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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코 작품을 보고 왜 눈물을 흘릴까?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왜 눈물을 흘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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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느낀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하는것이다."

'마크 로스코'

거대한 캔버스
간결하고도 깊은 색과 의미를 알 수 없는 형태

표현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는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며, 현대 추상회화의 혁명으로 평가받기도 하는데요.

미국의 내셔널 갤러리에선 한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미술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려본 적 있는가?’

이 질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답한 사람 중
70%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요

얼핏보면 단조롭게만 느껴지는
그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릴까요?


로스코의 작품은 독특합니다.
작품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발견하긴 어렵죠.
보통 초현실주의 또는 추상화 같이 비현실을 그린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이 어떤 소재인지, 선인지 면인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죠.

하지만 로스코의 작품 속에는 선과 면의 경계가 모호한 '색 덩어리'들만이 있습니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 어렵죠.
사실 로스코의 그림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로스코는 1903년, 러시아의 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20세기 초반 유럽 사회에선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팽배해 있었죠.

로스코가 학교를 다닐 무렵, 로스코의 아버지는 이런 유럽의 분위기를 염려했고 모두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민한지 1년도 되지 않아 로스코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죠.
로스코는 학창시절 노동자 인권, 여성주권을 비롯해 사회참여활동을 열심히 펼쳤습니다.

그러면서도 학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예일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죠.
하지만 재학 도중, 장학금이 취소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일로 로스코는 명문대학 안에 팽배한 엘리트의식에 치를 떨게 되는데요.

이러한 세태를 풍자하는 신문을 만드는 등 학내에서도 비판적인 활동을 펼치다가, 2학년이 되어서는 학교를 중퇴하죠.
1923년 학교를 떠난 로스코는 직장을 찾기 위해 뉴욕을 찾아갑니다.
하루는 친구 집에 들르게 되는데요.
그 때 친구는 한 모델을 스케치하고 있었죠.

로스코는 그런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화가가 되기를 결심합니다.

이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로스코는 여러 화가 집단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던 중 '막스 웨버'라는 한 예술가를 만나죠.
같은 러시아 출신이면서, 앙리 마티스 밑에서 배운 적이 있는 막스 웨버는 유럽 현대회화에 정통했습니다.

때문에 입체파, 독일 인상주의 야수파 등 유럽의 다양한 현대 화풍을 로스코에게 소개하죠.

기존의 그림 그리기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던 유럽 현대화풍들은 로스코를 단숨에 매료시켰습니다.
로스코는 자신만의 시각을 담는 유럽의 회화들을 보며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곧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죠

“나는 예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왔다”

이후 로스코는 자신만의 화풍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모호하면서도, 거친 붓터치를 담은 작품들을 선보이는데요.

로스코 특유의 어두우면서도 도시적인 느낌은 동료 화가들 사이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당시 뉴욕은 1, 2차세계대전 사이, 유럽사회의 공포를 피해 온 예술가들이 많았는데요.
때문에 뉴욕 갤러리 곳곳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아주 다양하고 독특한 작품들이 넘쳐났죠.

로스코에게 있어 뉴욕은 새로운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로스코는 그 작품들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그림 속에 “감정”을 담아내는 방식에 매료됩니다.
이 시기 로스코는 갤러리 출품을 시작하는데요.

이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로스코의 대표적인 작품들과 달리 정물, 초상화 등 대상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을 볼 수 있죠.

3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는 로스코의 작품들이 더 어두워집니다.
로스코는 작품을 통해 전쟁의 위험과 함께, 도시민이 느끼는 쓸쓸함을 담고자 했죠.

사회문제에 여전히 관심이 많던 로스코는 사회의 문제를 작품에 담아 사회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작품 속에 사회 문제를 담기 위해 사회 속 사람들의 ‘독특한 감정’을 그려넣었죠.

1940년 그려진 <지하철 판타지>가 대표적인 작품인데요.
지하철 역 속 마르고 길쭉한 어딘가 모호한 모습의 사람들.
표정은 또 매우 차가운 느낌을 풍기죠.

로스코는 사실적인 묘사보다, 차가운 감정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도시민의 삶, 고립된 도시, 그리고 사회의 문제를 보여주고자 했죠.

로스코는 이렇듯 표현을 통해 감정을 함축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이후 일상 속의 이미지들로 초현실적인 상상을 그려내는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발전하죠.

"비극적인 관념과 이미지는 늘 내 머리속에 있다.
그러나 끄집어 낼 수 없다.
그것은 실체가 없으니..."

