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리안은 왜 대각선을 긋지 않았을까?

조회수 2020. 6. 19. 10:1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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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이 대각선을 긋지 않은 이유
피에트 몬드리안.

하얀 색 배경과 그 안을 수놓은 원색의 사각형.
그리고 서로를 구분하는 수직과 수평을 이루는 직선.
몬드리안은 면, 선으로만 이뤄진 독특한 화풍을 선보이며 현대에는 추상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하는데요.
몬드리안 작품 특유의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는 디자인, 패션, 인테리어 등 많은 현대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몬드리안 작품엔 대각선이 없습니다.
오직 수평과 수직으로만 이뤄져 있죠.

그렇다면 왜 몬드리안의 작품 속에는 대각선이 없을까요?
몬드리안의 작품들은 각져 있습니다.
면과 선 모두 사각형 틀 안에 맞춰 조화를 이루고 있죠.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곡선이나 대각선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로지 우뚝 섰거나 누워있는 형태를 하고 있죠.
심지어 몬드리안의 작품 중에선 마름모 모양의 작품이 있는데요.
이 작품마저도 마름모 형태 그대로 벽에 거는 방식으로 작품 자체는 수직과 수평을 이루고 있죠.
한치의 오차도 없는 수직과 수평 구성에 종종 사람들은 그가 일종의 강박을 갖고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하는데요.
사실 몬드리안이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몬드리안의 초기 화풍을 살펴보면 자연을 담은 풍경화를 볼 수 있죠.
몬드리안은 1872년 네덜란드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드로잉 교사였던 아버지와 화가였던 숙부에게 예술을 배웠는데요.
아버지와 숙부 모두 자연을 담아내는 그림을 즐겼죠.
어린 몬드리안도 이를 닮아 자신의 집 주위 자연을 그리곤 했습니다.
20살이 되어선 아버지를 이어 교사 자격증을 따고
같은 해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이미 이 시기부터 유능한 예술교사로 소문이 났죠.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선 반 고흐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풍이 유행하고 있었는데요.
몬드리안도 이런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때문에 그의 초기작에서도 인상주의 회화 느낌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죠.
아카데미에서 몬드리안은 새로운 동시대 회화 작품들을 접하는데요.

점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점묘법 강렬한 색감을 담아내는 야수파 화풍 등 새로운 표현방식은 몬드리안에게 영감을 줬죠.
몬드리안의 그림은 이러한 유럽의 여러 화풍들을 흡수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았습니다.
각각의 겉모습이 다르더라도 보편적인 본질은 존재하며 이 보편적인 특성을 끌어냄으로써 신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믿었습니다.
몬드리안은 당시 신지학협회에 가입할 정도로 깊게 매료됐죠.
그러면서 화가의 소명은 사물의 보편적인 본질을 드러내 인류를 정화하는 것이라 생각하죠.
이 당시 신자학자인 쉔마커의 색채론에도 눈을 뜨게 되는데요.
쉔마커는 세상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색채를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노랑 파랑 빨강 이 세가지를 세상을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색이라 보았죠.

이것 외에는 모두 파생된 색에 불과하다 말했습니다.
몬드리안은 점차 이 3가지 색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도 점차 노랑 파랑 빨강만이 남게 되죠.
1911년 몬드리안은 암스테르담 미술관에서 당시 유럽사회 유행하던 입체파 작품들을 접하는데요.
이는 몬드리안에게 크나큰 충격을 가져다 줍니다.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을 재해석해 표현하는 입체파 화풍.
‘본다’는 개념을 완전히 뒤바꾼다는 점에서 몬드리안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특히나 기존의 화풍들과 달리 입체파가 ‘선’과 ‘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점에도 매료되었죠.

몬드리안은 신지학과 예술을 계속 탐구하며 그림을 이루는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인 ‘선’과 ‘면’이 중요하단 걸 깨달았죠.
그런데 입체파는 모든 회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이 선과 면을 분석하고 작가의 방식대로 재해석했습니다.
몬드리안은 조형의 본질을 다루는 입체파의 방식만이 자신이 추구하는 세상의 보편적인 본질을 화면에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했죠.
몬드리안은 이 점에 매료돼 입체파가 꽃피고 있는 파리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입체파가 가진 기하학적 양식에 빠져들죠.
이 시기 몬드리안이 그린 나무 연작은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시선의 교차로 대상이 재해석되는 모습 캔버스 위 구성 요소가 점차 단순화되는 모습.
입체파는 몬드리안에게 새로운 예술 가능성을 선보였죠.
하지만 몬드리안은 얼마 안가 입체파의 한계에 실망합니다.
입체파는 선과 면에 대한 분석과 재해석을 하기 적합했지만 작가 개개인의 주관이 쉽게 반영됐죠.
결국 작가가 바라보는 관점이 작품 속에 반영되며 세상의 가장 ‘보편적인 본질’을 담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때문에 몬드리안은 입체파도 결국 최종의 본질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몬드리안은 이 때부터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하기 시작하죠.
그는 사물의 본질에 다다르기 위해선 자연적인 개념과 외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이 가진 외형적인 입체감, 공간감과 색감 등을 벗어나야 한다 보았죠.
자연의 외면으로부터 벗어나는 도전은 자연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연의 본질에 닿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변덕스러운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그 핵심과 본질을 파악하면서 하나의 불변하는 질서를 찾아내려 했죠.
이 시기 몬드리안은 화가이자 예술 이론가이기도 한 되스부르크를 만나는데요.
뜻이 맞는 예술가들과 함께 잡지를 출간하게 됩니다.

