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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호 수몰 현장에서 구한 중원 윤민걸가옥

조회수 2020. 8. 24.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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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조선말에 지어진 윤민걸 가옥(중요민속자료 135호)은 나지막한 동산을 등지고 넓은 평지를 바라보는 충북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에 납작 엎드린 형태다. 앞마당이 넓은 이 집은 배치가 특이한데, 먼저 사랑채에 들어가려면 행랑 마당의 일각문一角門을 지나야 한다. 그리고 마당이 넓은 사랑채와 안채를 거의 일렬로, 안채 왼쪽 별채를 직각으로 배치했다. 이러한 배치뿐만 아니라 안채만 한 아래채를 안마당에 별도로 둔 경우도 드물다. 또한 대지와 집이 워낙 커서 일각문을 거쳐 사랑채로 들어가는 경우는 보은 선병국 가옥을 제외하고는 보지 못했다. 현재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내외담이나 중문도 없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원래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행랑채가 있었고, 행랑채에 만든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갔다고 한다.

최성호

사진 전원주택라이프 편집부

지세는 배산임수背山臨水 형국으로 앞으로 넓은 평야를 가르는 개울이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자리한다.
안채보다 왜소한 사랑채

구조도 특이하지만, 3칸으로 집 전체 규모에 비해 너무 왜소하여 사랑채는 언뜻 별채처럼 느껴진다. 본채와 아래채로 이루어진 안채의 경우 규모뿐만 아니라 각 건물도 5칸 이상으로 사랑채보다 크다. 사랑채에 드린 방은 3칸인데 뒤쪽 반 칸은 나중에 늘린 것으로 실제는 2칸 반 크기다. 방은 2대와 3대가 같이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배치 구조다. 아마도 안채와 사랑채를 지은 뒤에 살림이 늘어나자 별채를 지었을 것이다. 


사랑채는 구조가 흥미롭다. 전면 3칸, 측면 2칸인데 대청은 없고 누마루만 있다. 누마루라지만 높이가 방과 1자 정도 차이 날 뿐이다. 판자로 만든 창문만 아니라며 누마루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보면 누마루와 좌측 방 1칸이 튀어나온 ㄷ자 형태로 가운데 1칸에만 툇마루를 설치했다. 우측 누마루 창이 모두 판문이라 작은 건물임에도 아담하기보다 무거워 보인다.


사랑채 기단은 외벌대인데 전면만 계단 형식이다. 그렇기에 전면에서 보면 마치 두 벌 기단처럼 느껴진다. 사랑채 전후 면의 레벨을 맞출 때 전면 기단이 높아져 그 부담을 줄이고자 두 벌 기단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좌측 기단 하부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다. 굴뚝 위치로 보아 방구석구석으로 불길을 유도하고자 만든 보조 굴뚝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 일각대문을 통해 사랑마당에 이른다. 왼쪽으로 행랑채에 시설된 중문을 지나서 안마당에 다다르도록 게획 했으나, 지금은 행랑채나 내외담 모두 무너져서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사랑채는 3칸 전퇴 一 자형 합각지붕 집으로 별당처럼 구성됐다.
다목적 건넌방을 둔 안채

