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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고려 후기 화려한 장식미를 그대로 간직한 안동 소호헌蘇湖軒

조회수 2020. 4. 20.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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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안동 소호헌安東蘇湖軒(보물 제475호/경북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길 2)은 조선 시대 지어진 건물이지만 고려 후기의 장식미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일찍이 1968년 보물로 지정됐다. 소슬합장을 간직한 마지막 건축물이자 민가로는 유일하다. 막새와 망와에 새긴 봉황과 용 문양은 당시 소호헌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대구서씨 종중에서 관리하는 소호헌은 살림집이 아닌 별서別墅다. 17세에 고성이씨 가문으로 장가간 함재涵齋서해(1537~1559)가 이곳에 자리 잡았는데 그의 장인은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다섯째아들인 이고이다. 고성이씨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안동 임청각과 그 옆 탑동종택으로 잘 알려진 가문으로 함재는 당대 안동 최고 가문에 장가간 것이다.


이러한 혼인이 가능했던 것은 대구서씨 또한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서거정徐居正과 같은 가문으로 함재의 아버지인 서고는 정삼품 예조 참의를 역임했고 함재를 위해 소호헌 동쪽 언덕에 집을 마련해 줬다고 한다.


그러나 고성이씨 안동종친회에서 발간한 고성이씨 안동문화유산 가계도는 함재 장인에게는 외동딸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집을 지어줬다는 것보다는 당시 풍습에 따라 처가 재산을 상속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소호헌은 이때를 즈음해 지어진 것으로 민가로는 보기 드문 임진란 전에 지어진 집이다.


임진란 전에 지어진 민가는 그리 많지 않다. 익히 알려진 강릉 오죽헌(보물 제165호/15세기 초), 강릉 해운정(보물 제183호/1530년),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보물 제457호/1500년경)과 향단(보물 제412호), 경주양동마을 서백당(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1484년)과 관가정(보물 제442호),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보물 제306호),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보물 제553호/1551년) 등이 있다. 이런 집들의 특징은 후기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장식 요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원기둥과 익공 등과 같은 두공斗拱을 사용하는 등 임진란 이후 집에서 볼 수 없는 특징들이 있다.

민가로는 보기 드물게 임란 전에 지은 소호헌. 살림집이 아닌 별서인 이곳은 대구서씨 종중에서 관리하며 보물 제475호다.
소호헌과 같은 담을 쓰는 약봉 태실 대문. / 소호헌 대문으로 팔작지붕이 위엄을 드러낸다.
파련대공에 소슬합장을 한 소호헌 대청

소호헌은 정면 두 칸 측면 네 칸인 대청에 옆으로 두 칸 방이 붙은 구조다. 대청 전면 두 칸은 누마루고 뒤쪽 여섯 칸은 일반적인 대청 형식인데 대청 좌측으로 두 칸 온돌방이 있다. 대청과 누마루 사이는 들어 열개로 된 띠살창을 설치해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소호헌은 임진란 전에 지어진 건물이 보여주는 특징이 있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첫 번째는 대공이다. 대공을 파련대공으로 했는데 이것은 대공을 만드는 방법 중 가장 고급스러운 것으로 살림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파련대공은 사찰의 대웅전이나 궁궐에서도 중요한 건물에서나 사용했다. 소호헌은 집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성종 때까지만 해도 건물에 치장을 많이 해서 문제라는 내용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건물을 화려하게 짓던 관습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 조선의 힘이 아직 전국에 미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의 파련대공 모습을 보면 조금 아쉽다. 파련대공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화려함과 정치함이 부족하다. 목수 조각 솜씨가 집의 화려함에 비해 조금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파련대공뿐만이 아니다.


기둥에 상부 익공 초각 솜씨도 세련됨이 부족하다. 전체적으로 멋은 부렸으되 그 정치한 솜씨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건물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런 파련대공을 썼다는 것보다 건축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소슬합장을 했다는 것이다. 人자 형태의 부재를 이용해 종도리를 받치는 구조를 일컫는 소슬합장은 조선 초까지 많이 사용했던 기법인데 후대에 들어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소슬합장을 사용한 조선 시대 건물은 건축연도가 정확히 밝혀진 것으로는 제일 늦은 1473년(성종 4년)에 지은 도갑사 해탈문이다. 이 이후로 소슬합장을 사용한 건물은 없다. 따라서 이 소호헌이 소슬합장을 사용한 마지막 건물이자 민가로는 유일한 건물이 아닐까 한다. 이런 이유로 일찍이 1968년 보물로 지정됐다.

