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베의 작품은 왜 논란의 중심에 섰을까?

조회수 2021. 3. 25. 19: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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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아버지 구스타브 쿠르베

1995년 프랑스의 오르셰 미술관


한 그림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입니다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그려놓은 그림

작품 옆에는 ‘세상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붙었죠


미술관에서 내려달라는 요청부터

단순한 외설일 뿐이라고 

욕을 뱉고 가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작품은 논란의 중심이었죠


현대에도 이처럼 크나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무려

19세기에 그려졌는데요


19세기 회화의 반항아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입니다


구스타브 쿠르베


19세기 회화의 혁명

현실을 그린 예술가


19세기 프랑스 회화의 

변화를 대표하는 쿠르베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풍경화부터 인물화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일상적으로

또 때로는 도발적으로 그려내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나갔는데요


쿠르베만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현대까지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며

회화의 중요한 한 획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귀족적이고 낭만적인 화풍이 

유행하던 19세기 당시의 그림들과 비교하면

쿠르베의 작품은 볼품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그의 화풍은 작품을 만든

당시에도 수많은 논란을 만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쿠르베의 작품들은 

왜 논란의 중심에 섰을까요?

 


쿠르베의 작품은 독특합니다


화려하고 낭만적인 화풍이 

유행하던 당시 그림들과 달리

어둑하고 또 너무도 평범했죠


쿠르베는 당시 화가들이 

신성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그릴 때

조금은 다른 것을 자신의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당시 미술계로부터

크나큰 비난을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쿠르베는 

자신이 바라본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초기의 

그의 회화를 살펴보면 좀 다릅니다


이 그림은 1842년 그려진 

검을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인데요


이 작품 속 쿠르베는 

적나라하고 사실적이기보단

낭만적이고 우아한 느낌을 풍깁니다


1819년 프랑스 쿠르베는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덕분에 왕립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죠



왕립학교를 다니던 그는
근교의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기도 했는데요

이 시기부터 쿠르베는
그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됩니다

한동안은 유명화가의
화실에서 일하기도 했죠

하지만 1840년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선 쿠르베는
파리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다닙니다.

당대 유명 화가의 작품들을 모사하며
그는 독학으로 회화 실력을 늘려나가죠



동시에 쿠르베는

파리 예술가들의 발표의 장이자,

대화의 장이었던 살롱에

매년 자신의 그림을 출품하는데요


1842년 그려진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로 입선하며

드디어 화가로써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목가적인 풍경부터,

뒤에 책을 꽂고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모습까지.


초기 그의 작품에는 선배 작가들처럼

낭만주의 사조가 잔뜩 묻어있습니다


“삶의 여정을 지나면서

나의 마음이 변할 때마다

여러 번 자화상을 그렸다.

다시 말해 자화상을 통해

나는 내 삶의 모습을 써왔다”


그로부터 4년 후

쿠르베는 인생이 변화하는 

전환점을 마주합니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프랑스에는 새로운 군주가 즉위했지만,

여전히 소수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선거권을 확대해달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거절당하고

1847년 프랑스의 큰 경제 불황까지 닥치자

결국 1848년 2월 민중은 폭발합니다.


2월 혁명 이후 프랑스 전역은

 혁명의 기운으로 물드는데요.


파리의 지식인들은 도시 곳곳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사상과 예술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죠



이 때 쿠르베가 만난 시인 보들레르

무정부주의자 프루동 등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쿠르베는 자유와 평등을 중시했는데요


그는 인간 개개인의 존엄을 

인정하는 자유주의와

인간의 평등에 주된 관심을 가진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1849년에 그려진 이 그림, 

<돌 깨는 초상>이죠


사람들은 이 작품이 살롱에 등장하자

모두 ‘추하다’고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작품의 크기와 주인공 때문이었죠


무려 가로 2.6m, 세로 1.6m.


