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 집어던진 변기

조회수 2019. 10. 25.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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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은 왜 체스 챔피언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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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천재, 혹은 괴짜
최초의 모션그래픽
최초의 설치미술
최초의 개념미술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내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세계를 연
20세기 가장 혁명적인 예술가
마르셀 뒤샹은 왕성히 활동하던 19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며
가장 영향력있는 예술가로 손꼽히기도 하는데요.

항상 신기함을 선보였던 그의 작품들 만큼이나
그의 생애 또한 특이한 면모를 갖추고 있죠.
'현대예술의 창시자',
그리고 '현대예술의 이단아'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으며
예술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던 마르셀 뒤샹은
돌연 예술계를 떠나 체스를 두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체스마스터가 돼
국가대표 뿐만 아니라, '체스 챔피언'의 자리에까지 오르죠
현대예술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탄생시키며
예술의 중심에 섰던 마르셀 뒤샹
그는 왜 갑자기 체스마스터가 됐을까요?

뒤샹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한 도시에서 태어났는데요.
뒤샹의 가족은 어렸을 때부터 전시회 감상을 비롯한 예술활동을 즐겼습니다.
실제로 이런 영향으로 뒤샹의 일곱 형제 중, 뒤샹을 포함한 4명이 성공한 예술가로 자랍니다.

뒤샹은 어릴적부터 회화에 재능을 보였는데요.
특히나 후기 인상주의 느낌에 강렬한 색과 표현을 담았죠.
어릴적부터 풍부한 표현력을 담아내며
모네의 화풍같단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요.
1905년엔 한 가을전시회에서
마티스의 작품을 접합니다.
날 것 그대로를 담아낸 듯한
붓터치에 매료된 뒤샹은
야수주의 화풍도 자신의 스타일에 첨가하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뒤샹의 초기 회화작품들을 보면
어딘가 강렬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 들죠.
성년이 되었을 때 뒤샹에겐 새로운 예술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뒤샹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하고 있던 뒤샹의 형이
주위 화가들과 함께 정기적인 토론모임을 열었는데요.

모임의 화가들은 당시 각광받던 입체파 화풍을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부끄럼이 많던 뒤샹은 토론모임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토론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그리곤 입체파 화풍에 심취하게 되죠.
한가지 시각이 아니라, 다양한 시점이 한 순간에 공존하는 작품

비현실적인 상상을 통해 만들어내는 예상불가능한 이미지들에 뒤샹은 빠져들게 됩니다.
20세기 초반 사람들은 ‘4차원’ 개념에 빠져있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하여,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았는데요.
여기서 ‘4차원 시공’이라는 완전 새로운 세계관의 가능성이 열렸죠.
기존의 우리가 경험하는 3차원 세계에
시간의 관념을 더해진 것인데요.

이는 과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줬고,
문학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죠.
20세기 초반 화가들은 이 개념에 매료돼
작품 속에 ‘4차원시공’을 담기 위해 도전했는데요.
뒤샹은 이 시기 한 작품을 선보입니다.

사람인지 로봇인지조차 불분명한 형상,
다만 무수한 선과 면이 교차하는 모습

바로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였죠.
이는 뒤샹의 회화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단순히 다양한 시점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른 변화를 담아내는 작품.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나체의 모습을
다양한 시점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으로 파괴해 재구성해낸 것이었는데요.
자신의 도전에 심취했던 뒤샹은 자신감을 얻고, 한 입체파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합니다.

하지만 출품을 거부당하고 말죠.
상심한 뒤샹은 이후 예술을 그만두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뒤샹은 작품활동을 멈추고 생계를 위해 도서관의 임시직 사서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수많은 책을 통해 다양한 철학과 과학을 접하게 되는데요.

특히나 프랑스의 수학자 ‘푸앙 카레’의 이론에 빠져들게 되죠.
푸앙카레는 ‘사물 자체가 과학이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만 과학에 도달할 수 있다
이들 관계 외엔 인식할 수 있는 실제가 없다”고 주장했죠.

뒤샹은 이러한 푸앙 카레의 주장에 매료됩니다.
이는 이후 뒤샹의 예술세계에 아주 커다란 전환이 되는데요.
푸앙 카레의 주장처럼 뒤샹은
사물 그 자체, 즉 작품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순 없단 생각에 빠집니다.
다만 작품을 통해 생겨나는 다양한 관계가 예술의 본질이라 생각했죠.

다시 말해,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것.
뒤샹은 이후로 관습적인 그리기, 회화를 그만둡니다.

1913년부터 뒤샹은 작품 속에 ‘시공간’을 담는 시도를 선보입니다.
그 결과,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마치 '발명품' 같은 작품들이 탄생하죠
뒤샹의 <세 개의 표준 정지기>는
1미터 길이의 줄 3개를 1미터 높이에서 수직으로 떨어뜨렸을 때
나타난 모양을 기록한 것인데요.
한쪽에는 실을 박제했고,
또 한편에는 나무로 모양을 본떠 만들었죠.
이는 우리가 ‘미터’라고 생각하는 표준적인 기준이 우연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지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표준화된 시공간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 시기부터 8년에 걸친 대작 <큰유리>작업을 시작했는데요.
유리평면 안으로 각종 형태들이 박제되고 그 뒤로는 유리 너머 야외가 보일 수 있도록 위치시켰습니다.
때문에 유리창 너머로는 시시각각 변하는 외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2차원 평면 위에 3차원의 형상들이 박제되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배경이 바뀌는 작품을 통해
뒤샹은 갖가지 차원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작품을 상상했죠.
이 시기 뒤샹은 작품 속에 시공간을 담아내는 작품들을 계속해서 선보였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공간을 작품으로 만드는 설치미술과 시간 흐름에 따라 작품이 변화하는 키네틱 아트의 발판이 됐죠.

