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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에펠탑의 비밀

조회수 2019. 12. 12.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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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위한 문화예술 X GS칼텍스] 에펠탑을 만든 건축가부터, 에펠탑과 사랑에 빠진 예술가까지
에펠탑의 네 다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술렁거립니다.
당대의 파리는 석조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였어요.
건축 재료로 철을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던 시대.

그런 시대에 에펠탑의 네 다리는 자신의 철골을 위풍당당 드러내고 있었죠.

‘철로 만든 에펠탑이 들어서면 파리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걱정어린 시선으로 에펠탑을 바라봅니다.
제철기술의 발전이 두드러졌던 19세기.
기술의 발전은 건축술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진보적인 건축가들은 철에 주목했죠.
그들은 돌이나 나무처럼 기존의 건축재가 아닌 철과 유리에 주목했고, 이것들을 이용해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

철기둥이 건물을 지탱하고 유리로 표면을 덮은 이 건물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는데요.

바로, 수정궁입니다.

수정궁에는 돌이나 나무같은 기존의 건축재가 전혀 쓰이지 않았고, 때문에 영국의 기술 수준을 과시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죠.
그러자 경쟁국이었던 프랑스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어요.
수정궁을 능가하는 기념물을 만들어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하려 했는데요.
프랑스 정부하 전시물 설계 공모엔 수백여 개의 응모작이 접수되었습니다.

그중엔 '귀스타브 에펠'의 것도 있었죠.

에펠은 철과 관련된 구조물 제작에 일가견이 있던 건축가였는데요.
그는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 철골조를 만들었고, 또 철을 이용한 교량을 여러 개 건설해서 명성을 얻었죠.

프랑스 정부의 공모전에 제안한 것도 높이가 300m에 달하는 거대한 철탑이었어요.
완성만 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 될 수 있었죠.
에펠은 프랑스 정부를 설득했고,
프랑스 정부의 최종 선택은 에펠이었습니다.
1887년 1월

역사적인 에펠탑 공사가 시작됩니다.

콘크리트 기초를 다지는 데만 5개월 정도가 걸렸고
그 기초 위에 네 개의 기둥이 아치 형태로 조립되어 올라갔죠.
그런데 공사가 진행될수록 예술가들의 심기는 불편해졌어요.

돌로 만든 멋진 건축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파리에. 그것도 파리의 중심부에 거대한 철탑을 세운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그들은 에펠탑이 파리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며 분개합니다.
예술가들의 불편한 심기를 뒤로한 채 네 개의 다리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솟아올랐고,

1889년 3월 정상에서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아래로 벌어진 나팔 모양.

이런 구조는 바람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줘 300m 높이에서도 구조물이 안정감을 갖게 했죠.
사용된 큰 들보와 철판이 1만 3,038개

리벳만 105만 864개에 달하는 엄청난 물량이 들어간 공사였고, 공사 결과 만들어진 에펠탑은 프랑스의 철골구조 건축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 상징물이었습니다.
세워질 때는 온갖 불평불만을 다 들었던 에펠탑이지만 1889년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자,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뒀어요.

사람들은 에펠탑이 그리는 미려한 곡선에 감탄했고 직접 탑에 올라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시각적 충격을 받기도 했죠.
그러자 처음에는 에펠탑을 비난했던 예술가들도 이제 철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에펠탑의 미학적 가치에 주목하는 예술가들도 있었어요.

앞서 살펴보았듯 에펠탑은 고전주의 건축에 대한 도전이었고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건데요.

그랬던 에펠탑이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모더니즘 화가들이 고무되었죠.
자연주의 화가인 폴 루이 들랑스, 신인상주의 화가인 조르주 쇠라 등

고전주의 미술에 저항했던 모더니즘 화가들이 에펠탑을 모더니즘 운동의 상징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들이 그린 에펠탑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떤 낭만, 어떤 낙관적인 태도였어요.

벨 에포크.
우리는 에펠탑이 세워졌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를
벨 에포크라고 부르는데요.
좋은 시절이라는 뜻인데, 당시는 정말 좋은 시절이었어요.

산업은 발전하고 새로운 기술들이 계속 개발되어 일상 생활을 빠르게 바꾸던 시대.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믿었고, 역사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는 결국 행복해질 거라는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죠.

때문에 이때의 에펠탑 그림에는 벨 에포크 특유의 낭만적인 시선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1909년부터 1926년까지 에펠탑의 다양한 모습을 30점 이상 화폭에 담아 ‘에펠탑의 화가'라고 불리는 로베르 들로네.

들로네에게서도 이러한 종류의 낙관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들로네는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주의 화풍에 속하는 화가입니다.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시점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어 들로네의 에펠탑은 형태가 와해되어 있죠.
하지만 들로네는 입체주의에서 더 나아갑니다.
그림에 흥얼거림을 담아낸 건데요.

이 그림에서도 에펠탑은 왜곡되고 구부러져 있는데 에펠탑뿐만 아니라 탑 주변에서 반짝이는 빛도 몇 개의 색면으로 잘라져 있고, 빛들이 에펠탑의 형태를 침범하고 있죠.

전체적으로 색채가 꽤 다채롭게 사용되는데 이건 다른 입체주의 화가들과는 좀 다른 점이었어요.
다른 입체주의 화가들은 형태의 해체에 집중하기 위해 색채는 최대한 단순하게 가져갔다면, 들로네의 그림은 형태를 해체하기 위해 오히려 빛을 끌어들이고 다채로운 색채를 도입하죠.

그래서 색들의 대비가 어떤 흥얼거림을 줍니다
오르피즘.

들로네의 화풍엔 오르피즘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처럼 생생한 음악적 감동을 준다는 뜻이었죠.
이 그림에선 여러 빛들이 어우러져 아예 에펠탑을 덮어버립니다.

에펠탑은 거의 보이지 않고 갖가지 색면들만 부각되어 있죠. 밝은 색과 어두운 색,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이 교차하면서 리듬감을 만들어내고 있죠.
다른 화가들이 에펠탑을 그리면서 드러냈던 어떤 낙관, 어떤 낭만은
들로네에게선 흥얼거림의 방식으로 구현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사진 찍힌 기념물
가장 많이 재생산된 기념물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기념물
오늘날 에펠탑을 수식하는 말들인데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에펠탑과 사랑에 빠진 걸까요?
1888년 에펠탑 건축이 반대에 부딪혔을 때
에펠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탑의 유용성을 설명하려 했어요.
"높으니까 기상 관측하는 데 좋고, 낙하실험을 할 수도 있고, 군사통신용으로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만들고 보니 에펠탑의 진짜 쓸모는 다른 데 있었죠.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다는 것.
벨 에포크 시대에 에펠탑은 산업화의 상징이었고,
사람들이 미래를 낙관하도록 도왔습니다.

오늘날 에펠탑은?
밝은 전망이 가득했던 그 즐거웠던 시절로 우리를 데려다주죠.
과학기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역사가 언제나 진보하는 것은 아님을 이제, 우리는 알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태도는 사람을 웃음짓게 만드는 힘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낙관적인 태도를 사랑하듯
에펠탑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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