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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해석! 이 영화가 수작일 수밖에 없는 이유

조회수 2021. 4. 15.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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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미디어 투고] <자산어보> (The Book of Fish, 2019)
글 : Rabbitgumi
출처: 영화 <자산어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삶은 배움의 연속이다.

유치원을 시작으로 정규 교육과정에 들어가서는 초·중·고등학교를 지나며 폭넓은 지식을 습득해 나간다.

그렇게 알게 되는 지식은 개인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준다.

다양한 종류의 책과 이론들을 배워나가면서 사람마다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배워 나간다는 것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선택지를 하나씩 줄여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조금씩 앞으로 나가다 보면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를 어느 순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에 또다시 향후의 방향성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놓인다.

그래서 무언가를 평생 배워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지를 계속 늘려가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배움의 한가운데에서 누구나 인생의 스승으로 하나쯤은 만난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이나 동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스승과 깊은 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그것을 관찰하면서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그렇게 스승을 삼을 무언가를 만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 배움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시각을 알 수 있게 되는 기회가 된다.

만약 그 스승 또한 사람이라면 스승도 제자를 만나 다른 시각을 보게 된다.

제자가 가진 새로운 관점의 질문들과 패기, 열정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그것에도 무언가 다른 것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서로 한 방향으로 배움을 전달한다기보다, 상호 작용하며 각자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자산어보>는 흑산도 유배지에서 생활하는 '정약전'(설경구)과 흑산도에서 물고기로 생계를 이어가는 '창대'(변요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약전은 그의 동생인 '정약종'(최원영), '정약용'(류승룡)과 함께 그 당시 실학과 같이 들어왔던 천주교의 교인이 되었는데 이후 '정조'(정진영)의 뒤를 이어 '순조'(최현진)가 왕위에 올랐을 때 시작된 신유박해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를 하게 된다.

반면 창대는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틈틈이 혼자 여러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탐구하는 청년이다.

그는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점점 난도 높은 책을 읽음으로써 향후 삶의 변화를 끌어내길 원하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 이 두 인물은 서로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 정약전에게 창대는 그저 섬에서 일하는 젊은이로, 창대에게 정약전은 조정에 반하고 성리학을 욕보인 죄인으로만 보인다.
영화 속 정약전과 창대의 만남은 실용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만남같이 보이기도 한다.

유배 전까지 다양한 정치 활동을 해왔던 정약전은 이미 성리학의 이상적인 길을 가려고 노력한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여러 가지 정치적 경험을 한 이후, 그가 흑산도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학문적인 탐구보다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나 활동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으로 유배 갔던 정약용이 올바른 정치에 대한 글을 무수히 써나갈 때, 좀 더 실용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대한 글을 썼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다 생물들에 대해 정리한 '자산어보(玆山魚譜)'다.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반면 창대는 글을 읽고 배우면서 성리학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길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대는 책과는 다르게 하찮게 보이는 백성을 위한 서적을 만드는 것처럼 다른 접근을 하는 정약전이 못마땅하다.

성리학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창대에게 정약전은 그저 잘못된 길을 가는 정치인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다.

정약전은 다양한 바다 생물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그것에 대한 책을 써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 작업을 하는 데에는 창대가 가진 바다 생물에 대한 지식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창대는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책에 대해 배우고자 한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는 데에는 그것을 쉽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에겐 박학다식하고 경험이 많은 정약전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 지식에 대한 배움은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성리학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생각과는 다르게 조금씩 가까워지게 된다.

이들이 가진 배움의 열망은 그들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의 색안경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보이는 지식과 인간적인 면들을 온전히 바라보게 만든다.
창대는 정약전에게 여러 책에 대해 배워 나가며 자신만의 지식을 쌓아간다.

그러면서 그는 성리학에서 내세우는 것을 바탕으로 좋은 정치를 실제로 행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영화 속에서 창대는 양반인 아버지(김의성)의 혼외 자식이다.

하위 계층인 그에겐 관직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과거 시험조차 볼 수가 없어 계속 공부를 해나가서 자신의 배움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시험의 기회가 주어져 관직에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창대가 보기에 그저 앉아서 쓸데없어 보이는 책을 쓰고 있는 정약전이 답답하기만 하다.

