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다른 설계, 실화인가 싶은 가성비 사운드
스피커를 어떻게 설계했나 들여다보는 것은 재미있다. 가끔씩 등장하는 360도 방사형(무지향) 스피커나 후면에도 유닛이 달린 바이폴라(bipolar) 스피커는 그 파격의 미가 돋보이고, 유닛 하나로 전 대역을 커버하려는 풀레인지 스피커는 일종의 소확행처럼 느껴진다. 혼 스피커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빈티지의 매력이, 정전형 스피커에서는 혈혈단신 이단아의 결기가 넘쳐난다.
뿐만 아니다. 매지코나 YG어쿠스틱스는 인클로저와 진동판을 모두 메탈로 꾸몄고, 포칼 유토피아 시리즈나 윌슨오디오는 각 챔버를 독립시켰으며, 비비드오디오는 테이퍼드 튜브를 통해 후면파 에너지의 소멸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저역품질 강화를 위한 PMC의 ATL, 통울림을 적극 활용한 하베스나 키소 어쿠스틱스의 씬월(thin-wall) 설계도 흥미롭다. 아, 탄노이나 KEF의 유구한 동축 유닛도 스피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설계다.
이번 시청기인 미국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Definitive Technology)의 D11도 평범하기를 거부한 스피커다. 미드우퍼와 축이 어긋난 오프셋 트위터, 트위터와 미드우퍼 가운데에 달린 독특한 형상의 웨이브가이드, 상판 패브릭 그릴에 숨은 패시브 라디에이터 등 북쉘프 스피커에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담으려 했을까 싶을 정도로 창의가 넘쳐난다. 그런데도 인터넷을 찾아보니 실구매가가 100만원이 안된다. 소리는? 개인적으로는 지금 당장 서브로 들여놓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사운드를 뽐냈다. 특히 저역의 양감과 타격감이 덩치와 스펙을 배반했다.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와 디맨드(Demand) 시리즈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는 현재 사운드 유나이티드(Sound United)를 모회사로 둔 하이파이 스피커 전문 제작사다. 같은 계열사로는 보다 대중적인 스피커 브랜드인 폴크 오디오(Polk Audio)가 있고 일렉트로닉스 브랜드로는 데논(Denon)과 마란츠(Marantz), 클라세(Classe)가 있다. SU는 현재 북미 스피커 시장 점유율 1위(50%)를 기록하고 있다.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는 1972년 폴크 오디오를 설립했던 엔지니어 샌디 그로스(Sandy Gross)가 1990년에 설립했다. 스피커 후면에 유닛을 단 바이폴라 설계와, 액티브 서브우퍼를 아예 스피커 안에 집어넣은 디자인으로 특히 홈시네마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돌비 애트모스 및 DTS:X, Auro-3D 재생을 위한 하이트(height) 스피커 모듈도 이들의 대표작 중 하나다. 필자가 보기에 디맨드(Demand) 시리즈의 상단 패시브 라디에이터는 이러한 하이트 스피커 모듈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디맨드 시리즈는 지난해 1월 출시됐다. 모두 2웨이 스탠드마운트 타입인데, 큰 것부터 D11, D9, D7이다. 바닥면을 보면 전용 스탠드 체결을 위한 나사구멍이 나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훨씬 고급스럽다. 저렴한 가격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면 샌드 블라스트 마감의 알루미늄 배플이 상당히 매끄러운 감촉을 선사하는 덕분이다. MDF 인클로저도 5겹 하이글로스 마감이라 일단 보는 맛이 좋다.
바인딩 포스트(D11, D9 바이 와이어링, D7 싱글 와이어링)는 후면 아랫쪽에 안으로 들어간 플레이트 위에 장착됐으며 모두 금도금됐다. 그 밑에는 ‘Designed In California’라고 보란 듯이 적혀 있다. 캘리포니아는 SU 및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 본사가 있는 곳이다. 바인딩 포스트 위에는 ‘Assembled In China’라고 돼 있다. 디맨드 시리즈가 만듦새와 사운드에 비해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D11 설계디자인 : 오프셋 트위터, 웨이브가이드, 더블 서라운드 미드우퍼, 패시브 라디에이터
D11은 2웨이 스탠드마운트 스피커다. 1인치 알루미늄 돔 트위터, 6.5인치 폴리프로필렌 콘 미드우퍼, 그리고 캐비닛 윗면에 타원형 패시브 라디에이터가 장착됐다. 따라서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는 없다. 전면 배플은 알루미늄, 인클로저는 MDF. 공칭 임피던스는 8옴, 감도는 90dB, 주파수응답특성은 61Hz~22kHz(-3dB)를 보인다. 음압을 무시한 최대 재생주파수 대역은 48Hz~24kHz에 이른다. 폭은 18.42cm, 높이는 33.02cm, 안길이는 31.75cm로 안길이가 폭보다 훨씬 깊다.
