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텍과 함께라서 행복했던 일주일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실텍(Siltech)은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케이블이다. 비록 집의 스피커에 붙여놓은 점퍼케이블이실텍 제품이지만,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국내외 유저들의 높은 평가도 솔깃했지만 무엇보다 99.999999%의 은에 0.000001%의 금을 섞은 도체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자매 회사인 크리스탈(Crystal) 케이블은 예전 헤드폰 케이블로 접해봤는데 정말 대단했다. 물린 오디지 헤드폰이 초사이언으로 업그레이드된 듯했다. 그럼에도 실텍을신포도 취급을 했던 것은, 짐작하시겠지만 그 높은 가격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풀레인지에서 케이블 리뷰를 자택에서 진행할 수 있겠냐고 문의를 해왔다. 실텍의 XLR 인터케이블이라고 한다. 와이 낫? 이틀 후 택배가 도착했고, 박스를 열어보니 길이 1.5m 케이블 양쪽 실버메탈하우징에‘Princess. Silver-Gold Interconnect’라고 씌어 있는 프린세스 케이블이었다. 단자는 뉴트릭(Neutrik NC-FXX)) 제품인데 실텍에서 직접 손으로 선재와 체결한다고 한다. 단자 결합 상태와 케이블 슬리빙익스펜더마감, 뉴트릭XLR 단자 상태 모두 빼어났다.
실텍과 크리스탈
실텍은 1983년 두 명의 대학 졸업생이 네덜란드 아른헴 인근 엘스트(Elst)라는 곳에 설립했다. 이들은 몇 가지 실험으로 도체에 따라 케이블 소리가 달라진다는 차이를 발견하게 됐고 그 중 은(silver)이 최고의 도체라고 확신했다. 실버와 테크놀로지 앞글자를 따 실텍이 탄생하게 된 이유다. 실텍은 이후 1992년 헝가리 출신 전자공학 엔지니어이지 현 CEO인 에드윈 라인벨트(Edwin Rijnveld)가 인수했다.
크리스탈은 그의 아내 가비 라인벨트(Gabi Rijnveld)가 2004년에 독자적으로 설립한 브랜드다. 피아니스트이자 오디오파일인 그녀가 실텍에 합류해 내놓은 잇단 프로젝트가 성공한 덕에 독자 회사를 설립한 것. 사명은 그녀가 실텍 재직 당시 수행했던 ‘Crystal TIL(The Inevitable Link) Silver Cable’에서 기인했다. 실텍과크리스탈은 현재 이들 부부가 세운 인터내셔널 오디오 홀딩(International Audio Holding)이라는 그룹 소속으로 돼 있으며, 한 건물을 사이 좋게 나눠 쓰고 있다.
Princess XLR 인터케이블본격 탐구
(아래3개) 트리플 크라운 시리즈
프린세스 XLR 케이블은 실텍의 핵심이라 할 로열시그니처(Royal Signature) 시리즈의 막내다. 시리즈 서열로 보면 아래에 클래식 애니버서리(Classic Anniversary)가 있고, 위로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 시리즈가 있다. 로열시그니처 시리즈의 경우 XLR 케이블만 따져보면, 맨 위부터 Empress Double Crown(엠프레스 더블 크라운), Empress Crown(엠프레스 크라운), Empress(엠프레스), Queen(퀸), Crown Princess(크라운 프린세스), 그리고 시청기인 Princess(프린세스) 순이다. ‘로열’이 붙은 시리즈답게 모델명에 황후, 왕비, 공주를 붙인 점이 눈길을 끈다. 이에 비해 스피커케이블에는 킹(King)이나 엠페러(Emperor) 같은 남성명사를 쓴다.
프린세스 XLR 인터케이블은 선재로 솔리드 G7 실버-골드, 커넥터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뉴트릭캐논 암수 단자를 썼다. G7은 실텍에서 개발한 선재가 최신 7세대(7th Generation)에 접어들었다는 뜻. 물론 실텍은실버(Silver)와 테크놀로지(Technology)를 결합한 사명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순은 선재를 썼고, 1997년 G3 때부터 순은에 금을 결합한 선재를 썼다. 실텍 선재 히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G1 : 1984년 실텍에서 처음 은 도체를 사용해 케이블을 제작했다. 당시 케이블에 순은을 썼다고 해서 오디오파일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 바로 실텍이었다.
G2 :은 결정(crystal)의 길이를 키워 미세한 결정 경계 틈을 대폭 줄였다. 실텍은 은 소재 케이블 소리가 지나치게 밝고 자극적이라는 인식이 바로 이 틈으로 인한 소리의 왜곡 때문이라고 봤다. 참고로 금속을 녹여 선재를 만들면 그레인(grain)이 생기는데 1m 길이에 수백 개 이상의 그레인이 발생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 그레인 사이에 경계선(grain boundary)이 생겨 음악신호가 이 경계를 통과할 때 순도가 떨어져 결국 음질저하를 일으킨다는 것. 통상 1cm 길이 선재에는 1000만 개 정도의 경계선이 발견된다.