반대로 창대를 바라보는 정약전의 마음엔 성리학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그런 정약전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
스승은 제자에게 다양한 지식을 알려주지만, 그것을 활용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결국 제자의 몫이다.

그것에 대해 스승이 어떤 의견과 방향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제자는 그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정약전의 지식과 혜안에 감탄하며 책을 배우던 창대는 스승으로 삼은 정약전의 총명함에 완전히 빠져든다.

하지만 한참을 그에게 책을 배운 이후 그가 선택한 삶은 스승 정약전이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둘은 서로 아주 먼 관계였다가 조금씩 가까워져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가, 이내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영화 속에는 크게 위기상황이 있지는 않지만, 이 스승과 제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그 상황 자체가 두 사람에게 닥쳐오는 가장 큰 위기이자 또 다른 배움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보는 관객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유배 시절 쓴 자산어보의 서문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을 가미해 구성한 영화다.

서문에 등장하는 창대는 물고기에 대하여 박학다식하다고 적혀있고 자산어보를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둘이 실제로 스승과 제자 관계였는지 그리고 각자 어떤 길을 가게 되었는지는 상상의 영역이다.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흑산도(黑山島)의 모습을 아주 정갈하고 깨끗하게 담는다.

마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영화에는 흑과 백으로 구성되어 빛바랜 앨범을 꺼내어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흑백으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비추는 흑산도 주변의 모습이나 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을 비추는 카메라는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친다.
자산어보가 '흑산어보'가 아닌 이유는 창대라는 인물의 의견이 영향을 주었다고 실제 자산어보의 서문에 적혀있다.

흑(黑)은 검다는 의미도 있지만, 어둡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검다는 뜻을 가지면서 부정적 의미가 없는 또 다른 글자인 자(玆)를 가져와 자산어보라는 이름으로 책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책의 제목까지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정약전이라는 인물은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일 줄 아는 학자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 걸쳐 보이는 정약전의 모습은 일반인들의 삶과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들 또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이런 생각을 하는 정약전이 만인이 평등하고 모두가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약전이 최하층 계급인 창대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최대한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의 됨됨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정약전의 열린 생각은 '가거댁'(이정은)과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가거댁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수발을 드는 가거댁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양반이지만 집의 청소를 하려고 한다거나 최대한 빚을 지지 않으려고 돈을 건네는 등의 행위가 그것이다.

또한, 관련하여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가거댁과 창대가 이야기하는 장면인데, 그때 가거댁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씨만 중하고 밭은 귀한 줄 모른다".

실제 농사에서 좋은 씨앗 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 가거댁이 한 말이다.

여기에는 그 당시 아이를 낳는 여자는 홀대받고 씨를 뿌리는 남자들만 대우를 받는 그 시대상을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거댁의 말을 들은 정약전은 그에 대해 특별히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 당시 하찮게 취급받던 여인의 말에도 반발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영화적 설정일지라도 그런 정약전의 열린 모습은 보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준다.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창대, 즉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로 보인다.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가르쳐주고, 제자가 품고 있는 이상향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가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있다.

이번이 첫 사극 연기인 설경구는 열린 생각을 가진 정약용처럼 보이고, 변요한은 그가 가진 퉁명스럽지만 총명한 이미지로 청년 창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영화의 이야기에 허구가 다수 섞여 있다 할지라도 이 영화가 담은 내용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감정과 지식을 담고 있다.
영화는 정약전과 가까웠던 정약용이 서로 주고받았던 시를 배우의 목소리를 빌어 들려주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동안 관객들에게 그 시의 한자를 그대로 화면에 보여준다.

그 한자로 된 시의 구절들을 실제로 모든 관객이 이해하며 읽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화면으로 제시되는 한시는 실제로 감정을 담아 그 한시를 읽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 화면과 함께 하나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런 한시와 어우러진 이 영화는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담은 수묵화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 위 글은 'Rabbitgumi'님이 알지 미디어에 투고한 글입니다. 위 글의 저작권은 'Rabbitgumi'님께 있고, 무단복제 및 전재 –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알지 미디어 오피니언 섹션(https://alzi.me/contributions)에 알찬 비평·리뷰를 투고해주시면, 네이버 포스트, 카카오 1boon 등 당사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홍보해드립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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