이 초대형 회화의 주인공은

 ‘돌 깨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존의 대형 회화는 귀족이나 

왕족 밖에 주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림에 들어가는 물감의 양,

작가를 고용하는 시간 때문에 

상당한 돈이 들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그 큰 그림을 걸어둘 

만한 집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계급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허락되기 어려운 대형 그림의 중심을

쿠르베는 저 두 사람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돌 깨는 사람들’은

평범한 민중 중에서도 가난한,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계층이었습니다


찢어진 셔츠와, 닳은 신발, 

더러운 손을 하고 있는 두 사람


실제 사람크기 정도로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본

파리 살롱의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고 돌을 

담고 있는 어린 아이를

가까이에서 본 적도 없는

 살롱의 사람들에게

쿠르베의 그림은 ‘추함’이자,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죠



쿠르베는 굴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립니다


1950년 쿠르베는 자신의 

고향에서 있던 장례식을 그리는데요.


가로 6.6m, 세로 3.15m.


쿠르베는 전보다 더 큰 그림을 

가지고 살롱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 또한 

‘불경스럽다’라는 평을 받죠


이전까지 그림에서 죽음은 보통

아름답거나 극적인 순간으로 

그려지고, 신성시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주인공은 

역사적이거나 위대한 인물이었죠


그러나 쿠르베의 그림에서는

죽은 자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직업과 지위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고

모두 제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죠


장례식에는 관심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등장인물 중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죠


쿠르베는 자신의 큰 그림 속에

가장 일상적인 순간들을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그렸습니다


남들이 보고 지나쳤던,

무시해왔던 순간들을 작품 속에 녹여냈죠


쿠르베는 신격화된 것들을 지우고, 

현실을 그자체로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쿠르베의 태도에

인상주의 화가이자 쿠르베와

 가까웠던 에드가 드가는

“차라리 사진을 찍지 그랬냐”는

 식으로 혹평하기도 했는데요


쿠르베는 끊임없이 적나라한 

현실을 화폭 속에 담았습니다




1855년 제 2회 파리 만국박람회

전세계의 예술가들이 파리로 몰려들었습니다


쿠르베는 자신이 그렸던 그림 14점을 모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했죠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만국 박람회 측에서는 작품들이

 너무 크다며 거절했습니다


당시 만국박람회는 국가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예술, 건축, 기계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물을 내보이는 자리였는데요


민중의 흙 묻은 손

일상에 지친 민중들을 꾸며내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쿠르베의 회화 작품을

국가에선 내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발한 쿠르베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만국박람회 

앞에 개인 전시관을 빌립니다.

그 안에 40여점의 작품을 걸어놓고

이름을 붙이죠.



Realism.


쿠르베는 자신의 그림이 당신들이 

숨기는 진실이라 선언합니다


그리고 만국 박람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내보이죠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예술에서 부정당한

돈 없고 힘 없는 민중들


쿠르베는 이들을 그림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추하다’고 말하는 

기득권층과 실제 존재하는 민중 사이를

쿠르베는 예술이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쿠르베의 <화가의 작업실>도

만국박람회에 거절당한 작품들 중 하나인데요


그림 속 쿠르베는 화면

정중앙에 위치해있습니다.


쿠르베를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굉장히 다른데요


오른쪽에는 쿠르베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시인 보들레르와, 프루동,

그리고 쿠르베의 후원자

 브뤼야스 등이 여기에 있죠


그들은 쿠르베를 향해 있으면서

동시에 그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을 외면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가 그리는 진실을 직시하고 있죠


왼쪽에는 상인, 노동자, 

실업자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반대로 쿠르베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그들은 일상에 지쳐있기도, 

주저앉아있기도 합니다


캔버스 바로 뒤쪽 누드의 남자는

십자가에 걸려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는 죽음과 허망함이 느껴지죠


그림 가운데에는 옷을 벗은 

여인이 위치해있는데요


이는 당시 주류미술계가 주요소재로 

삼던 누드화에 대한 풍자로

벗은 여인과 반대로 앉아 풍경을 

그리는 자신을 그림으로써

자신이 시대 흐름에 맞서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쿠르베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왼쪽에 있는 이들은 

죽음을 먹고 사는 이들이고

오른쪽에 있는 이들은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쿠르베는 그들의 

중간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민중의 모습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것이죠


