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스 코흐와 빅토르 코멘코의 빛나는 합작

조회수 2019. 4. 10. 10:0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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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anced Audio Technology REX DAC

▲ REX DAC

예전 미국 BAT(Balanced Audio Technology)의 진공관 프리앰프와 파워앰프를 리뷰하면서 그 만듦새와 설계, 소리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컨트롤/증폭부와 전원부 2섀시 구성의 프리앰프 REX II Preamplifier는 가상의 무대를 만드는 능력, 이런 무대 곳곳에 각 악기를 핀포인트로 맺히게 하는 능력, 그러면서 악기의 음 하나하나를 알뜰하게 파헤치고 어루만지며 드러내는 능력이 대단했다. 클래스A 80W 출력의 스테레오 파워앰프 REX II Amplifier는 묵직하고 단단하게 음들을 밀어내는 모습이 멋졌다.


그런데 이들 BAT 앰프에서 눈길을 끈 것은 투입된 진공관의 면면이었다. 프리앰프는 쌍3극관 6H30을 채널당 4개씩 증폭단에 투입했고, 파워앰프는 3극관 6C33C-B를 채널당 2개씩 출력단에 투입했는데, 두 진공관 모두 구 소련에서만 사용되어오다 BAT를 통해 처음 오디오 기기에 도입된 사연이 있다. 이는 BAT의 공동설립자 빅토르 코멘코(Victor Khomenko)가 구 레닌그란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기공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엔지니어 출신이기 때문이다.

▲ (좌) REX 프리앰프에 투입된 6H30 진공관, (우) BAT의 공동설립자 빅토르 코멘코(Victor Khomenko)

빅토르 코멘코, 안드레아스 코흐와 손잡다

시청기인 REX DAC은 2018년 초 출시된 BAT 최초의 DAC이다. 전면 패널 오른쪽에 볼륨 노브가 없는 점만 빼면 REX II 프리앰프와 거의 비 슷한 외모를 지녔다. 일단 스펙부터 살펴보면, PCM은 24비트/384kHz까지, DSD는 DSD256까지 지원한다. 디지털 입력단자는 AES/EBU, 동축(2), 광(2), USB B타입을 갖췄고, 아날로그 출력단자는 밸런스(XLR) 1조만 갖췄다. 다른 데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디지털 신호 컨버팅에만 올인한 DAC인 셈이다.


하지만 설계 디자인쪽을 살펴보면, 다소 평범했던 외관과 스펙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디지털 파트 디자인은 ‘DSD의 대부’ 안드레아스 코흐(Andreas Koch)가 맡았고, 빅토르 코멘코가 담당한 아날로그 출력단에는 좀체 보기 힘든 3극관인 6C19가 채널당 3개씩 투입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종 커플링 디바이스는 커패시터가 아닌 출력트랜스. 파워서플라이의 핵심인 토로이달 트랜스(캐나다 플리트론 제품)도 디지털과 아날로그용으로 2개씩 투입됐다. 어쨌든 BAT 최초의 DAC에 안드레아스 코흐가 설계한 DAC 모듈이 들어갔다는 점부터 시선을 잡아매기에 충분하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6C19 진공관의 역할과 특성도 몹시 궁금했다.


안드레아스 코흐의 AK Desing DAC 보드

▲ BAT의 공동설립자, 안드레아스 코흐(Andreas Koch)

우선 안드레아스 코흐다. 대학에서 시그널 프로세싱을 공부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스위스의 스튜더/리복스 본사에 입사해 48채널 디지털 테이프 레코더, 하드디스크 레코더(Dyaxis)를 개발했다. 이어 미국 소니에서 DSD신호로 녹음, 편집, 믹싱을 모두 해낸 세계 최초 SACD 포맷의 프로페셔널 레코딩 워크스테이션 Sonoma(Sony One-bit Mastering Audio Station)를 내놓았다.


안드레아스 코흐는 이후 2003년 자기 이름 이니셜을 따서 AK디자인(AK Design)을 설립했고, 소니에서 DAC 개발을 의뢰하자 EMM랩스를 주재하던 에드 마이트너(Ed Meitner)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2008년에는 플레이백 디자인스(Playback Designs)를 공동 설립해 SACD 플레이어 MPS-5와 MPS-3, DAC MPD-3을 내놓았다. 현재 플레이백 디자인에서는 MPD-8과 Merlot, 2종의 DAC이 나오고 있다.

안드레아스 코흐의 DAC 설계는 2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자이링스 스파르탄(Xilinx Spartan) 칩으로 DAC 파트를 직접 설계한다는 것이다. 부품 하나하나를 디스크리트로 이어붙여 DAC 회로를 완성시키는 FPGA(Field Programmable Gate Array) 방식이다. 버브라운, ESS, AKM 같은 범용 DAC칩에 거의 모든 것을 맡기는 일반 DAC이 아니라는 얘기다.