“De Stijl(데 스틸)” 영어로는 “더 스타일” 즉 양식을 뜻하는데요.
“데 스틸”의 예술가들은 잡지 속에 미학적 본질을 탐구하며 이를 회화 뿐만이 아니라 건축 디자인 등 인간사회 전반에 기여해야한다는 생각을 담았죠.
몬드리안은 이 잡지를 통해 선과 면, 삼색이라는 근원적인 조형요소를 통해 세상의 본질을 담을 수 있다는 “신조형주의”를 내놓습니다.
몬드리안은 이후로 더욱더 순수하고 본질적인 조형 요소를 꿈꿨습니다.
변덕스럽고 무질서한 자연의 외형으로부터 벗어나 완벽하게 질서 정연한 본질을 화폭에 담고자 했죠.

이러한 철학은 실제로 당시 몬드리안의 삶에서도 드러나는데요.
누군가 꽃을 선물해주면 초록 잎사귀를 하얀 물감으로 칠하기도 하고 자신의 작업실마저 직선구조로 이뤄진 가구들로 채웠죠.
사람들은 강박증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몬드리안은 변화하는 자연의 변덕에서 벗어나 불변하는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술 또한 자연의 외면을 묘사하는 데 그쳐선 안된다고 생각했죠.

그는 수직이나 수평 같이 완전하게 순수한 조형 요소들을 통해서만 사물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다 믿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다른 예술가들과 갈등을 빗기도 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칸딘스키’였습니다.
칸딘스키는 세상 만물의 형태를 본따 곡선과 원, 사각형 등 다양한 조형 요소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몬드리안은 사물의 윤곽으로부터 조형을 본따는 칸딘스키의 화풍이 한계가 있다 생각했죠.
질서정연한 내적인 본질 추구가 아닌 자연의 외적인 모습을 따라그리는 데 불과하다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칸딘스키의 방식으로는 외면만을 그릴 뿐 사물의 본질에 닿을 수 없다 비판헀죠.
뿐만 아니라 1924년에는 데 스틸의 창시자 뒤스부르그와 논쟁을 벌입니다.

뒤스부르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대각선을 사용함으로써 더 혁신적이고 활력있는 자연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다 믿었습니다.

사선이 수평이나 수직에 비해 더욱 생명력이 있다는 이론이었죠.
하지만 몬드리안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자연의 활력을 담기 위해 사선을 더하는 뒤스부르그의 방식은 자연의 외형을 묘사하려는 노력일뿐 내면적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완벽한 본질을 담아내기에는 ‘수평 수직’으로 충분하며 사선은 불필요하다 말했죠.
더욱 이상적이고 순수한 형태를 추구해 본질을 궤뚫어야 하는 절대 추상이 새로운 요소들이 더해짐으로써 해쳐질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헀습니다.

결국 이는 ‘사선 논쟁’으로 번졌고 둘은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서로 결별하게 됩니다.
이후로 몬드리안은 더욱 더 자신의 철학이 확고해졌고 수직과 수평으로 이뤄진 작품들을 탄생시켰죠.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계 2차대전이 벌어지자 68세의 몬드리안은 뉴욕으로 떠나오게 되는데요.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추구하며 곡선적인 건물이 많은 유럽과 달리 선과 면으로 이뤄진 뉴욕의 빌딩은 몬드리안에게 안정감을 줬죠.

변덕스러운 자연을 찾기 어려운 뉴욕의 도시는 오히려 몬드리안에겐 이상향에 가까웠습니다.
특히나 뉴욕의 재즈 음악은 몬드리안을 매료시킵니다.
질서정연한 도시 사이 재즈가 주는 경쾌함과 즉흥성은 몬드리안에게 새로운 영감이 됐죠.

극도로 엄격했던 몬드리안의 작품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1940년대 그려진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몬드리안의 기존 화풍과는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리듬이 빠르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부기우기 음악처럼 몬드리안의 이전 그림에선 볼 수 없었던 작고 빠르게 반복되는 색점들이 수놓여 있죠.
반듯한 도시 사이 우뚝 솟은 빌딩, 그리고 그 안의 경쾌하고 역동적인 음악이 이 안에 담겨있죠.
몬드리안은 생애동안 절대적인 질서와 보편성을 추구했습니다.
보편적인 진리의 추구만이 세상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만드는 길이라 생각했죠.
여전히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며 자신의 철학을 관철시켜 온 몬드리안의 노력은 현대의 디자인, 패션 등 다양한 곳에 스며들었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 사이 기억되는 몬드리안 만의 명작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는데요.
여러분은 몬드리안의 작품 안에서 어떤 본질이 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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