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후반 시대상을 그대로 담은 장수 정상윤 가옥

조회수 2020. 6. 22.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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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전북 장수군 정상윤 가옥丁相潤家屋(문화재자료 제119호)은 사랑대청 상량문에 文宣王誕降二千四百八十九年이란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 1938년에 지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이기에 개화기보다 훨씬 후대에 지어진 집임에도 언뜻 보면 옛날에 지어진 한옥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일 만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시대 변화를 읽을 수 없다. 보수성이 그대로 지닌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대까지만 해도 아직 지방에는 구시대 생활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불교 용어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은 같은 모습이 아니고 늘 변화한다는 뜻이다. 우리 삶도 늘 변한다. 삶이 변하면 삶을 담는 집도 변한다. 특히 20세기 들어 서구 문물의 급격한 유입 그리고 일제강점 등으로 사회는 급격하게 요동쳤고 이런 이유로 집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집의 변화는 지역적으로 큰 편차를 보였다. 서구 문물 유입이 바로 이뤄진 서울이나 개항장開港場(일정 지역을 개방해 외국인 내왕과 무역을 허용한 지역) 부근과 그렇지 않은 곳은 변화 정도에 많은 차이가 있다. 서울의 집은 새로운 변화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 서구식, 일본식 건축양식이 많이 반영됐지만 내륙 지방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변화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변화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문에서 본 누마루. 누마루는 한 자 높여 자리를 잡고 기단까지 높였기에 풍채가 상당하다.
좌측에 위치한 초가지붕 행랑채.
안채 앞에 작게 꾸민 마당으로 노부부 내외가 관리해 깔끔히 정리정돈 된 모습이다
보수적이지만 시대 변화가 읽힌다

전라북도 장수군 정상윤 가옥丁相潤家屋(문화재자료 제119호)은 사랑대청 상량문에 文宣王誕降二千四百八十九年이란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 1938년에 지었다. 일제강점기 후반 개화기보다 훨씬 후대에 지어진 집임에도 언뜻 보면 옛날에 지어진 한옥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일 만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시대 변화를 읽을 수 없는 곳이다. 그만큼 보수성이 진하게 묻어 있다. 이는 같은 마을 종가와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몇 걸음이면 닿을 거리에 위치한 창원 정씨 종가(시도민속자료 제34호)는 대문이 솟을대문이지만 이 집은 평대문이고 사랑채 규모도 누마루가 있기는 하지만 네 칸으로 다섯 칸인 종가보다 작다. 이렇게 집을 지은 것은 종가의 위상을 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윤 가옥에는 아직 내외 법이 적용되고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중문 옆에는 평소 편하게 다니기 위한 쪽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예전에는 안채 안쪽에 나무로 만든 가리개가 설치돼 있어 사람들이 안채를 바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즉 이 시대까지만 해도 아직 지방에는 구시대 생활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장식성이 강해지고 생활 변화에 따라 집 구조가 복잡하다.


조선 후대로 갈수록 방이 한 줄로 늘어서는 홑집에서 방이 두 겹으로 배치되는 겹집이 다수를 이루는데 이 집은 겹집에서 나아가 더 깊은 구조다. 평면상으로 보면 안채 좌우 날개 쪽은 전면 퇴칸 부분까지 방이 확장돼 두 칸 반으로 넓어졌다. 또 모든 방의 상부에는 다락을 드려 부족한 수납공간을 대체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방 상부에 다락을 들이는 것은 19세기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20세기 들어와 점점 확대된다. 1908년 지어진 전주 학인당도 그렇고 정상윤 가옥과 인접한 1909년에 올린 함양 이웅재 가옥 안채도 적극적으로 다락을 드렸다. 이는 재산이 늘어나고 과거와 달리 다양한 물품을 사들이면서 곳간 외에 물품을 직접 관리해야 할 수납공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안채 전경. 왼쪽이 안채고 오른쪽이 사랑채다. 이전에는 사랑채 바로 뒤로 담이 있어 내외를 구분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어 건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지만 아직 지방은 보수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영춘헌이란 당호가 걸린 누마루.
중문에서 본 안채.
대문에서 중문은 직선으로 연결돼 있다. 중문 지붕이 커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 장식이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과한 치장이 전체적인 조화 깨트려