1917년 뒤샹은 한 독립미술가협회 전시에 자신의 작품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본명 대신 R.Mutt라는 가명을 사용했죠.
그의 작품은 하지만 그림도, 조각도, 설치미술도 아니었습니다.
뒤샹이 익명으로 내놓은 작품은 다름 아닌 소변기.
작품의 옆엔 “샘”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죠.

하지만 작품이 출품되고 작품은 전시회장 한 켠에 방치됐습니다.
전시 주최측은 변기는 작품이 아니라고 논평을 내놓기도 했죠.
전시가 끝나갈 무렵, 뒤샹은 자신의 가명인 R.Mutt를 옹호하는 논평을 내놓습니다.
“누구라도 입점비를 내면 참여할 수 있는 전시였다”
“그러나 그 작품은 철저히 배제됐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작품을 선택했다. 작품을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뒤샹은 이를 통해 작품의 권위를 만들어내는 미술계의 시스템에 반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레디메이드’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놓죠.
“레디 메이드”, “이미 만들어진”이라는 의미로 한글로는 기성품을 뜻하는데요.
“샘”을 전후하여, 다양한 레디메이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자전거 바퀴, 선반 등이 그 예였죠.
작가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선택한 것이 작품이 되는 것.

이는 푸앙 카레의 주장에 대한 뒤샹의 답안이면서,
예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손기술’이 아닌 ‘해석’과 ‘개념’이라는 뒤샹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현대 수많은 예술의 영감이 됐죠.

“내 아이디어는 찾는 것이 아닌,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후로 뒤샹은 도발적인 작품들을 계속해서 선보입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작품에 콧수염을 그리곤 야한 농담을 아래 새기거나,
자신이 스스로 여장을 하고 ‘로즈 셀비’라는 이름으로 여러 활동을 선보이기도 했죠.
뒤샹이 도발적인 작품을 선보이던 1920년대는 서구사회에
새로운 계급 형성과 함께 기존 권위가 재편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뒤샹은 기존의 예술계를 무너트리는 시도를 선보이며
자신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시도들을 많이했죠.
이는 도서관 사서시절 읽은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했는데요.
독일의 철학자 막스 스튜리너는 “오로지 모든 것에 자아의 권위가 있다” 주장했죠.
이 주장에 심취한 뒤샹은 작가 스스로의 의지와 다양한 관점에서 스스로의 해석을 내놓는 관객의 의지 모두 새로운 권위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작품의 권위를 만들어내는 건 미술관이나 평론가 같은 제도가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작가와 관객의 자유로운 해석이라 생각했죠.
1923년 여러 작품 활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뒤샹은
돌연 예술활동에 소극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가 체스를 두기 시작하죠.
물론 종종 작품을 남기고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했지만 여생동안 체스에 매진합니다.
사람들은 예술계에 큰 혁신들을 이끌어 온 뒤샹이
예술에 염증을 느끼고 남은 여생을 소일거리로 지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뒤샹은 체스에 심취하게 되죠.
그리곤 체스가 가장 완전한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2차원 평면 위에 3차원의 말들이
시간의 굴레 속에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들어내는 작품

뒤샹에게 체스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들어내는 예술의 또 다른 형식이었습니다.
이후 뒤샹은 체스에 더욱 더 몰두하여 협회로부터 체스마스터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또 국가대표로 선출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무패 신화를 기록하는 체스 챔피온에 등극하기까지 했죠.
자신의 삶을 묻는 인터뷰에서 뒤샹은 매순간 체스를 두는 것은
가장 완벽한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기야 죽는 일도 남의 일이지”
1968년 뒤샹은 자신의 유쾌한 성격을 담은 묘비명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납니다.

예술계는 대가의 죽음을 모두 아쉬워했죠.
모두가 대가의 죽음을 추모하던 그때,
세상을 깜짝 놀래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의 스튜디오 구석 밀실에서 한 작품이 발견된 것이죠.
1946년부터 그가 죽기 2년 전까지
약 20년간 작업한 마지막 대작 <에탕 도네>

나무로 된 낡은 문 사이 작은 구멍 2개
그리고 그안을 통해 보여지는 하얀 구름과 연못
그리고 나체
뒤샹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을 목격자로, 또 관음하는 이로 만들었죠.
작품을 은밀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단순히 감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이 아닌 ,
경험으로서의 예술을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었습니다.
뒤샹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작업실에서 또다른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죠.
뒤샹에게 예술은 새로운 가능성이었습니다.
때로는 재치있게 또 때로는 날카롭게,
예술계와 대중을 향한 도발적인 도전들은
수많은 예술의 씨앗들을 뿌리며
현대 예술의 근간이 됐죠.
“나에게 어려운 점은 지금 즉시 이 시대의 대중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내가 죽은 후 50년 혹은 100년 후의 대중을 기다리고 싶다.

이들이야말로 내 관심을 끄는 이들이다”
세상을 뒤집은 변기가 등장하고 100년이 지난 현재,
뒤샹의 작품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