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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배우의 비극적 삶, 현재진행형처럼 보였다

[양기자의 영화영수증] <주디> (Jud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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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바람
글 : 양미르 에디터

* 영화 <주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디 갈랜드는 20세기 초중반,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이 만들어낸 배우였으며, 그런 '스타 시스템'으로 인해 불행을 맞이한 배우였다. 그래서 <주디>를 관람하기 위해선 '스타 시스템'의 생성 과정을 어느 정도 알고 봐야 한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어지는 이슈이기 때문.

영화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스타 시스템'은 그렇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배우들이 '연극'을 위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영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 명성을 망치는 일이라 여겼다. 심지어 당시는 '무성 영화'였기 때문에, 배우의 주요 스킬이라 할 수 있는 '목소리'를 들려줄 수도 없었다.

영화 제작자들도 배우들의 이름을 크래딧에 넣게 된다면, 더 많은 예산을 써야 하는 일이므로, 굳이 '스타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무렵 주요 영화 촬영 장비의 특허를 소유하던 토머스 에디슨은 1908년 미국 뉴욕을 포함한 동부 지역 10여 개 영화사를 하나로 합쳐, '영화특허회사'(MPPC)를 만들었다.

MPPC는 몇몇 '스타'를 홍보하긴 했어도, 정작 돈을 많이 줘야 하는 상황엔 난색을 보였다. 한편, 배우들의 이름을 알고 싶던 대중의 욕구는 늘어났다. 관객이 좋아하는 배우에겐 '바이오그래프 걸'과 같은 별명이 지어지기까지 했다. 이 배우는 훗날 세계 최초의 영화배우로 알려진 '플로렌스 로렌스'.

출처영화 <주디> 표지 및 이하 사진 ⓒ (주)퍼스트런

MPPC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 제작사들은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했고, 처음으로 '반독점'을 외치는 바람이 일어났다(MPCC도 그렇게 사라진다). 할리우드에서 태어난 영화사들은 '플로렌스 로렌스'의 성공 사례를 본 후, 적극적으로 스타 생성에 돌입했다.

루돌프 발렌티노, 릴리언 기시처럼, 1920년대에 맹활약했던 스타들은 대체로 '고정된 역할'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화면이 잘 받는 선남선녀'였다. 1920년대 후반, 유성영화가 등장하며 목소리의 중요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당연히 뮤지컬 영화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고, 영화사들은 '노래까지 잘 부르는 예쁜 배우'를 물색한다.

이중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로고로 유명한 영화사로 당시 할리우드의 '스타 시스템'을 이끌던, 'MGM(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은 가족 중심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많은 '아역 스타'를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MGM 공동 설립자, 루이스 B. 메이어는 정규 교육, 의료 등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연기, 춤, 스킬들을 아역 배우들에게 가르쳤다.

덕분에 다른 스튜디오보다 아역 배우 면에서 MGM은 앞서갈 수 있었는데, 주디 갈랜드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1935년, 다른 아역 배우보다는 늦은 13살의 나이로 MGM과 계약을 맺은 것. 정작 MGM은 주디 갈랜드를 어떻게 써야 할 지 몰랐다.

아역을 주기에도 이상했고, 성인 역할을 하기에도 나이가 걸림돌이 됐던 것. 그사이 주디 갈랜드의 어머니는 참혹한 선택을 한다. 영화 <주디>에는 언급이 안 되다시피 했지만, 주디 갈랜드의 캐스팅을 위해 어머니가 직접 프로듀서나 감독을 대상으로 주디 갈랜드의 성접대를 주선했다는 것.

게다가 촬영을 위해서 주디 갈랜드는 수면제를 비롯해 우울증 치료제이자 향정신성 의약품인 '암페타민'도 강제 복용해야 했다. 체중 조절을 위해 1일 1식은 기본이며, 역시 식욕을 억제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담배를 피워야 했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주디 갈랜드에게 유명세를 준 영화가 익히 알려진 <오즈의 마법사>(1939년)다.

<오즈의 마법사>는 디즈니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뮤지컬 요소가 가미된 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년)의 성공을 본 MGM이 바로 영화화 판권을 산 작품. MGM의 설립자 '루이스 B. 메이어'(리처드 코더리)는 여러 경쟁자를 제치고 '주디 갈랜드'(다르시 쇼)를 주인공 '도로시' 역할로 캐스팅한다.

<오즈의 마법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 주제가상, 그리고 아역상(주디 갈랜드/총 10차례 수여 되고 1960년을 끝으로 폐지됐다)을 받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주디 갈랜드의 대표작으로 남게 된다.

물론, 당시 주디 갈랜드의 명성은 영화 <주디>에도 나온 아역 출신 '미키 루니'(거스 배리) 주연의 <쓰루브레드 돈 크라이>(1937년)를 통해서 쌓아지고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이후에도 주디 갈랜드는 미키 루니와 함께 <앤디 하디> 시리즈,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1940년)와 같은 많은 뮤지컬 작품에 출연했고, 절친한 사이가 됐다.

