리니우스(Plinius)의 Hautonga(하우통가) 앰프가 그 주인공으로, 개인적으로는 친한 오디오숍에서 자주 들었지만 정식 리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잘 됐다, 싶었다. 그간 하우통가에 물린 소스기기나 스피커에만 집중했었는데, 이번에는 이 ‘은빛 라운드 섀시 + 블루 리어 패널’ 앰프를 제대로 파헤쳐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은빛과 블루, 뉴질랜드 그 설원 풍경을 빼닮았다.
플리니우스, 9200, 하우통가
플리니우스는 1980년 메커니컬 엔지니어 피터 톰슨(Peter Thomson)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에 설립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필자가 2004년에 갔었던 스노우 팜과 마찬가지로 남섬에 있는 해안도시. 어쨌든 플리니우스는 설립 이후 솔리드 스테이트 앰프와 소스기기만 만들었지만, 국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 3극 진공관 같은 유연하고 감칠맛나는 음색과 스피커를 가리지 않는 찰진 구동력 덕분이다.
파워앰프 모델의 경우 증폭방식을 클래스A와 클래스AB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점도 개인적으로 부러웠던 것 중 하나. 이 경우 클래스AB 앰프의 옵션으로 클래스A를 선택하게끔 하는 게 보통인데, 제작사 설명을 들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클래스A로 듣다가 변화를 주고 싶을 때 클래스AB를 선택하라는 것이 플리니우스 설명이다. 제작사에서는 클래스A는 음악을 집중해서 들어야 할 때, 클래스AB는 쉬면서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선택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2011년 하우통가가 나오기 전 플리니우스를 대표하는 인티앰프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던 9200이었다. 8옴에서 200W, 4옴에서 300W를 내는 솔리드 스테이트 푸쉬풀 앰프로, 은빛 라운드 섀시에 블루 리어 패널, 여기에 후면 손잡이까지 후속모델인 하우통가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전면의 3개 노브(하우통가는 1개)만 아니었다면 하우통가와 착각할 정도. 두 앰프 모두 증폭방식은 클래스AB만 지원하지만, 바이어스 전류를 상당히 많이 줘 실제 대부분의 시청은 클래스A로 이뤄지는 점도 똑같다.
한편 플리니우스의 2019년 9월 현재 라인업은 인티앰프에 300W 출력의 플래그십 히아토(Hiato)와 시청기인 하우통가, 아랫모델인 인스파이어(Inspire) 880, 980이 있다. 880과 980 모두 80W 출력이지만 980은 네트워크 기능을 포함했다. 프리앰프는 레퍼런스(Reference) M-10과 카이티키(Kaitaki), 파워앰프는 레퍼런스(Reference) A-300과 P10, 포노앰프는 P100과 코루(Koru)가 포진했다. 이밖에 마우리(Mauri) CD플레이어, 토코(Toko)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 티키(Tiki) 네트워크 플레이어도 마련됐다.
Hautonga 외관
하우통가는 2011년 2월, 9200의 후속모델로 출시됐다. 한 해 전인 2010년이 플리니우스가 설립 30주년을 맞은 해였던 만큼, 하우통가는 9200과 그간 플리니우스에 축적된 내공이 모두 집약된 제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앰프가 10년 가까이 장수할 수 있는 첫번째 이유다. 그것도 버전2나 시리즈2, 마크2, 이런 소폭 업그레이드 없이도 말이다. 외국 재단사가 정말 잘 지적했다. ‘두번 생각하고 한번에 잘라라’(Think twice, cut once).
일단 하우통가의 외관은 전면 패널의 소스/레코드 노브 2개 대신 버튼을 채택한 점을 빼놓고는 전작 9200과 거의 비슷하다. 포노 스테이지를 내장한 점도 똑같다. 물론 후면 단자 위치나 배열이 달라지긴 했다. 그런데 하우통가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하우통가와 9200 섀시 디자인에서 그동안 필자가 전혀 짐작도 못했던 모습을 하나 발견했다. 어쩌면 다 알고 있는데, 필자만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앰프 양 측면이 서로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오른쪽은 볼트가 2개, 왼쪽은 8개인 것이다.