고역을 책임지는 것은 알루미늄 돔 트위터.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에서는 진동판 재질로 알루미늄을 쓴 것에 대해 가볍고 변형제작이 쉬운데다 강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직접 알루미늄을 녹여 진동판을 제작한다는 것. 이 과정을 통해 보다 가볍고 튼튼한데다 높은 성능을 보이는 알루미늄 돔 트위터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트위터에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오프셋(offset) 배치라는 점이다. 미드우퍼 중심축을 기준으로 트위터가 바깥쪽으로 5도 빗겨난 곳에 장착된 것이다. 이는 트위터에서 나온 고역 주파수가 전면 배플 표면에 반사돼 음을 교란, 왜곡시키는 회절(diffraction) 현상을 줄이기 위한 설계다. 유닛과 배플 모서리 사이의 거리가 동일할수록 회절은 더 많이 일어난다. 오프셋 트위터를 안쪽에 둘 것인지, 바깥쪽에 둘 것인지는 제작사마다 혹은 유저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는 바깥쪽을 선택했다. 때문에 후면에 L, R 표시가 된 스피커를 제대로 설치하면 트위터는 모두 바깥쪽을 향하게 된다.
트위터와 미드우퍼 가운데에 장착된 두 웨이브가이드도 주목할 만하다. 트위터 앞에 붙은 것은 ‘20/20 웨이브 얼라인먼트 렌즈’(Wave Alignment Lens), 미드우퍼 앞에 주름진 손잡이 모양으로 부착된 것은 ‘리니어 리스폰스 웨이브가이드’(Linear Response Waveguide)라고 명명됐다. 트위터 렌즈는 보다 디테일하고 소프트한 이미지 형성은 물론 스위트 스폿에서 벗어나도 선명한 음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미드우퍼 웨이브가이드는 중저음의 균등한 확산을 돕는다.
그런데 미드우퍼 웨이브가이드 아래쪽을 자세히 보면 소프트 재질의 작지만 도툼한 서라운드가 둘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가 ‘BDSS’(Balanced Double Surround System)이라고 명명한 이중 서라운드(엣지) 기술이다. 즉, 바스켓과 진동판을 연결해주는 바깥쪽 서라운드 말고도 안쪽에 또 하나의 서라운드를 투입해 진동판의 안정적인 움직임과 공진을 제거케 한 것이다. 진동판에 생긴 쓸데없는 공진을 추가된 서라운드를 통해 소멸시키는 원리다.
끝으로 D11에 투입된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의 창의는 패시브 라디에이터다. 패브릭 그릴이 붙박이라서 직접 확인은 못했지만, 인터넷에 공개된 사진을 보면 상판을 거의 덮어버릴 정도로 큰 타원형 패시브 라디에이터다. 6 x 9인치 크기의 타원형 모습인 것은 데피니티브 테크놀로지가 슬림한 인클로저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 즐겨 채용하는 디자인이기도 하지만, 폭보다 안길이가 더 긴 D11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D11 폭이 18.42cm, 안길이가 31.75cm인데, 라디에이터 짧은 면이 15.24cm(6인치), 긴 면이 22.86cm(9인치)인 것을 보면 상단 거의 전부를 이 패시브 라디에이터가 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청시에 느꼈던 저역의 풍부한 양감과 단단한 질감은 바로 이 넓은 패시브 라디에이터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시청
시청에는 오렌더의 DAC 내장 네트워크 뮤직서버 A100, 록산의 인티앰프 Blak을 동원했다. Blak은 블루투스 스트리밍과 USB DAC, MM 포노스테이지, 헤드폰 출력단을 내장한 솔리드 스테이트 인티앰프. 클래스AB 증폭으로 8옴에서 150W, 4옴에서 230W를 낸다. 시청은 A100의 내장 DAC을 활용했으며, 주로 오렌더 앱을 통해 타이달(Tidal) 음원을 들었다.
총평
D11을 시청하면서 메모에 가장 많이 썼던 단어가 ‘실화냐?’였다. 아무리 편견 없이 리뷰용 스피커를 대한다고 해도 그 가격표가 뇌리에 박혀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D11은 필자의 이 몹쓸 선입견을 여러 번 박살내버렸다. 누가 들어도 깜짝 놀랄 만한 저역의 양감과 밀도감, 표현력, 섬세한 이미징, 드넓은 사운드스테이징에 몇번이고 ‘실화’ 운운했다. 캐비닛과 패브릭 그릴의 마감도 어디 흠잡을 데가 없다. 물론 음이 좀더 예쁘고 고우며 배경이 좀더 어둠껌껌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또한 웨이브가이드의 만듦새가 좀더 고급스러웠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하지만 D11의 가격을 감안하면 욕심일 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집에 들여놓고 싶은 스피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