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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018. 8. 14. 17: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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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또하나의 희망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찾은 대한독립 발자취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오는 15일 광복일과 맞물려 여름 휴가도 절정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혹시, 아직 여름 휴가를 떠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혹시, 얼마남지않은 여름을 그 누구보다 뜨겁게 불태우고 싶다면......

혹시, 어디로 휴가를 떠나야 할 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우리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한 번 따라 가보는 것은 어떨까?

광복절 또 하나의 희망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찾은 대한독립 발자취


일제 강점기,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처절한 사투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뜨겁게 전개됐다.


 구국의 사명을 품은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감시와 억압을 피해 국경을 넘어 거사를 도모했고, 수백, 수천 명의 독립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일제 군경과 혈투를 벌였다. 


미국·중국·러시아 등지의 재외동포들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한 푼 두 푼 ‘애국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광복 73주년을 맞아 해외 항일무장투쟁의 핵심 거점이었던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남겨진 독립투쟁의 발자취와 역사를 소개한다.


광야에 우뚝 선 손도장,
 안중근 단지동맹비

출처: 국방일보 조용학기자
크라스키노

총면적 16만5900㎢에 달하는 연해주의 주도(州都)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서 남서쪽으로 약 230㎞를 달려 도착한 크라스키노.


숲이 우거진 막막한 광야의 대로변에 약 4m 높이의 검은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비석 상단에는 넷째 손가락 끝마디가 잘린 손도장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국방일보 조용학 기자
광야에 우뚝 선 안중근 장군 '단지동맹비'.

안중근 장군을 비롯한 결사동지 12명이 이 일대에 모여 조국의 독립을 결의한 것을 기리는 ‘단지동맹(斷指同盟) 기념비’다. 비석 주변에 놓인 투박한 화강암 조형석 15개가 눈길을 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체포된 안 장군이 조목조목 제시한 적장의 15개 죄목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황후를 시해한 죄, 황제를 폐위시킨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군대를 해산시킨 죄…. 15개 조형석을 하나씩 어루만지다 보면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안 장군의 기개가 전해지는 듯하다.


일제의 회유를 거부한 안 장군은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남기고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이 된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기념비 앞에 놓인 추모의 꽃다발들이 바람결에 쓸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출처: 국방일보 조용학기자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를 찾은 공군사관생도들. 안중근 장군을 비롯한 결사동지 12명이 이 일대에 모여 각자 왼손 무명지를 끊고 하얼빈 거사를 준비했다

비가 서 있는 크라스키노는 두만강이 멀지 않은 북한·중국·러시아의 접경이다. 비석 인근의 장고봉 전망대에 올랐다. 기상이 좋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3국의 경계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08년 안 장군은 이 일대에 있던 추카노프카에서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지역 최초의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척박했을 이 땅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경을 넘나들며 몸을 숨기고 자금을 조달한 것이다.

출처: 국방일보 조용학 기자
안중근 장군의 손도장

안 장군은 이듬해 동료 11명과 함께 각자 왼손 무명지를 끊어 뜨거운 피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을 적고 하얼빈 거사를 맹세한다. 개인의 분노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을 유린한 적장을 처단하는 ‘독립전쟁’을 치른 것이다.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통해 추카노프카 인근 강변에 단지동맹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고, 관리부실, 민간인 출입 통제 등의 이유로 두 번 자리를 옮겨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이곳은 타국의 영토로 기념비를 세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허술한 관리로 비문이 훼손된 채 방치됐다는 사실은 후손 모두 부끄럽게 여길 일이다.


어렵게 설립된 뜻깊은 기념비에 후손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방문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난로’, 
최재형의 집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동북 방향으로 약 120㎞ 떨어진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현재도 도시 인구 10%에 달하는 2만여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는 우수리스크에는 해외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가 있는 저택이 있다. 이 일대에 거주한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 최재형 선생의 거처다.


‘최재형의 집’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린 고택은 현재 공사 때문에 내부 견학이 어려운 상태지만, 곧 기념관으로 꾸며질 예정이라니 기대가 된다.

출처: 국방일보 조용학 기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북쪽으로 120㎞ 거리의 우수리스크에 있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거처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 선생은 가난을 피해 9살 때 러시아로 왔고, 완벽한 러시아어와 뛰어난 사업 수완을 통해 큰 재산을 모았다.