두번째는 DSD256(11.2MHz)을 제외한 모든 PCM/DSD 입력신호를 일단 DSD128(5.6MHz)로 변환/업샘플링한 후 아날로그 신호로 컨버팅한다는 것이다. 멀티비트 PCM 신호 대신 1비트 DSD 신호를 컨버팅하는 쪽이, 그리고 이를 5.6MHz로 업샘플링한 후 컨버팅하는 쪽이 오리지널 아날로그 신호에 더 가까운 파형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역시 ‘DSD 대부’ 다운 설계다.


이러한 안드레아스 코흐의 손길은 BAT REX DAC에 고스란히 담겼다. REX DAC 내부 사진을 보면 중앙 왼쪽에 ‘AK Design’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DAC 모듈과 이 모듈이 장착된 보드가 눈길을 끄는데, 이것이 바로 안드레아스 코흐가 설계한 디지털 파트다. FPGA 디스크리트 설계, DSD128 변환 및 업샘플링, 72비트 연산, 초정밀 클럭킹 등을 통해 PCM은 24비트/384kHz까지, DSD는 DSD256(11.2MHz)까지 아날로그 신호로 컨버팅한다.


빅토르 코멘코의 아날로그 출력단

▲ BAT REX DAC의 내부사진

이번에는 3극관 6C19와 출력트랜스를 핵심으로 한 아날로그 출력단이다. 내부 사진을 보면, AK Design 보드 오른쪽에 6C19 진공관 6개와 그 뒤로 케이스에 담긴 출력트랜스 2개가 보인다. 출력단에 고전류 3극관인 6C19를 채널당 2개씩 사용한 점이 REX DAC의 또다른 시그니처다. 6C19는 ‘고전류’라는 말 그대로 플레이트 전류가 95mA에 달할 정도로 높다. 잘 알려진 쌍3극관 12AX7의 경우 1.2mA에 그친다. 6C19는 또한 내부저항이 400옴일 정도로 낮아 특히 저역재생에서도 유리하다.


그러면 나머지 2개의 6C19는 어떤 역할을 할까. 바로 이 대목에서 파워서플라이에 관한 빅토르 코멘코의 섬세한 설계를 엿볼 수 있는데, 바로 4개의 증폭관에 정전류를 제공하는 커런트 소스(current source) 역할을 맡긴 것이다. 이는 REX II 프리앰프에도 투입됐던 설계방식으로, 채널당 2개의 6C19가 커런트 소스 진공관으로서 증폭단의 6H30에 정전류를 공급했었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증폭단에 정전류가 공급되면 증폭의 선형성(linearity)이 좋아진다.


REX II 프리앰프와 마찬가지로 REX DAC에도 출력트랜스를 투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같은 트랜스포머 커플링 방식은 전압뿐만 아니라 전류까지 흘러 뒷단에 전력(W=IxV), 즉 에너지를 더 많이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마디로 프리앰프를 더 강력하게 드라이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출력트랜스는 출력 임피던스가 낮다는 장점도 있어 인터케이블을 덜 가리고 프리앰프와 결합시 노이즈 유입가능성도 훨씬 줄어든다. 이에 비해 커패시터 커플링 방식에서는 출력 임피던스를 낮추기 위해 통상 캐소드 팔로워 회로를 쓰는데 이러면 특히 저역에서 왜곡이 심해진다.


시청

시청에는 몰라몰라(Mola-Mola)의 프리앰프 Makua(마쿠아), 모노블럭 파워앰프 Kaluga(칼루가), 오디오 솔루션(Audio Solution)의 플로어스탠딩 스피커 Figaro M(피가로 M)을 동원했다. 마쿠아에 내장된 DAC은 바이패스, 룬 코어로 쓰고 있는 필자의 맥북에어에 REX DAC을 USB케이블로 연결했다. 칼루가는 NCore NC1200 클래스D 증폭모듈을 채택, 8옴에서 400W, 4옴에서 700W를 뿜어낸다.