더욱 자세히 살피니 이 비대칭 이유가 짐작된다. 전면 패널은 오른쪽 측면 패널과 하나로 이어졌고 왼쪽 측면 패널과는 라운드 코너를 지나서 만난다. 왼쪽 측면 패널은 상판에서 내려왔다. 결국 하우통가는 바깥쪽 아노다이징 알루미늄 섀시가 단 2개(하판, 후면 제외)로 이뤄진 셈. 이는 통상 4개(하판, 후면 제외)가 동원되는 일반 앰프에 비해 진동제어에서 훨씬 유리하다. 접점을 줄였기 때문이다. 통 알루미늄 빌렛(billet)에서 깎아낸 앰프를 제외하고 이렇게까지 섀시 디자인에 신경을 쓴 제작사가 또 있었나 싶다.
전면 패널부터 본다. 가운데 음각된 ‘PLINIUS’ 밑에 앰프의 동작상태를 나타내주는 디스플레이 LED, 그 아래에 소스 선택 버튼 6개가 각각의 작은 LED 밑에 달렸다. 왼쪽부터 포노, CD, 라인 1~4 순이다. 맨 왼쪽의 작은 LED는 ‘홈시어터(HT) 바이패스’를 선택할 경우 불이 들어온다. 맨 오른쪽 둥근 노브는 볼륨 컨트롤용. 동봉된 크고 길며 무거운, 거의 몽둥이 수준의 알루미늄 리모컨도 플리니우스의 또다른 트레이드 마크다.
파란색이 인상적인 후면 패널은 보는 일 자체가 즐겁다. 후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바이와이어링이 가능한 스피커 케이블 커넥터. 양쪽에 2페어씩 달렸다. 가운데 위에는 입력단(포노, CD, 라인1~4)과 HT 바이패스, 프리아웃, 라인아웃, 트리거 단자가 있다(모두 RCA 단자). 아래 오른쪽에 있는 XLR 단자는 CD 입력용. 토글 스위치로 선택할 수 있다. 포노단은 MM 카트리지, RIAA 커브에만 대응한다. 프리아웃 출력레벨은 47k옴에서 1.5Vrms, 라인아웃(레코딩용) 출력레벨은 200옴에서 190mV를 보인다.
Hautonga 스펙과 설계디자인
하우통가는 8옴에서 200W, 4옴에서 280W를 내는 클래스AB 증폭, 푸쉬풀 구동의 솔리드 스테이트 인티앰프다. 입력 및 전압증폭단은 왜율이 적고 3극 진공관과 유사한 특성을 보이는 J-FET이 듀얼 디퍼런셜(dual-differential. 차동) 회로로 투입됐고, 전력증폭이 이뤄지는 출력단은 바이폴라 트랜지스터를 채널당 3페어씩 썼다(히아토는 5페어). 트리플 패럴렐 구성인 것인데, 일반적인 NPN-PNP 구성이 아니라 NPN으로만 이뤄지는 점이 플리니우스 앰프 출력단의 특징이다.
클래스AB 앰프인데도 아이들 전류(idle current)가 채널당 140mA(32W)에 달할 정도로 높은 점도 플리니우스 앰프의 또다른 아이덴티티다. ‘상시대기중’인 아이들 전류가 높으면 그만큼 클래스A 증폭 구간이 높아지기 때문에 음질면에서 유리하다. 단점은 열이 많이 난다는 것. 참고로 플래그십 인티앰프 히아토는 아이들 전류가 175mA, 클래스AB와 클래스A 증폭을 선택할 수 있는 플래그십 파워앰프 레퍼런스 A-300은 아이들 전류가 각각 320mA, 2200mA에 달한다.
