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이 공포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조회수 2019. 9. 1.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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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자의 영화영수증] <변신> (Metamorphosis, 2019)
글 : 양미르 에디터
* 영화 <변신>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감독과의 대화다. 그 영화의 완성도가 좋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한 영화의 '책임자'는 (요즈음엔 돈의 흐름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감독이기 때문이다.

<변신>의 김홍선 감독은 "최근 우리나라 사회의 단면을 바라보면, 타인에 의한, 이웃과 친척, 가족들 간의 강력범죄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뉴스가 하루가 멀다고 나온다"라며, "악마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일까?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존재는 '사람'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도 정의할 수도, 결론 지을 수도 없는 이 '알 수 없음'의 끝은 어디일까?"라며 작품을 썼다.

김홍선 감독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소재로 한 영화들을 연출해왔다. 장기 밀매를 내세운 <공모자들>(2012년), 인천 세관의 검은돈을 훔친다는 내용의 케이퍼 무비 <기술자들>(2014년), 미제사건을 풀기 위한 동네 터줏대감과 전직 형사의 합동 수사를 다룬 <반드시 잡는다>(2017년)까지, 김홍선 감독은 지금까지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한 범죄 사건을 다뤄냈었다.
하지만 <변신>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느낄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작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오컬트 장르에서 볼 수 있는 클리셰 부분들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악마'라는 콘셉트와 "가족들 간의 강력범죄"라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소재를 적절히 배합했다면, <변신>은 참 재미난 영화가 됐을 수 있었다. 영화의 초반은 구마 의식에 실패한 사제 '중수'(배성우)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형 '강구'(성동일)네 가족이 "삼촌 때문에" 이사를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가격이 싼 집이면 한 번 정도 의심을 해봐야겠지만, '극의 전개를 위해서' 당연히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은 '강구'네 옆집은 기괴한 풍경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동물 사체를 토대로 한 공포적인 이미지들은 영화의 전개와 직접적인 연관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맥거핀'의 요소로 보인다)
곧이어 아빠, 엄마(장영남), 삼 남매(김혜준, 조이현, 김강훈)로 이뤄진 평범한 가족이 '악령'에게 전이되면서 벌어지는 공포 장면과 자괴감에 빠진 '중수'의 모습을 꾸준히 교차시키는데, 감독의 의도 때문인지 뚝뚝 끊어지거나, 불친절한 상황으로 극을 전개한다.

예를 들어, '악령'이 '중수'의 형, '강구'에게 어떻게 향했는지, 그 과정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아무튼, '악령'의 힘을 받은 아빠가 작은딸을 '성폭행'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역시 '악령'의 힘을 얻은 엄마가 식탁에서 '무시무시한 행동'을 해 막내아들을 울리는 장면, 작은딸이 큰딸이 샤워하는 중 다가오는 '점프 스케어' 장면 등을 통해 공포의 강도를 쌓아 올린다.

이어지는 '망치 장면'은 김홍선 감독이 스티븐 킹 원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샤이닝>(1980년)에서 본 공포 이미지를 차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이닝>은 소설을 쓰기 위해 '잭 토랜스'(잭 니콜슨)가 겨울 동안 호텔에서 부인과 아들과 함께 머물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

'잭 토랜스'가 창작의 고통과 원혼에 사로잡혀 폭주해 부인과 아들에게 도끼를 들고 가는 장면은, <변신>에서 아빠가 딸들에게 망치를 휘두르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문에 망치 자국이 찍히는 것은 마치 잭 니콜슨의 명대사인 "'쟈니'가 왔어요" 장면의 오마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전이'되는 악마의 모습을 통해 '변신한 가족'이 서로의 신뢰를 잃어간다는 설정은, 꽤 참신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감독의 의도는 적중했다고 본다. 하지만 <변신>의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아직 시나리오상 '위기'에 빠진 가족을 다시 봉합하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신>은 <샤이닝>의 '탈출극'에서 끝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물론 오는 11월 <샤이닝>의 속편인 <닥터 슬립>이 등장하기 때문에, 연결된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악령'의 퇴치를 위해 삼촌 '중수'를 투입한다.

'중수'는 피를 섞은 형제이지만, '외부자'의 시선으로 이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중수'를 향한 가족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오히려 비난적인 말까지 퍼부어댄다. 그걸 다 감수하면서, '중수'는 공포영화의 클리셰인 "서로 떨어져 있으면 화를 입는다"라는 말까지 남기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 '중수'가 오히려 능력 있는 '발타자르'(백윤식) 신부를 영접한다는 이유로 공항에 가면서(악령의 계략에 당한 것이지만), 가족들이 다시 분열되는 계기를 만든다. 그 와중에 막냇동생이 칼을 드는 장면은 <샤이닝>에서 'REDRUM(MURDER, 살인)'을 쓰는 아들의 모습이 떠올려지게 한다.

애초에 가족들이 '악령'을 저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핏줄로 연결된 '중수'의 희생을 '답정너'처럼 설정했었다. 구마 의식에 실패하며 죄책감에 시달린 '중수'가 그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거라는 결론에 도달해내고 시나리오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발타자르' 신부를 굳이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결국, 영화는 교통사고를 집어 넣어버리며, '발타자르' 신부를 빨리 죽여버린다. 과연, 숭고한 희생을 포장한 마지막 엔딩의 롱테이크를 본 관객은, 감독의 의도인 "'알 수 없음'의 끝은 어디일까?"를 생각하고 극장 밖을 나갈 수 있었을까?

2019/08/21 메가박스 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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