어긋난 T자형 평면 구조다. 안채는 전퇴집으로 왼쪽에서부터 칸 반 부엌과 2칸 안방, 안 대청, 작은 대청(현재는 건넌방으로 개조)을 배치하고 작은 대청 앞으로 꺾어 2칸을 늘렸다. 작은 대청 쪽으로 칸 반 건넌방을 배치하고 바깥쪽 반 칸 상부에는 건넌방 다락을, 하부에는 부엌을 설치했다. 또한 작은 대청에 연이어 고방庫房을 설치함으로써 전체적으로 T자 형태를 띤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건넌방과 사랑 대청 사이의 문은 필요에 따라 넓게 쓰는 미닫이였다고 한다. 안채 특징은 건넌방을 매우 넓게 사용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건넌방 옆에는 다용도 반 칸 골방이 있다. 건넌방은 넓은 데다 고방과 연결하는 등 신경을 많이 썼는데, 며느리가 기거하는 방 이상의 용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채는 전면에서 보면 '一'자지만 뒷부분 1칸이 튀어나와 ㄴ자 형태를 띤다. 후퇴집으로 아래쪽 2칸이 부엌인데 그 뒤에 찬모가 사용하는 1칸 방을 붙였다. 또한 부엌에 연이어 2칸 방과 광을 반 칸 내밀어 만들었다. 방 쪽에서 골방과 툇마루로 사용하고 내민 반 칸은 광으로 사용했는데, 현재는 모양이 바뀐 상태다.

안채 뒤뜰 장독대와 일각문.
사당과 광채

사랑채 뒤쪽에 자리한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1칸이고 바닥에 마루를 깔았으며 맞배지붕이다. 특이한 점은 좌우로 튀어나온 도리를 받치고자 까치발을 설치한 점이다. 돌출 길이만 보면 까치발을 설치할 이유가 없다. 까치발은 최근에 개수한 것으로 보인다.


광채는 그 자체가 담 역할을 한다. 다른 채들은 지붕이 기와인데 광채만 초가다. 사당 쪽으로 1칸 튀어나온 ㄴ자 형태이고 도난에 대비하여 창문조차 만들지 않았다. 5칸으로 적지 않은 규모임을 감안할 때 예전 이 집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안채는 전퇴집으로 왼쪽에 부엌을 두고 다음은 안방, 웃방, 안대청 그리고 작은 대청, 앞으로 꺾어져서 간 반 크기의 건넌방을 배치했다.
일조日照를 고려한 배치

이 집은 뒷산에서 한참 앞쪽으로 배치했기에 뒤쪽으로 담을 쌓았다. 산을 배경으로 집을 지을 때는 산을 자연 담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집은 산에서 많이 떨어졌기에 별도의 담과 출입문이 필요했다. 이렇게 터를 잡은 이유가 궁금하다. 뒤에 텃밭이 필요했던 것도 아닐 터, 아마도 집의 좌향坐向때문으로 보인다. 북서향이라 집을 산 쪽에 붙이면, 아침에 햇빛을 받기 어렵기에 집을 산에서 떨어뜨려 배치한 것이다.

안채는 안방에서 안대청까지 전퇴에 툇마루를 깔고 건넌방 안쪽에 쪽마루를 놓았으며 건넌방 동쪽 퇴는 골방으로 만들고 앞쪽에 반 칸을 들여서 상부는 벽장을, 아래는 아궁이를 설치했다.
사당채 3칸 맞배집으로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문화재 지정 배경

이 집의 문화재 지정 배경을 보면, 민족문화백과사전에는 "19세기에 지어진 아주 평범한 집이며 변형된 부분도 많지만 충주댐 건설로 인근의 중요한 집들이 이건 移建되거나 없어져 이제는 이만한 집조차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전해야 한다"고 나온다. 


아마도 예전에는 주변에 이 집보다 훨씬 좋은 집들이 많았던 것 같다.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좋은 고택들을 보전하는 대책을 세웠다면 아름다운 한옥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남았을 것이다. 경제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단순 논리가 많은 한옥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우리는 70, 80년대를 거치면서 '잘 살아야 한다'는 화두에 파묻혀 소중한 문화유산을 스스로 파괴해 버렸다. "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라는 새마을운동가의 노랫말처럼 초가집을 없애고, 초가집을 블록 담 슬레이트집으로 만들면서 문화유산도 같이 없애 버렸다. 과거는 무조건 해악이고 나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이제 전통 살림집에 대한 자료가 없어 연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을 교훈을 삼아 앞으로는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광채와 안채 사이에 튀어나오게 사랑채를 배치했다.
배치도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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