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아시아를 지배한 전설의 동안 미남

조회수 2022. 4. 1. 00: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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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생각나는 홍콩스타 故 장국영

2003년 4월 1일 거짓말처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8, 90년대 아시아를 대표한 최고의 스타 장국영과 관련한 비하인드를 모아봤다.

본명: 장국영(張國榮, Leslie Cheung)

출생: 1956년 9월 12일

신장: 175cm

출생지: 홍콩

1. 출생 비하인드
출처: http://wemedia.ifeng.com

장국영은 1956년 9월 12일 홍콩의 유명 재단사였던 장활해의 자녀로 태어났다. 총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바로 위인 아홉째 형이 장국영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서 가족들은 그를 죽은 아홉째의 환생으로 여겼다고 한다.(하필 태어난 날이 아홉째 형의 생일이었다.) 그는 부모와의 너무 큰 나이 차, 많은 남매 형제 사이에 치여 외롭게 자라왔다고 고백하며,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 이때부터 생겼다고 전했다. 홍콩에서 로자리힐 스쿨(Rosaryhill School)을 다녔고, 재단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3살 때 영국 리즈대학교 섬유학과로 유학을 떠나 사실상 13살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지냈다.

2. 가수로 연예계 데뷔
출처: 3lian.com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인해 영국을 유학을 중단한 그는 1976년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홍콩 연예계 진출을 꾀하게 된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반면 평소 끼가 많았던 그는 1977년 아시아 가요제에 참여해 돈 맥클린의 명곡 'American Pie'를 불러 가요제 2위를 차지하면서 연예계의 라이징 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3. 배우 데뷔시절 만난 전설의 인생작들
출처: xuehua.us

가수로 성공한 후 영화배우로도 활동하게 되는데,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탄 시기는 1986년으로 우리가 잘 아는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을 통해 최고의 배우이자 스타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암흑가의 길을 걸었던 형과 달리 경찰의 길을 선택한 동생 아걸을 맡아 남자들의 진한 우정이 담긴 멋진 연기를 선보인다.

주윤발, 적룡같은 쟁쟁한 스타들에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 가능성을 보인 그는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영화 <천녀유혼>을 통해 또 한 번 인생작을 경신하게 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가 출연한 이 두 편의 영화는 그저 그런 무술 영화로 매너리즘에 빠진 홍콩 영화에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홍콩 영화계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 시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4. 소신있는 사람
출처: xuehua.us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소신이 분명한 타입으로, 자신의 주변인들 앞에서는 솔직하게 가치관을 드러내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사회 문제에도 소신 발언을 이어가는 바람에 일부 정부 인사나 언론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전성기 시절 가진 한 중화권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 언급하며 중국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홍콩 영화계서 논란이 된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5. 연예계를 잠깐 은퇴한 사연
출처: hk01.com

장국영의 이러한 소신 있는 행동과 발언에 불편함을 느낀 언론은 틈틈이 장국영에 관한 비판적인 기사를 써내며 그를 흠집 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다 한 콘서트장에서 장국영의 팬이 알란 탐의 팬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홍콩 언론들이 기다렸다는 듯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장국영을 비난하며 당장 연예계를 떠나라는 식의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그 피해가 자신의 가족, 친구에게로 번지게 되자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낀 장국영은 1990년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며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그의 마지막 콘서트를 찾은 팬들 모두와 일일이 악수를 하던 장국영의 모습은 잊지 못할 감동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장국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매니저인 진숙분은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고 그가 가수로서만 은퇴했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했으며 영화 스케줄까지 미리 잡아놓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캐나다 이민 생활에 지루함을 느낀 장국영은 연기자로 다시 연예계로 컴백한다.

6. 복귀하자 마자 또 인생작들을 만나다
출처: 다음영화 DB

연기자로 복귀하자마자 장국영은 여러 편의 인생작들을 탄생 시키며 다시금 제2의 전성기를 이어나가게 되는데, 왕가위 감독과 함께한 작품들이 대표적이었다. 1990년 <아비정전> 자유를 갈망하는 바람둥이 '아비'는 그의 대표적인 인생 캐릭터 중 하나가 되었는데 특히 영화에서 보여준 맘보 댄스 장면은 그의 팬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명장면으로 손꼽히고 있다.