1990년대, 미키 루니는 "주디와 나는 너무나 가까워서,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줄 알았다"라며, "우리 사이는 연애 이상이었다. 서로의 대한 사랑의 깊이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정말 특별했다. 우리가 말하는 주디는 아직 죽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2014년 세상을 떠났다)

우연히 <주디>의 포털 평점 댓글 중엔 이런 반응을 봤다. "어린 시절을 그리 살았으면 어른이 되면 달라져야 한다. 너무 나약해서 이해 안 된다." 과연 그랬을까? 1940년대, 20대가 된 주디 갈랜드는 계속된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도 MGM은 주디 갈랜드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대중들이 바라본 주디 갈랜드는 약물 중독자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는 <이스터 퍼레이드>(1948년)와 같은 작품의 흥행으로 이뤄졌기 때문. 결국, 수어 차례의 자살 시도 등으로 골치가 아팠던 MGM은 1950년 그가 30대가 되기 전, 계약을 끊어버린다.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는 <보헤미안 랩소디>(2018년) 속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가 병을 이겨내며 공연을 하는 것과 달리, 계속해서 '열등감'에 빠져 있던 주디 갈랜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주디 갈랜드와 함께 작업했던 찰스 월터스 감독은 1972년 인터뷰를 통해 "'주디'는 큰 성공과 돈을 만들어냈지만, '미운 오리 새끼'였다"라며, "이는 '주디'에게 정서적으로 매우 해로웠을 것이며, 영원히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의로, 혹은 타의로 느꼈던 '나는 못생겼다'라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약물 중독과 합쳐져, 종종 촬영과 공연을 펑크낸 것이 다반사였다. 그때마다 주변 스태프들의 독려 덕분에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다고.

영화 <주디>는 '주디 갈랜드'(르네 젤위거)가 <오즈의 마법사> 이후 가장 성공했던 순간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950년 이후 잠시 동안 가수로의 생활을 하던 중 워너 브라더스의 <스타 탄생>(1954년)으로 제12회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뮤지컬·코미디 부문)을 받는다거나, 1962년 '주디 앳 카네기 홀'(뉴욕 카네기 홀 공연 실황을 담았다)로 제4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최우수 여자 보컬상을 받았다는 이력이다.

그저 주디 갈랜드가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 화려한 스타가 된 순간과 대중은 몰랐을 사연들, 그리고 1969년 런던에서의 마지막 나날들을 다뤘을 뿐.

최악의 상황으로 끝나갈 것 같은 영화는 그래도 마지막 장면을 통해 나름의 위안을 주려 한다. 'Over The Rainbow'를 부르던 '주디 갈랜드'가 노래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 때, 자신들에게 위안을 줬던 게이 커플이 앞장서서 이어지는 가사를 불렀던 것.

(실제로 주디 갈랜드는 '게이 아이콘'으로 미국에선 고려되고 있으며, LGBTQ의 상징인 '무지개기'는 1978년 길버트 베이커가 처음 제작할 당시 주디 갈랜드가 불렀던 노래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다소 극적인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위적 요소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주디 갈랜드'를 위한 제작진의 헌사와도 같았던 셈.

'주디 갈랜드'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69년 태어난 르네 젤위거가 이 작품에 출연한 것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르네 젤위거 역시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어려워 보인다"라는 외모 지적을 받았었던 배우. 하지만 주디 갈랜드와 달리 르네 젤위거가 활동하던 시대는 조금씩 변화의 과정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 결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 <시카고>(2002년), <콜드 마운틴>(2003년)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주연을 차지할 수 있는 배우임을 스스로 증명하며, <콜드 마운틴>에서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 다시 잊혀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받았던 것이 사실.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2016년)를 제외하고는 메이저 배급사와는 큰 인연이 없었던 상황에서 만난 <주디>와 '주디 갈랜드'는 르네 젤위거의 큰 전환점이 됐다. 퍼포먼스를 위해서 르네 젤위거는 본격적인 촬영 1년 전부터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후두염까지 걸려가는 노력 끝에 르네 젤위거는 '주디 갈랜드'와 혼연일체 된 모습을 보여줬는데, 르네 젤위거는 "많은 사람이 '주디 갈랜드'와 같은 수준의 노래를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신체적인 부담을 주는 지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기를 선보인 르네 젤위거는 응당 아카데미 첫 여우주연상 수상 자격이 충분했다.

한편, '주디 갈랜드'의 비참했던 인생을 보면, 반세기가 지난 현재 연예계가 떠올려진다. 스타가 되고 싶다는 것을 악용해 성상납을 강요받는 배우나 가수 지망생들. 약물 남용과 관련한 소속사의 관리 소홀. "악플도 돈 많이 받는 연예인이라면 감수하고 달게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주장으로, 수준 이하의 저열한 글을 남기는 악플러들.

그리고 그런 악플을 그대로 제목에 인용하며 논란을 부추기는 인터넷 언론. "30대가 넘으면 여성의 전성기는 끝났고, 한물갔다"라는 차별적인 생각을 지닌 이들. 르네 젤위거가 부르던 'Over The Rainbow'를 들으며 극장을 빠져나갈 무렵, 힘이 솟지 않고 빠졌던 이유는 여기 있었다.

2020/01/27 CGV 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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