다락 수납공간은 집 전체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수납공간이 늘어나자 건축물이 높아져 전체적으로 과거 한옥과 비교해 웅장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 양식이 도입된 초기여서 아직은 세련되지 못한 모습이 여러 곳에서 읽힌다. 층고가 높아지면 처마가 조금 더 튀어나 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서까래 부재가 도리만큼 커져 전체적인 모양새가 둔중鈍重해지기 때문에 가옥은 처마만 높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현재 가옥에 거주하는 안주인 말대로 비가 툇마루 안쪽까지 들이치는 불편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락 환기와 채광을 위해 창문이 필요해졌고 결국 예전 한옥보다 그 수가 많아졌다. 창문이 많아지자 장식적인 면을 고려해 여러 문양을 넣거나 창문을 받치는 나무벽에 문자를 새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번다煩多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다른 새로운 시도가 있었던 부분은 안채 부엌이다. 부엌은 안채 맨 왼쪽에 놓였는데 앞쪽 한 칸과 뒤쪽 한 칸의 바닥 높이가 다르다. 아궁이와 불을 이용한 조리가 이뤄지는 부분은 낮게, 상차림이 이뤄지는 곳은 음식을 차려 바로 안방으로 내어 올 수 있도록 안방과 같은 높이로 구성한 것이다.


안방 옆 부엌은 지금도 주방으로 사용한다. 안주인 말로는 현재 주방에서 사용하는 가구도 예전에 있던 찬장 위치에 그대로 설치한 것이며 창문도 예전 위치 그대로라고 한다. 과거 가구 위치나 창문 위치가 현재 개념에도 맞을 만큼 부엌은 당시로써는 최신 개념으로 계획됐다.

안채 후면. 다른 한옥에 비해 층고가 높다. 다락을 들였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처마를 길게 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툇마루로 비가 들이친다.
정상윤 가옥은 노부부가 떠나면 관리할 이가 없다고 한다. 보존을 위한 당국의 배려가 요구된다.
담에 기와를 넣어 장식성을 강조했다.
장식이 많아진 당시 건축 양식 그대로

장식이 많아진 당시 건축 양식 그대로 19세기까지 한옥들은 규범에 묶여 집을 치장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갑오경장 이후 이러한 규제가 없어지자 이전과 달리 장식이 많아지게 된다. 이 집도 그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안채나 사랑채 모두 원기둥을 사용했으며 주춧돌도 공을 들여 만든 반구형이다. 사랑채 누마루 계자난간 모서리도 직교로 처리하지 않고 사선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다른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또 마루 끝도 앞에서 보았을 때 앞부분이 가볍게 보이도록 아랫부분을 빗면으로 쳐냈다. 이 외에도 안채와 사랑채를 그리고 사랑마당을 구분하는 담도 석재로만 쌓은 것이 아니라 중간에 기와로 문양을 넣어 장식성을 높였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공을 많이 들이고 매우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했지만 전체적으로 과잉 장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선 가장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중문이다. 중문 지붕을 너무 크게 만들어 무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지붕을 크게 만들려다 보니 밑에 가구가 번다 해져서 산뜻한 맛이 없다는 것도 흠이다. 또 지붕 처마 곡선이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다. 목수가 재주는 뛰어나지만 전체를 보는 눈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사랑채 누마루다. 사랑채는 풍광을 한껏 즐길 수 있게 지었다. 집은 뒷산에서 조금 떨어져 평지에 세워졌기에 전체적으로 낮아 보일 수 있다. 이런 점을 보완하고자 사랑채 기단을 높여 우뚝 세웠다. 덕분에 담 밖 풍광을 충분히 끌어들인다. 게다가 누마루를 한자 더 높여 놓았으니 풍채도 훌륭하다.


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마당 귀퉁이에는 연못까지 조성해 이곳에 앉으면 흥이 절로 나올 만한 분위기를 연출해 놓았다. 오랫동안 봄을 잡아두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담은 당호堂號영춘헌永春軒이 그야말로 어울리는 누마루다.

고택은 평지에 앉혀져 전망이 시원하지 못하ㅏ다. 누마루를 높게 올린 이유다.
정상윤 가옥은 안채 뒤쪽 광채와 대문간 옆 헛간채가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지어진 지 7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보수 한 것도 거의 없다. 현재 거주하는 안주인보다 두 살 많은 집이다. 집이 나이 먹지 않았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집은 당시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속 보존돼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 주인이 돌아가시면 이 집도 곧 쇠락할 것 같다. 후손 누구도 여기에 들어와 살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안주인 말이다. 지금도 주인 내외만 살고 있어 집 관리가 버겁다고 한다. 조금만 살펴봐도 쇠락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쉽게 들어온다. 이런 집이 잘 보존되도록 관계 당국의 많은 배려가 절실하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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