1991년 오우삼 감독, 주윤발과 다시 호흡을 맞춘 액션물 <종횡사해>도 흥행에 성공하였고, 1년 후 개봉한 <가유희사>도 무난하게 성공하며 최고의 스타로서 명성을 이어나간다. 1993년 출연한 <패왕별희>는 거장 첸카이거와 함께한 그의 또 다른 인생작으로 제51회 골든 글로브, 제47회 영국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그야말로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최고의 작품이었다. 이 영화서 보여준 경극 연기는 그를 대표하는 또 다른 명연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출처: pttnews.cc

1994년 <첨밀밀>, 진가신 감독과 함께한 <금지옥엽>, 왕가위와 다시 호흡을 맞춘 <동사서독>, 우인태 감독과 작업한 <야반가성>은 90년대를 장국영의 시대로 만들어 주었으며 절정에 이른 그의 연기를 볼 수 있는 대표작들이다. 이후에도 계속 연기 활동을 이어나가다 1997년 왕가위의 영화 <해피 투게더>에서 양조위와 인상적인 동성애 연기를 선보여 또 하나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다시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 줄줄이 히트곡을 내놓는다.

7. 대한민국과의 깊은 인연

신인 시절이었던 1978년과 1979년에는 대한민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MBC가 주최한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다.

1989년에는 오리온제과의 초콜릿 '투유' 광고에 출연해 수많은 소녀 팬들을 열광시켰다. 광고임에도 정극 연기 처럼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지금 봐도 인상적이며 광고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당시,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한다.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장국영은 이 광고에 쓰인 투유 노래까지 싱글 앨범까지 내놓았다.

같은 해에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이선희와 합동 공연을 했고, 당시 인기 최정상을 달리던 쟈니 윤 쇼에도 출연해 국내에 수많은 팬들을 양산했다.

8. 레슬리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게 된 배경

그가 좋아하는 영화와 배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극 중 스칼렛(비비안 리)이 좋아하던 젠틀한 남자 얘슐리를 연기한 레슬리 하워드였다고 한다. 예명인 '레슬리 청'은 이 배우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남자, 여자 다 쓸 수 있는 중성적인 이름이어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9. 감독 데뷔를 할 뻔했어요

예술가로서의 장국영의 오랜 꿈은 감독이었다고 한다. <야반가성>(1995)과 <금지옥엽2>(1996) 때는 조감독을 겸한 바 있었고, 단편영화 <연비연멸>(2000)과 매염방의 <방화절대> 뮤직비디오를 직접 연출하기까지 했다. 1999년 장편 연출 데뷔작 <투심>을 준비했지만,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투자를 받지 못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프로젝트였기에 <투심>의 무산은 장국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때 그의 사망 원인 중 하나로 <투심>의 무산이 언급된 바 있었다.

10. 커밍아웃

공식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힌 적은 없었지만, 인터뷰 중 연예인의 양성애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치 않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양성애적인 성향을 드러냈었다. 그러다 2000년 '타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본인이 "나는 '양성적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라고 말해 비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발표했다. 사망 전 동성 애인 당학덕의 존재를 밝혀 화제가 되었다.

11. 슬픈 러브스토리

세간에 알려진 그의 연애사 중 동료 배우인 모순균(毛舜筠)과의 비화가 있다. 20살 때, 17살인 그녀에게 실제로 프러포즈를 했다가 차였다. 모순균은 장국영과 헤어진 2년 후 한 사업가와 결혼했다가 2년 만에 이혼하고, 88년에 영화감독 제프리 치앙과 결혼했다가 1994년 이혼했다. 이듬해인 1995년 영화감독 토니 오(區丁平)와 마지막으로 결혼해 두 딸을 두게 되었다. 장국영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모순균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해 "만약 그때 당신이 나의 청혼을 받아줬다면 우리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말한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은 1992년 영화 <가유희사>에서 부부로 만나게 된다.

12. 4월 1일 48세로 거짓말같이 세상을 떠나다

2003년 4월 1일, 그는 자신이 머물던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48세.

하필 이날이 만우절이었던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거짓말로 여기고 믿지 않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시간 만에 홍콩에서는 6명의 팬이 그를 따라서 투신하였고 그중 5명이 사망했다. 홍콩 본토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권의 영화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당시 홍콩을 강타한 전염병 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4월 5일에 열린 그의 추도식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그와 함께 <영웅본색>을 찍었던 주윤발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죽음의 원인으로 삼합회의 위장살인설, 동성애인 당학덕과의 불화, 영화 <투심> 무산으로 인한 자살설 등 수많은 억측이 난무하였으나 모두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그의 정확한 자살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당시 그가 남긴 유서에 쓰여진 '마음이 피곤하여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 라는 문구만이 당시 그의 아픈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비록 그는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아직도 매 년 4월 1일이 되면 수많은 팬들이 그를 기릴 정도로 아시아의 전설적인 스타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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