전원부는 토로이달 트랜스포머를 위시한 풀 리니어 구성. 바닥에 트랜스와 파워서플라이 기판이 있고, 그 위에 증폭 기판, 양쪽 내부 방열핀 안쪽에 출력 트랜지스터가 도열한 구조다. 입력단과 전압증폭단에는 정전압 회로를 거친 전원이, 출력단과 이를 드라이빙하는 드라이브단에는 정전압 회로를 거치지 않은 전원이 공급되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음색과 음질을 결정짓는 전압증폭단에는 보다 전압변동율이 낮은 전원을 공급하고, 구동력을 좌우하는 전력출력단에는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전원을 공급하기 위한 설계로 보인다.
스펙은 플리니우스의 롱런모델답게 지금 갓 나온 인티앰프들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우선 주파수응답특성은 가청주파수대역인 20Hz~20kHz에서 음압 변동폭이 불과 +,-0.2dB에 그치고, 5Hz~70kHz에서도 -3dB에 머물 정도로 광대역에 걸쳐 플랫하다. 앰프 스피드를 알 수 있는 슬루 레이트(slew rate)는 50V/us, 채널당 피크 전류는 40A(히아토는 50A)에 달한다. 이밖에 게인은 40dB, 포노단 게인은 디폴트인 하이게인 선택시 66dB, 로우게인 선택시 60dB를 보인다. 상판을 열고 포노 기판의 점퍼를 오른쪽으로 밀면 하이게인, 왼쪽으로 밀면 로우게인이다.
시청
시청에는 DAC을 내장한 오렌더(Aurender)의 네트워크 뮤직서버 A100과 포칼(Focal)의 스탠드마운트 스피커 Diablo Utopia Colour EVO(디아블로 유토피아 컬러 에보)를 동원했다. 디아블로 유토피아 컬러 에보는 1인치 베릴륨 역돔 트위터와 6.5인치 W 콘 미드우퍼 조합으로 공칭 임피던스 8옴(최저 4옴)에 감도 89dB, 주파수응답특성 44Hz~40kHz(-3dB)를 보인다. 권장 앰프 출력은 25~200W.
플리니우스 하우통가를 이 스피커에 물려 들은 첫 인상은 스피커로 많은 전류를 흘려준다는 것.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그 티가 확연했다. 그러면서 매끄럽고 고운 소릿결과 차분한 성정이 마치 300B 진공관 앰프를 연상케 했다. 곡에 따라서는 두터운 붓으로 시원시원하게 캔버스를 색칠해가는 느낌도 받았다. 전체적으로 2웨이 포칼 디아블로 유토피아 스피커를 너끈히 밀어붙인다는 인상. 두 조합은 이번 시청 직전에 들었던 다른 앰프+플로어스탠딩 스피커 조합보다 상생과 궁합이 잘 맞았다.
총평
하우통가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2011년 출시하자마자 사서 썼어도 앞으로 10, 20년은 더 쓸 수 있을 것은 내구성과 치밀한 만듦새, MM 포노 입력과 CD XLR 입력을 포함한 넉넉한 입력단과 바이와이어링 스피커 출력단 등 버릴 게 하나도 없다. 프리아웃이 되기 때문에 파워앰프 연결도 가능하지만, 지금 하우통가가 들려준 음과 무대를 넘어서리라고는 쉽게 장담할 수 없다. 하우통가에 없는 것은 디지털 입력단과 요즘 유행하는 네트워크 모듈 뿐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하우통가가 세월에 상관없이 언제나 곁에 두고 쓸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더 감탄한 것은 하우통가가 들려준 소리와 스피커에 대한 장악력이었다. 담백하고 촉촉하며 소프트한 음의 감촉, 스피커와 뒷벽을 무너뜨린 넓은 무대, 그리고 대편성곡 총주나 록음악 하이라이트에서 보란듯이 내미는 손아귀 힘이 대단했다. 시종일관 계속된 깨끗하고 투명한 음은 필자의 300B 싱글 파워앰프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물론 100점은 아니다. 가장 속상한 것은 XLR 라인입력단이 없다는 것이고, 가장 아쉬운 것은 음에 좀더 고운 입자감이 깃들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후자의 경우 이 가격대 인티앰프에서 그것까지 바라면 과욕이다. 롱런모델의 속 깊은 저력과 훼손되지 않은 감수성을 확인한 즐겁고 가슴 설렌 시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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