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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조커'에게 열광하는가?

조회수 2019. 10. 5.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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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알려줌] <조커> (Joker, 2019)
글 : 박세준 에디터
출처: 영화 <배트맨>의 '조커'. 이하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동서대 손현석 교수는 자신의 논문 <조커의 신화>(2008년)에서 이렇게 적었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악당의 비중을 높인다는 것은 곧 흥행 실패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물론, 전통적인 영화의 범주에서 악인의 역할 증대는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선인인 주인공의 승리와 그에 따른 사랑의 결실은 슈퍼히어로 영화뿐 아니라 전체적인 각본 세계의 불문율이었고, 분명한 악으로 분류되는 악당의 소멸은 짧고 간결한, 그리고 반복적인 재현이 당연시되곤 했다.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년)은 그런 점에서 혁명적이다. 영화 속 악당은 '조커'(잭 니콜슨)라는 이름을 가지고 선인 '배트맨'(마이클 키튼)의 정확한 대척점에 위치한다.

항상 주인공의 정체성을 보조하는 조연으로서 등장했던 과거 악당들과는 확실히 궤를 달리한다. 당시 관객이 받은 충격은 강력하면서도 신선했다. 더불어 잭 니콜슨이라는 희대의 명배우가 조커를 연기한 것은 영화사적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무려 30년이 지나 80년대 <배트맨>이 여전히 훌륭하다 하는 것은 일종의 과거에 대한 '미화' 혹은 '허세'일 것이다. 당시 영화는 혁신적이었고, 큰 틀에서 악당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중요한 변곡점이기도 했지만, 지금 보면 다소 허술한 CG와 투박한 연출,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대사 등 단점도 많이 존재한다.

영화는 영화로서 남는다. 명작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는 그 작품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배트맨>은 주인공 '배트맨' 뿐 아니라 악당 '조커'의 존재론적 의의를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이 두 컨텐츠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의 텀을 두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 이후 왜 관객들은 유독 '조커'에 열광할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년) 이후 '타노스'(조슈 브롤린)의 진정성은 자신의 몇몇 팬을 낳기도 했다. 비록 학살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현실화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우주의 재건과 지속'이라는 선의에 기초했기에 무작정 그를 막는 '어벤져스'의 명분이 오히려 궁색해 보였다.
출처: 영화 <조커>의 '조커'. 이하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철학을 장착한 악당의 등장은 선과 악에 관한 본질적 궁금증을 가지게 한다. 인간은 원래 선한가? 우리는 정말 선을 원하는가? 이것은 어쩌면 사회 시스템의 안정적인 지속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의 고른 행복을 위해 교육을 통한 도덕을 학습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태초의 인간은 선과 악의 경계보다 강과 약의 기준에서 생존에 대한 갈망을 느꼈을 테다. 나름의 안전한 사회 망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무언가를 통해 마음속 깊이 존재하는 강한 악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커>(2019년) 속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약한 선에서 강한 악으로 발돋움한다. 선을 강요받고 자신을 약자라 여기는 많은 관객은 영화 속 '아서 플렉'에게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고, 그가 '조커'로 변태했을 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악인에 대한 동경은 오랜 시간 부정돼 왔지만, 팀 버튼과 잭 니콜슨이 <배트맨> 속 '조커'를 매력적으로 만든 후 선과 악의 절대성은 점차 흐려졌고, 악당의 철학과 모호성은 그 캐릭터의 비중 증가와 함께 짙어져 갔다.
출처: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 이하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시대가 시대인지라, 캐릭터의 선악 구분은 차치하자. 그 전제조건에서 '조커'의 매력은 고전적 히어로 만큼이나 상승한다. 이러한 반대급부가 시대의 가장 훌륭한 배우들이 이 악당역을 하고 싶게끔 하는 동기부여가 된다.

"잭 니콜슨의 조커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년) 제작 당시 끊임없이 따라다니던 의문이었고, 당시 29세의 나이로 희대의 캐릭터를 연기한 히스 레저가 짊어져야 할 짐이기도 했다.

웃긴 건 호아킨 피닉스에게 같은 무게의 중압감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린 <조커>를 보며 "히스 레저의 조커를 능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스크린에 던지게 된다. 분명한 건, 순위보다 정체성이다.