평단과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어가던 로스코는 돌연 고민에 빠집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회화 그림의 한계를 느꼈죠.
한 라디오 인터뷰에선 더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미술양식으로 화가의 고뇌와 희망을 담아내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혼란한 현대의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선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했죠.
로스코는 감정을 담아내는 새로운 언어를 찾기 위해 '고대 신화'를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고대의 신화는 과거부터 현대까지 모든 문명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특히나 로스코는 이 시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빠져있었습니다.

니체는 이 책을 통해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은 보는 이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비극이 가진 숭고함이 보는 이들 속 감정의 골을 해소해준다는 것이죠.
로스코도 이 주장에 동의했습니다.

현대에도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정신적 공허함을 해소한다고 보았죠.
특히나 ‘신화’의 경우, 신화가 가진 부분적인 미완성이 보는 이의 공허함을 없애준다고 말했는데요.

신화가 완전히 채우지 못한 부분 안에서 보는 이들은 제 나름대로 영혼적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성장하며 그것이 삶의 투쟁을 해석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었죠.

로스코는 스스로를 ‘신화자’라고 불렀고, 신화 속 이미지들을 작품 안에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신화가 가진 미완성처럼 관객들이 작품을 보고 제 나름의 해답을 찾으며 영혼적 성숙을 할 수 있도록 작품에 제목을 붙이거나, 액자에 작품을 넣는 것을 멈췄습니다.

“침묵은 정확하다”

1943년 로스코는 자신의 아내와 2번째 이혼을 합니다.
이혼은 로스코에게 긴 상실감을 가져다 줬죠.

주변 풍경을 바꾸는 것이 상실감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로스코는 미국 각 지역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는데요.
특히나 당시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클리포드 스틸과 친해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그러면서 현실의 이미지를 활용해 초현실적인 상상을 그리던 초현실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점차 현실에 없는 형체를 그리기 시작하는데요.

로스코의 그림은 점차 추상화로 변화하기 시작하죠.
이 시기에 그린 바닷가의 느린 여울은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캔버스 위로 색과 면, 그리고 갖가지 형체들이 유영하듯 돌아다니는 모양새.
로스코의 작품들은 현실의 이미지들을 떠나기 시작하죠.

“내가 삶에서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다.
검정이 빨강을 집어 삼키는 것.”

1946년 이후로 평단에선 로스코의 화풍을 부르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합니다.

"멀티폼"

로스코의 작품들은 점차 추상의 본질을 탐구하며, 무언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요.
그 결과 캔버스는 복잡하고 오묘한 색면들로 채워졌죠.

우리가 실생활에서 떠올리거나 볼 수 있는 이미지를 떠나, 완전한 추상만 남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로스코 작품의 특성을 두고 여러 색과 면이 교차한다는 의미로 다층 형상 "멀티폼"이라 불렀죠.
로스코는 신화에 대한 탐구를 하던 때처럼 감정을 유발하는 본질, 원형을 고민했고 계속해서 멀티폼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그러던 중 1949년에는 앙리 마티스의 "빨간 작업실"이라는 작품을 구입하게 되는데요.

빨간 색으로 채워진 캔버스 위, 최소화된 형태에 대한 표현들.
마크 로스코는 이 작품에 완전히 매료돼 버렸죠.
로스코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떠한 형태와 이미지도 색과 면 이상의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는 여러 색면을 교차시키는 멀티폼 형식에서 더 간결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거대한 캔버스 위에 기껏해야 두 세개로 칠해진 색덩어리들.

하지만 관람객들은 거대한 캔버스 위 놓여진 색들에 압도당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슬픔, 또 때로는 숭고함.
색으로만 이뤄진 작품들은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일종의 종교적인 경험을 만들어냈습니다.

로스코가 그토록 추구했던 "단순한 표현 속 복잡하고도 깊은 심정"을 담아낸 것이었죠.
당대 비평가들은 이런 그의 작품을 보고 "색채" 표현을 극대화한 예술이라 말했지만, 로스코는 반기를 들었습니다.
자신 그린 것은 형태가 아닌, 인간의 본연적 감정이라 말했죠.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색이나 형태 같은 것엔 관심 없다.
대신 비극이나, 운명, 인간 본연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 있다”

로스코는 작품 속에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로스코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그릴 것인가보다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였죠.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45CM의 거리에서 바라보기를 조언했습니다.
이 거리에선 거대한 로스코의 작품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없죠.

하지만 로스코는 이 거리에서 사람들이 작품 안에 있는 듯한, 무한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죠.
로스코는 작품 속에 색채나 형태가 아닌 인간의 감성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 속에서
어떤 것이 느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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