이후 최 선생은 학교를 짓고 신문을 발행하는 등 한인들을 아낌없이 지원하며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선도했다. 최 선생의 자택 인근에는 과거 러시아 한인 최고자치기관이자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기관이었던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가 있다.


총회는 1919년 3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최초의 해외 임시정부로 평가되는 ‘대한국민의회’로 확대된다. 최 선생은 이때 외교부장으로 선출됐고, 이어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 장군과도 각별한 인연을 유지하며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긴밀히 후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동포와 조국을 위해 바쳤던 최 선생은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때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들은 최 선생을 ‘난로’라는 뜻의 ‘최 페치카’라 불렀다고 한다. 먼 타지에서 생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벌여야 했던 고려인들에게, 최 선생은 한겨울 맹추위로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온기이자 등불이었다.


과거에 최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 선생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최 선생의 집 앞에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고 인근에 사는 한인들이 전했다.

독립운동 조직화에 기여… 
이상설 유허비

이어서 찾은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에도 한국과 만주, 러시아, 유럽과 미주 지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다.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나섰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遺墟碑)’다.

출처: 국방일보 조용학 기자
독립운동가이자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던 이 선생의 유해가 화장돼 뿌려진 수이푼 강 주변에 세워져 있다.

“광복 전에는 죽어서도 조국에 돌아갈 수 없으니, 시신을 화장해 이곳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긴 이 선생은 끝내 조국 독립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17년 서거했고, 그 재를 뿌린 곳으로 추정되는 쓸쓸한 강변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비석은 비포장도로 변 풀숲이 우거진 외딴곳에 있어 현지 지리를 잘 아는 동행자가 없다면 찾기가 어렵다.


헤이그 특사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이 선생은 직접적인 항일투쟁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1908년 8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이승만과 연해주 대표로 참석했고, 1910년 8월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했다.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외교적 노력과 함께 해외 독립운동단체의 조직화에 매진했으나, 안타깝게도 조국의 독립을 맞이하지 못하고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이 선생은 근대 수학교육의 선구자인 동시에 위대한 민족교육자였다. 오늘날의 수학교과서와 같은 『산술신서』를 썼고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북간도에 설립하기도 했다. 안중근 장군이 최익현 선생과 함께 이 선생을 특별히 존경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선생의 학자이자 교육계몽운동가로서의 업적은 학술적으로는 연구된 바 있으나, 아직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대의 독립운동가는 주위 독립운동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신의 행적을 적극적으로 은폐했다. 이 선생의 마지막 유언 역시 이런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재로 돌아간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후손들의 의무다.

 

고려인 문화센터 & 신한촌 기념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는 이주의 아픔과 척박한 삶을 이겨낸 고려인들의 애환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관이자 전시관인 ‘고려인문화센터’가 있다.

출처: 국방일보 조용학 기자
우수리스크의 고려인문화센터 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1914년 한인들의 노령(露領) 이주 50주년 기념문서.

고려인은 1860년대 초 무렵부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을 이른다.


1869년 흉년으로 인해 농민들이 연해주로 대거 이주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우국지사가 탄압과 억압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다. 1937년에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20만 명에 달하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에 내몰렸다.


이들은 우리 민요인 아리랑을 부르며 슬픔을 달랬고, 황무지를 일궜다. 그리고 정착에 성공해 끈질기게 생을 이어갔다. 센터에 있는 ‘아리랑 전시관’을 둘러보면 삶의 터전을 뺏겼던 고려인들의 구슬픈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요 근거지였던 한인 마을을 기념하는 ‘신한촌 기념비’가 있다. 신한촌에는 일제강점기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와 학교, 신문발행기관 등이 모두 모여 있었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신한촌을 급습해 한인 30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4월 참변’이다.


이후 신한촌은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해 폐허가 됐고, 1999년 8월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기념비는 남·북과 고려인을 상징하는 3.5m 높이의 대리석 기둥 3개와 조선 팔도를 상징하는 8개의 작은 돌로 이뤄져 있다. 최근 연해주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기념비에도 많은 사람이 몰리고 있다.


사진=국방일보 조용학 기자, 글=국방일보 김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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