그는 그것이 진정한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민중 사이에 모자와 

기타를 떨어트려 두었는데요


매일 노동을 하는 민중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모자와 기타는

현실이 아닌 이상을 꿈꾸는 

낭만주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쿠르베는 이 그림을 통해

이전까지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낭만주의의 몰락을 암시했습니다


그의 사실주의적 시각은

여성을 그릴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초기에 그린 해먹과

2월 혁명 뒤에 그린 미역 감는

 여인들을 비교해보면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죠


해먹은 1844년

쿠르베에게 초기 낭만주의 

화풍이 남아있을 무렵 그려진 그림입니다


때문에 고대 여신의 모습을 본뜬 것 같이

뽀얗고 굴곡 없이 매끈한 모습을 띄고 있죠


그에 반해 1853년 그려진

 미역감는 여인들은 목욕하고 나오는 

여인들의 나체를 있는 그대로 묘사했는데요


억센 근육의 형태와 삐져나온 살들은

이제까지 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평범한 여인의 모습이었죠


나폴레옹 3세가

이 그림을 보자마자 손에 든 

채찍으로 그림을 내리쳤다고 하는 

일화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의 그림은 항상 논란의 중심이었죠



논란의 중심이 된 <세상의 기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껏 여성의 나체는 
성스럽게만 그려져야 했는데요

신이 아닌 여성의 나체를 
그리면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죠

기존에 여신의 모습을 나체로 그릴 때도
여성의 성기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없었는데요

쿠르베는 <세상의 기원> 이라는 
비장한 제목을 달고
여성의 성기만을 적나라하게 그립니다

바람 속의 여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성기를 그린 이 그림
이는 만들어졌던 19세기 뿐만 아니라
현대까지도 이어져 수많은 
논란을 만들어내고 있죠

쿠르베는 수많은 비판에도 
자신의 철학을 꿋꿋이 화폭에 담았습니다

“예술이란 ‘볼 수 있게 만드는’ 지식이다”

민중을 향한 쿠르베의 태도는
그림을 그리는 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1871년, 프랑스는 또 다시 
혁명의 바람이 부는데요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의 무능함 때문이었죠

프랑스 민중들은 항쟁을 일으키고
최초로 자치 정부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파리 코뮌’이라 불렀죠


쿠르베는 그림 그리는 일에만 멈추지 않고

이 파리 코뮌에 참여했는데요


그가 독재에 느끼는 분노는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꾸르베의 <화가의 작업실>에서 

가장 앞에 앉은 사냥꾼

이는 나폴레옹 3세를 모델로 그렸는데요


시민들이 힘들게 만들어 놓은 공화정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를 쿠르베는 시민계급을 

위협하는 사냥꾼으로 본 것이죠





사실주의 화가로써 쿠르베가

명성을 얻은 후 나폴레옹 3세가 훈장을

주겠다고 하자 쿠르베는 사양했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면

더없이 고맙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죠


파리 코뮌은 정부가 밤을 

기다렸다가 비무장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는 데요


쿠르베는 이때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1세 동상을 파괴한 주동자로 잡혀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후 엄청난 벌금을 낼 

것을 약속하며 풀려나죠



이 당시 그려진 그림이 <송어>입니다.

바늘에 꿰어져 뭍에 올라와 
헐떡이는 송어의 절박한 모습에서
쿠르베는 자신을 본 것일지도 모르죠.

자신의 상황을 물가에 끌려나온
 송어에 비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쫓기는 마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재산을 몰수 당하고 많은 
벌금을 낼 수 없던 쿠르베는
자신의 고향인 오르낭의 국경을 지나,
스위스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로도 자신만의 화풍을 
실험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던 중 1877년 5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게 되죠

“나는 내 원칙을 버리지 않고 
내 예술을 위해 평생을 살고 싶다.
I hope to live all my life for my art, 
without abandoning my principles one iota,
Gustave Courbet”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냈던 화가
적나라하게 현실을 그려나갔던 화가

쿠르베는 58년이란 짧은 
생애동안 수많은 작품을 남기며
자신만의 철학을 고수해나갔습니다

모두가 외면했던 것을
모두가 지우려했던 것을
화폭에 담아내며

19세기 회화의 조류를 뒤바꾼
 예술가로 평가받죠

현재까지도 그의 혁명적인 작품들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습니다

계속된 비난과 탄압 속에서도
꿋꿋히 자신이 본 진짜 현실을 
그리려 했던 화가, 쿠르베

커다란 캔버스에 가려진 현실을 
담은 쿠르베의 그림에서
여러분은 어떤 현실이 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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