잭 니콜슨의 조커는 보다 '광기'에 가깝고, 히스 레저의 그것은 '순수'하며, 호아킨 피닉스는 '현실적'이다. 캐릭터의 정체성이 감독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의 해석이 더욱 절대적이다.
출처: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조커'. 이하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하지만,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년) 속 '조커'(자레드 레토)가 기대 이하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감독의 연출 기조가 그 캐릭터의 미래에 끼치는 영향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팀 버튼의 연출 아래 천의 얼굴을 가진 잭 니콜슨은 '조커'의 광기를 마음껏 표출할 수 있었다. 당시로선 분장과 효과의 사용 역시 독특했고, 덕분에 화학 약품 웅덩이에서 빠지기 전 '잭 네이피어'와 '조커'의 구분이 확실해졌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끊임없이 찬사를 받는 건, 그 본질에 가까울 정도로 순수한 악의 모습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제 '백마 탄 왕자'와 같은 순수한 선에 지쳐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극한의 도덕심과 사명감으로 MCU 사단을 성공으로 이끈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가 시대를 역행해 굉장한 매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사람들은 변형된 영웅 즉, '아이언 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과 같은 타락한 인간의 비상을 기대한다. 악당은 선에서 악으로의 추락이 대부분이다. 영화에서 '성악설'은 배제돼왔다. 오컬트류의 엑소시즘 영화에 등장하는 악귀가 아닌 이상, 타고난 악인은 없는 듯했다.

'조커' 역시 어린 시절 학대를 통한 미치광이라는 설정이지만, 그 역시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다크 나이트> 속 조커는 그저 '악인' 그 자체다. 절망을 극복하고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는 '브루스 웨인'(크리스챤 베일)과 그의 타락을 확신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신념을 시험하는 '조커'는 정확히 선과 악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놀란 감독의 오리지널에 대한 집착, 그 사실성에 기초한 고집스러운 연출이 히스 레저의 신들린 연기와 맞물리면서 역사상 본 적 없는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배트맨>의 '조커'는 죽었다. 영화 속 '조커'의 죽음은 소멸하고, 새로운 감독과 배우에 의해 환생한다.
히스 레저는 죽었다. 흔히 알려진 자살은 사실이 아니다. 처방받은 약물에 의한 사망이 사인이다. 캐릭터는 부활했지만, 배우가 사망하면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더욱 신화가 되었다. 본래 예술가의 사망은 그 유작의 가치를 공고히하기에, 이 경우에도 그 조건이 정확히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히스 레저의 '조커'뿐 아니라 히스 레저라는 배우 자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모든 관객의 불행이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의 절친으로 알려진 호아킨 피닉스가 <조커>의 '조커' 역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은 그래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불러왔다.

대배우 호아킨 피닉스를 향한 반응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걱정과 '그가 해석하고 연기하는 조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호응으로 나뉘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모든 면에서 전작들에 뒤지지 않는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영화의 수위를 낮추라는 배급사 요구에 정면으로 맞섰고, 결국 승리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더니 호불호가 갈리는 듯했던 평단과 관객의 평가도 찬사로 거듭나는 듯하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깔아준 멍석 위에서 혼신의 춤을 추는 호아킨 피닉스를 보는 듯한 이 영화는 앞선 조커들과 달리 현실, 그 자체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2005년) 속 배트맨의 탄생을 답습하면서도, 절대다수의 약자를 대변하고, 편집증적인 법과 테두리의 규칙 속에 끊임없이 소비되는 그들의 인생을 위로하는 아나키스트적 재미마저 불러온다.

'아서 플렉'은 미국 영화, 드라마에서 흔히 조롱받는 설정의 클리셰다. 엄마와 같이 사는 중년의 남자, 광대로 분하고 10대에게 폭행 당하는 나약한 인간, 눈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간직한 정신질환자 등 '플렉'의 인물상은 사회 구조의 최하단에 위치한 인간의 표본을 다소 진부하게 끌어온 부분도 있다. 이러한 단점을 호아킨 피닉스는 연기력으로 만회하고, 동질감을 넘어 동정심에 이르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가장 관건인 '조커가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있어, 물론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을 죽이는 인간에게 합당한 설명이 가능하겠냐마는, 토드 필립스는 그마저도 어릴 적 학대라는 고전적 방식을 차용한다. 그래서 그의 역할이 멍석에 불과하다. 이렇게 '조커'의 탄생 사유는 부족했지만 변신은 확실했다. 아니, 매력적이다.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의 트레이드 마크인 찢어진 입을 억지로 그래픽화하기보다, 직접 분장하는 과정을 노출한다. 외형의 변화로 관객에게 일말의 공포와 이질감을 줬던 과거 '조커'와는 달리 내면의 파괴와 타락을 오랜 시간 설명함으로써 현실에 기인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표출해 낸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미래의 '조커'를 재해석할지는 모른다. 어쩌면 <조커>의 성공에 'DC 유니버스'가 새로운 계획을 세울 가능성도 있다. 그에 따른 비교와 분석은 전문가와 팬들 사이 지속적으로 양산되겠지만, 확실한 건 '조커'가 가진 무한 매력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배우에 따라 천양지간 그 형태를 바꿔 표현될 것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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