Andris Nelsons, Boston Symphony Orchestra ‘Shostakovich Symphony No.5’(Shostakovich Under Stalin’s Shadow)
타이달 음원으로 들었는데, 놀랄 만큼 음들이 보드랍고 매끄럽다. 해상력이 높고 풋워크가 경쾌한 음이다. 입자가 아주 고운 점도 단번에 눈길을 끈다. 투박한 REX DAC 외관과 진공관 출력단으로 인한 선입견이 일거에 박살났다. 안드레아스 코흐의 DSD 컨버팅 및 업샘플링 설계 덕분이겠지만 아주 투명하고 깨끗한 음이 스피커에서 쏙쏙 빠져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지저분한 구석이 전혀 없다. 또한 작은 볼륨, 작은 음량에서의 마이크로 다이내믹스에 대한 표현력이 발군일 정도로 좋다. 저역의 탄력감이 상당한 것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각각에 전원을 공급하는 2대의 토로이달 트랜스포머와, 출력단에 꽂힌 고전류 3극관 6C19 4발, 그리고 이들에 정전류를 공급한 6C19 2발 덕분일 것이다.
Eric Clapton ‘Wonderful Tonight’(24 Nights)
처음부터 넓직한 공간감이 잘 전해진다. 공간감의 척도인 관객 환호 소리가 정말 까마득히 먼 곳에서 들린다. 이 점만 따지자면 거의 역대급 수준. DSD 컨버팅 및 업샘플링 효과도 그렇지만, 컨버팅 이후 출력단이 DAC 음질에 얼마나 큰 역할을 미치는지 이 곡을 들으며 새삼 절감했다. 특히 DSD128로 업샘플링한 덕분에 해상력이 아주 극대화됐고, 초정밀 클럭으로 지터가 완전 휘발됐다는 느낌. 확실히 REX DAC은 섬세하고 고운 입자감, 선명하고 깨끗한 음끝이 특징이다. 차갑거나 냉랭한 구석이 없는 것은 역시 리니어 전원부와 진공관 출력단 덕분일 것이다. 여성 코러스도 이날 따라 유난히 잘 들렸는데, 이는 녹음에 담긴 정보를 REX DAC이 그만큼 모조리 긁어왔다는 반증일 것이다. 고역이 쭉쭉 올라가도 쏘거나 피곤케 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Philippe Hereweghe, Collegium Vocale ‘Cum Sancto Spiritu’(Bach Mass in B Minor)
정말 음수가 많고 음의 표면이 부드럽다. 특히 노래를 부르는 합창단원수가 점점 늘어나는 대목에서는, 그 홀로그래픽한 이미지가 마치 분재를 보는 것 같다. 이쪽에는 작은 활엽수, 저쪽에는 큰 침엽수가 아기자기하게 미니어처로 자리잡은 그 분재의 이미지다. 그러면서 요즘 더욱 보고 싶어지는 그 미세먼지 사라진 파란 하늘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음들을 들려준다. 여성단원 목소리가 여성답게 들리고, 단원들 저마다의 톤이 서로 뭉치지 않고 사람수만큼 서로 다르게 펼쳐지는 것을 보면 역시 대단한 DAC임이 확실하다. 심지어 단원들 입의 위치까지 정확히 그려주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력과 표정이 풍부한 DAC이다.
Vladimir Ashkenazy, Ada Meinich ‘Shostakovich Viola Sonata’(Shostakovich Piano Trios 1&2, Viola Sonata)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적막한 배경이다. 음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달빛이 내리는 소리가 있다면 그마저도 들릴 것 같다. 이런 상태에서 피아노 왼손이 내는 음이 한없이 내려간다. 컨버팅이라는 첫단추도 잘 맞춰졌지만, 내부저항이 낮은 3극관을 출력단에 투입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비올라의 음도 매력적이었는데, 바이올린을 위협할 정도로 고역이 높게 올라가면서도 저역은 첼로처럼 한없이 내려가는 모습이 대단하다. 여기에 비올라 특유의 슬픈 표정까지 읽혀지는 대목에서는 크게 감탄했다. 표현력이 대단한 DAC인 것이다. 수십번은 들었을 이 곡이 이날 따라 낯설게 느껴져 그 이유가 뭔가 생각해봤더니 그것은 바로 음이 살아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죽은 녹음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연주하는 듯한 음이었던 것이다.
※ 위 유튜브영상은 리뷰의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영상이며 실제 리뷰어가 사용한 음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역시 안드레아스 코흐는 대단한 DAC 설계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번 BAT REX DAC이 예전에 들었던 Merlot DAC과 월등한 격차를 보인 것은 가격차이도 있지만, 컨버팅 이후 뒷단 설계가 그만큼 더욱 잘 돼 있다는 반증이다. 기본적으로 리니어리티가 높은 진공관을 투입한데다, 고전류에 내부저항이 낮은 3극관 6C19를 투입한 것이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동일한 진공관을 커런트 소스로 활용해 정전류를 공급케 한 것도 빅토르 코멘코의 혜안이 빛난다. DAC에서 보다 아날로그에 가까운 음, 보다 곱고 섬세하며 소프트한 음을 얻고자 하는 애호가들에게 일청을 권한다. 그 매끄러운 소릿결과 풍부한 표현력에 깜짝 놀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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