G3 : 1993년 은에 순금을 섞은 FTM-4 케이블을 출시한 뒤, 1997년 이를 개선해 G3을 출시했다. 은 도체 결정 경계 부근에 금 원자를 주입시켜 결정 경계로 인한 왜곡을 20%로 줄였고, G3 후반기에는 10%까지 떨어졌다. 공개된 사진을 보면 마치 돌(은)로 쌓은 벽 틈새를 시멘트(금)로 메운 듯한 이미지다.
G4 : 정밀산업용 케이블 선재.
G5 : 한 세대를 건너 뛴 가정용 케이블 선재. 결정 경계 오류를 1% 미만으로 줄였다.
G6 : 실텍의 제련 기술 발전으로 결정 경계 오류가 0.1%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G6 후반기인 2006년에는 섭씨 1000도로 금속 분자를 다시 정렬시켜 전도성(conductivity)을 높인 열처리기술 SATT(Siltech Advanced Thermal Treatment) 공정을 도입, 성능을 개선시켰다.
G7 : SATT 공정 업그레이드를 통해 유도용량과 전기저항을 대폭 감소시켰다.
S8 : 선재 전체가 하나의 결정으로 이뤄진 모노 크리스털(monocristal) 순은 선재. 결정 경계가 아예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금 원자가 필요 없게 됐다. 참고로 모노 크리스털, 즉 단결정은 금속 분자 알맹이를 아주 작게 하면서도 분자 배열을 벌집 구조처럼 질서정연하게 만듦으로써 선재 전체가 하나의 결정체로 된 것을 말한다. 초크랄스키(Czochralski) 방식으로 단결정을 생산할 경우, 시간당 0.1~1mm씩 자란다고 한다.
프린세스 XLR 인터케이블은 따라서 순은+금 선재의 최신 버전인 G7 도체를 썼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같은 로열시그니처 시리즈의 ‘크라운’과 ‘더블 크라운’ 모델은 단결정 순은 선재인 S8을 G7과 혼용해 썼다. 더블 크라운은 크라운에 비해 S8의 양을 2배 늘리고, 트리플 크라운은 이를 다시 2배 늘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트리플 크라운만이 도체 전체를 S8 소재로 제작한다. 트리플 크라운 XLR 케이블은 3000만원이 넘는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G7 선재 두 가닥을 ‘X 밸런스드 마이크로 테크놀로지’(X Balanced Micro Technology) 라는 기술로 정확히 꼬아 외부 전자기장 간섭을 일반 케이블의 1/1000 수준으로 줄인 점도 실텍의 빛나는 성취다. 잘 아시는 대로 XLR 케이블은 신호선과 어스선이 분리된 2심 구조이며, 절연체로 감싼 각 신호선과 어스선은 신호 전송에 따라 발생하는 전자기장을 줄이기 위해 꽈배기처럼 꼬는 것이 보통이다.
이 과정에서 정확히 90도를 두고 두 선재가 정확하게 꼬이게 하는 기술, 그리고 이를 위해 얇고 단단하며 절연성능이 좋은 캡톤(Kapton)을 인슐레이터로 투입한 기술이 바로 X 밸런스드 마이크로 테크놀로지다. 이 기술 덕분에 두 선재가 하나의 케이블처럼 단단하게 꼬임으로써 진동에 의한 마이크로포닉노이즈도 줄였다고 한다. 한편 듀폰사의캡톤은 테플론(Teflon) 같은 일반 절연체보다 안정적이며 내구성이 극도로 높아 매우 얇은 인슐레이터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만약 인슐레이터 두께가 불규칙하거나 두껍다면 선재를 꼬는 과정에서 오차가 생기게 된다.
시청
자택에서 쓰고 있는 마이텍의맨하탄 II DAC과 일렉트로콤파니에의 스테레오 파워앰프 AW250R 사이에 실텍의프린세스 XLR 인터케이블을 투입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싶을 정도로 기존 케이블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음이 야들야들하고 매끄러우며 배경이 정숙했다. 곡에 따라서는 음량마저 증가한 듯했다. 스테레오 이미지의 중앙 포커싱, 음의 음영과 악기의 앞뒤 레이어도 모두 급상승했다.실텍이 이 정도 레벨인 줄은 정말 몰랐다.
총평
행복한 일주일이었다. 귀를 쫑긋 세워 테스트를 마친 후부터는 프린세스 XLR 인터케이블을 마음껏 즐겼기 때문이다. 평소 좋아하던 곡들이 어떻게 다르게 들리는지 귀에 담아두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아기자기하게 달라진 음의 촉감을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무심한 아내마저 “소리가 깨끗한데”라며 케이블과 오디오 기기에 눈길을 준다. 지금까지 집에서 여러 케이블을 테스트해보고 리뷰도 해봤지만, 제대로 실텍을 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 만족도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대단했다. 사고 싶은 케이블을 오랜 만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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