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신작은 여성들 이야기였다

조회수 2020. 9. 21. 14: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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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자의 영화영수증] <도망친 여자> (The Woman Who Ran, 2019)
글 : 양미르 에디터
출처: 영화 <도망친 여자> ⓒ (주)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 영화 <도망친 여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카를로 샤트리안 집행위원장은 "홍상수 감독의 예술가로서의 원숙에 관해 얘기할 때, 에릭 로메르나 우디 앨런과의 비교를 멈추고, 안톤 체호프에 관해 얘기할 때가 됐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홍상수의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인간 조건'에 관한 영화다. 매력적이며 신비로운 보석 같은 작품인 <도망친 여자>는 다시 한번 무한 종류의 세계들이 가능함을 암시한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결국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 감독에게 생애 첫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감독상) 트로피를 안기게 해줬다.
홍상수 감독의 24번째 장편영화인 <도망친 여자>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나름의 변곡점을 제시한 작품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년)부터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년), <클레어의 카메라>(2016년), <그 후>(2017년), <풀잎들>(2017년), <강변호텔>(2018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엔 어김없이 그의 '페르소나'인 김민희가 함께했다.

같은 배우를 주연으로, 이렇게 많은 작품을 만들다 보면, 흔히 생각하는 '동어반복의 늪'에 빠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홍상수 감독은 결은 비슷할지 몰라도, 그 알갱이는 항상 다른 이야기를 선보이고자 했다.

2017년,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언론 시사회 이후 있었던 기자회견(그것이 현재까지 진행된 마지막 홍상수 감독의 국내 공식 기자회견이다)에서, 홍상수 감독은 "영화를 본 후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이 말은 계속해서 이후 작품을 곱씹을 때, 괜스레 언급하고 싶은 말이 됐다.

이 작품부터였던가? 그의 포커스는 '찌질한 남자'를 따라가는 것 대신, '자신의 믿음'을 이어가려는 여성을 따라가고 있었다. <도망친 여자>는 남편이 출장 간 사이 홀로 세 명의 친구를 만나는 '감희'(김민희)의 여정을 주시하고, 작품은 세 번의 만남을 3개의 챕터로 나눠 보여준다.
'감희'의 여정은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기승전결을 만들어낸다. 친구들과 만나면, 5년 동안 이번 일 빼고는 남편과 떨어져 있는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기의 단계.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순'(서영화), 필라테스 선생을 하면서 큰돈을 저축해 새 동네로 이사를 온 '수영'(송선미), 작은 독립영화관에서 일하는 '우진'(김새벽)과 무언가를 먹거나, 먹기까지의 과정이 승의 단계.

어떤 남자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 혹은 이야기가 전의 단계. 그리고 홍상수 감독이 직접 작업한 음악 음악과 함께 다른 곳을 이동하거나, 이동하지 않고 스크린을 쳐다보는 것이 결의 단계.

영화를 보다 보면 <도망친 여자>와 무색하게, 도망치지 않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주를 잇는다. '전의 단계'에서 두 남자는 등을 지고 서 있다. '영순'네 집에는 길고양이에게 '도둑고양이'라는 말과 함께 밥을 주지 말라는 남자(신석호)가, '수영'네 집에는 젊은 시인(하성국)이 찾아와 애걸복걸한다.

반면, 관객은 '영순'과 '수영'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 있다. '등지다'라는 표현을 단순히 "등 뒤에 두다"를 넘어서, "관계를 끊고 멀리하거나, 떠난다"라는 뜻으로 바라본다면, 이 장면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여성들의 심리를 잘 담아낸 컷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영화는 이 장면을 관찰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과하게 내세우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마지막 파트는 '우진'의 남편인 '정선생'(권해효)과 '감희'의 대화로 연결된다. '우진'은 우연히 만난(지금까지 '감희'는 나름의 계획을 통해 친구들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감희'를 보면서, 과거의 잘못을 사과할 기회를 얻는다.

이어 '우진'은 '정선생'이 TV 출연 등을 통해 유명해진 이후, 위선적으로 변하고 있어서 정나미가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감희'에게 털어놓는다.

소회를 마친 후, 행사를 앞두고 담배를 피우는 '정선생'에게 '감희'는 '우진'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의 수직적인 남녀 배치 대신, 수평적인 남녀 배치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정선생'에게 불편함을 느껴 잠시 도망쳤던 '감희'는 이내 극장으로 돌아온다.
극장에서는 끊임없이 파도치는 바다의 풍경을 담은 영화가 상영 중이다. (상영관에 '감희' 말고 유일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외국인 남성 관객은 <기생충>(2019년)의 번역으로도 유명한 달시 파켓)

이 화면은 세 여성을 만난 '감희'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 건가에 대한 일종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듯 보인다. 5년 동안 남편과 함께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러면서 자신에게 억압된 무언가. 그리고 그 무언가로부터 나오는 공허로부터의 탈출.

마치 예능·교양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유 퀴즈 온 더 블럭>처럼, 집과 동네에 사람 사는 이야기처럼 편하게 흘러간 영화는, 마지막 파도 장면 롱테이크 엔딩을 통해 사람의 관계와 연결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제공한다. 그제야 카를로 샤트리안 집행위원장의 말이 이해됐다.

2020/09/19 메가박스 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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