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죽인 왕이 손자에게 준 충격적인 선물

조회수 2021. 1. 5. 13: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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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알려줌] 궁중문화축전 <시간여행 그날, 정조 - 복사꽃, 생각하니 슬프다> 편
여기, '영조'가 맏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7년 만에 얻은 아들, '사도세자(이선)'가 있습니다. 영조는 이선이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정하고 두 살 때 조선의 최연소 세자로 책봉했는데요.

두 살 때엔 천자문 60여 자를 써냈고, 세 살 때엔 사치와 검소를 구분할 정도로 총명하고 영특했던 세자는, 그러나, 8살 때부터 왕세자 교육을 받으면서 영조와 잦은 갈등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학문보다는 그림 그리기나, 무예, 잡서 읽기를 즐겼던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도 아들을 엄히 꾸짖곤 했는데, 천한 무수리 출신('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후에도 평생 불안함을 지니고 살았으며, 이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던 영조의 성격도 이에 한몫을 했죠.
부자간의 갈등은 세자가 '대리청정'(왕이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국무를 제대로 행할 수 없을 때, 세자 혹은 세손이 왕을 대신해 국무를 맡는 일)을 시작하고(15세), 노론과 소론의 정치 갈등이 심해지면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세자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경계증(걸핏하면 잘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과 뇌벽증(번개와 천둥소리에 두려워하는 증상), 그리고 의대증(옷차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증상)을 앓게 됐고, 그 결과, 살인, 자결 시도, 방탕한 생활까지 하는 기행을 보였는데요.

이런 기행이 계속되자, 1762년, 나경언은 세자의 비행을 고발했고, 영조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자의 생모, '선희궁'은 영조에게 직접 '임금의 목숨을 노리는 반역'을 저지르고 있으니, 종사를 위해 세자를 '대처분'하라고 고하게 되는데요.

이를 들으며 분노한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면서 '폐세자반교'를 공표하고, 끝내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고 맙니다. 만약, 세자가 '역모'로 죽을 경우, 세자와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손(훗날 '정조'가 되는 '이산'으로, 당시 11세)'의 임금 자격이 박탈되기 때문이었죠.
영조는 '세손'의 왕위 정통성에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이산을 죽은 '효장세자'(영조의 첫째 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 형)의 양아들로 입적합니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여덟 살에 '세손'으로 책봉 받을 정도로 이산은 영조의 사랑을 받았는데요.

영조는 수시로 세손을 데리고 경연에 참석해, 신하들과 토론을 하게 했고, 유교적 덕치와 군사로서의 국왕의 위상을 강조했죠. 이렇게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세손은 약 1년간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했습니다.

대리청정을 맡게 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았을 때, 정조는 영조에게 <승정원일기> 중 사도세자의 비행과 관련된 부분을 세초(洗草/실록 편찬이 완료된 후 사용된 초고들을 물에 씻어 파기하던 제도)해달라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영조는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며, 은으로 거북이 모양의 도장을 만들어주면서, '효손'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이 나라를 잘 이끌어달라는 친필 편지('유세손서')도 함께 전했는데요. 그렇게, 영조는 세상을 떠났고, 정조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왕위(1776년)에 올랐습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전을 지었는데요.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수은묘'가 보이기 때문이었죠. 이 자경전에서는 혜경궁 홍씨를 위해 많은 진찬연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개혁을 위해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인재 육성과 학문 정치 구현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는데요. 선왕의 정치를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자신만의 정치 리더십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한양에 버금가는 자신만의 '이상 도시'를 건설하게 됐는데요. 이곳이 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1794년 착공, 1796년 준공)입니다. 이 수원 화성 주변엔 국영 농장 '둔전'과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저수지(만석거)' 공사가 이뤄졌고, 자유로운 상행위를 위한 '통공정책'이 시행됐습니다.
또한, 근처에 '화성행궁'을 지어, 옮겨 놓은 아버지의 무덤을('현륭원', 현재는 '융릉') 참배하기 편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침전인 '장락당(長樂堂)'을 행궁 안에 만들게 했죠.

'장락'(長樂)이라는 표현은 왕비나 대비가 사용할 수 있기에, 혜경궁 홍씨가 사용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공식적으로는 혜경궁 홍씨는 폐세자빈이었고, '효장세자'의 후계자로 왕이 됐기 때문), 정조는 어머니를 장락처럼 대우하게 하며 효심을 드러냈습니다.

이렇듯 수원 화성엔 정조의 정치 개혁과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 백성을 위한 애민 정신 등이 집약적으로 녹아있음을 알 수 있죠.

한편, 지난 10월 10일부터 11월 8일까지 열린 제6회 궁중문화축전의 온라인 프로그램으로 소개됐던 <시간여행 그날, 정조 - 복사꽃, 생각하니 슬프다>는, 지금까지 소개한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의 슬픈 이야기를 재구성한 뮤직 드라마인데요. 작품은 창경궁에서 우연히 발견한 복사꽃을 따라 시간여행을 하게 된 한 소녀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죠.
부제에 있는 '복사꽃'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음을 맞이한 때쯤 피던 꽃으로, 영조, 정조, 혜경궁 홍씨까지 모두 그날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로 등장하는데요. 회갑인 어머니에게, 아들 '정조'가 효의 의미로 복사꽃을 주기도 하죠.

여기에 '생각하니 슬프다'는, 영조가 세자의 죽음 이후에 직접 하사한 이름인 '사도'(생각할 사(思), 슬플 도(悼))를 풀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오프라인, 온라인 행사를 진행하며 많은 이들의 지친 심신과 일상을 위로해준 축제. 궁궐과 예술, 첨단기술이 어우러진 공연과 다양한 체험을 통해 전통문화의 오늘을 만나볼 수 있는 축제. 궁중문화축전은 2021년에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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