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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왜 나타샤일까?

조회수 2020. 8. 31.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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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만주행을 따라서
나는 마침 2층 창가에서 운동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양복 차림의 '모던 보이'가 교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의 현관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오는 그의 옷차림은 일본식 용어로 '료마에'라고 하는 두줄의 단추가 가지런히 반짝이는 감색 양복이었다.

모발은 모두 뒤로 넘어가도록 빗어 올린 '올백'형에다 유난히 광택이 나는 가죽 구두는 유행의 점단을 망라한 세련된 멋쟁이의 모습이었다.

*김희모 [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 이동순 정리, 원간 현대시 1990년 5월호.

영생고보 3학년 담임을 맡은 그는 곧 3학년 수업에도 들어갔는데 첫날부터 출석부를 보지 않고 학생들의 이름을 호명했다고 합니다.


백석은 당시 영생고보 영어선생이었지만 러시아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진술담이 있습니다.


백석은 언제부터 러시아어를 습득한 것일까? 백석이 러시아어를 습득한 과정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습니다.


혹자는 백석이 러시아어를 부전공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학적부에 그런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백석이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배운 언어는 영어와 독일어였습니다. 독일어는 2~3학년에 걸쳐 2년간 수학했고 모두 '우'였습니다. 반면 러시아어를 수강했다는 학적부 기록은 없습니다.

아오야마학원 중등부에 다니며 백석을 '형'으로 호칭하며 따른 고정훈은 '당시 백석은 수재로 이름이 나있었고 영어, 프랑스어는 물론 3학년 때부터는 러시아어를 파고들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의 회고대로 백석이 아오야마학원대학 3학년 때부터 러시아어를 파고들었다는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개인적인 학습이었을 것입니다.


러시아어에 습득에 대한 백석의 집념은 함흥 시절 영생 고보 제자 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백석이 함흥 시내에서 문방구를 겸한 서점을 하고 있는 백계 러시아 사람한테 러시아어를 배우러 다녔다거나, 만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백석이 기차 안의 러시아인들과 유창하게 말을 주고받았거나, 함흥 중심가 군영 통에 있는 러시아 사람들이 운영하는 '대화 양복점'에 회화를 익히기 위해 드나들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는 러시아어 습득을 위한 백석의 지속적인 열정과 함께 러시아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특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3)의 '나타샤'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위 시에 나타나는 북국 지향과 작품에서 호명한 이름이 나타샤라는 점은 러시아 문학에 대한 백석의 정신적 지향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영문학 전공자인 백석은 왜 러시아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1920~30년대의 상황과 맞물립니다.


당시 러시아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지식인에게 식민지라는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이자 자유의 공간으로 표상되었습니다. 더구나 정서적 지리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친밀감을 지닌 관북인들은 북방 의식 혹은 북방적 상상력으로 명명되는 문화사적 흐름을 형성하는데 기여해왔습니다. 그들의 정서적 편향은 조선인 작가들의 만주행을 추동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백석은 러시아어를 본격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만주를 선택했습니다. 만주 이후 백석의 행적은 소군정 체제의 북한 잔류로 이어집니다.


백석의 북한 잔류는 고향에 머물겠다는 자유 의지의 발현이자 러시아 문학에 대한 낭만적 동경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직후 만주에서 북한으로 귀환한 백석의 행적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지은이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백석 루트>를 떠올립니다. 


<백석을 찾아서>는 백석의 만주행. 백석이 떠났던 만주 현장과 관련 자료를 샅샅이 탐문하고 섭렵합니다. 백석의 만주행 같이 떠나가 보실까요?

<이 콘텐츠는 삼인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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