소호헌 대청에 파련대공. 궁궐이나 대웅전에서 쓰는 파련대공을 한 것으로 보아 당대 최고의 사치를 누렸다 할 수 있다. 대공 옆 人자 형태가 소슬합장이다. / 소호헌 대청과 마찬가지로 파련대공을 한 약봉 태실 대청. 소호헌 대청 파련대공에 비하면 많이 약화된 형태다.
종중에서 관리하기에 소호헌은 깔끔한 모습이다.
약봉 태실 전경.
용 문양 새긴 망와… 장인 솜씨 돋보여

또 다른 특징은 기와에 있다. 기와를 보면 막새와 망와에 문양이 들어가있다. 망와와 누마루 암막새에는 용 문양이 새겨져 있고 숫막새에는 봉황 문양이 있다. 일반 건물에 이런 문양이 있는 예를 보지 못했다. 만일 조선 후기 일반 여염집에서 용 문양이 그려져 있는 막새를 사용했다면 아마도 그는 역심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용 문양과 봉황 문양을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이다. 그 문양 자체도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솜씨가 매우 뛰어난 장인의 작품이 분명하다. 이 정도면 궁궐 기와를 만들어도 손색없다.


소호헌 목구조에서도 남다른 부분이 있다. 보통 기둥은 초석 위에 올려 놓는다. 그러나 소호헌은 동귀틀을 상부 창방처럼 뺄목을 내 十자로 결구하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는데 흔한 사례는 아니다. 이는 아주 드문 경우로 본인도 한두 번 본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대청과 누마루의 하부구조가 다르다. 대청은 귀틀 위에 기둥을 올렸고 누마루는 누하주에 창방을 돌리고 그 위에 평방을 돌린 후 다시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이렇게 기둥을 분리한 것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울 때 하는 그랭이질(두 부재가 만날 때 어느 한 부재의 모양에 따라 다른부재의 면을 가공해 주는 작업)을 하는 것보다 편해서인지, 또는 수평을 맞추기가 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기법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보통 기둥은 초석 위에 올리는데 소호헌은 동귀틀 뺄목을 내 +자로 결구하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 망와에 용 문양을 새긴 일반 건물은 소호헌이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대청 전면 두 칸 누마루. 전망이 일품이다.
가문을 일군 서성이 태어난 약봉 태실

소호헌 울타리에는 소호헌 말고도 약봉 태실이라는 건물 한 채가 더 있다. 태실은 함재의 아들인 약봉藥峰서성(1556~1631)이 태어난 곳이다. 함재는 23살에 요절했지만 그의 아들 약봉은 1586년(선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여러 곳의 관찰사를 지내고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후 6대에 걸쳐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해 가문을 새롭게 했으니 그를 기릴 만했을 것이다.


약봉 태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 전후퇴집이다. 대청에 걸린 현판대로 약봉이 태어난 곳이라면 꽤 오래된 집이겠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렇지만은 않다. 현재 집은 원래 약봉 태실을 후대에 중건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어쨌든 이 집도 재미있는 특징들이 있다. 우선 오량집이고 앞에 전퇴가 있음에도 모두 평주로 처리했다. 일반적으로 평주를 쓸 때는 가운데 기둥을 둬 삼평주 오량집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전후퇴집으로 계획하기 위해 기둥을 4개 세웠다. 


또 다른 특징은 대들보 위에 올라간 종보를 받치는 동자기둥과 종도리를 받치는 대공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구조다. 파련대공인 대공은 많이 약화된 모습이고 종도리를 받치는 동자도 판형으로 했는데 각 판의 한쪽만 초각을 하다 말았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고치는 과정에서의 일어난 실수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대청 두 칸 가운데 있는 기둥에 눈이 간다. 약봉 태실 모든 기둥은 민도리집 기둥인 데 비해 유독 이 기둥 하나에만 주두를 사용하고 좌우에 뜬창방을 둬 소로 치장했다. 가운데 중심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은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치장이 아닌가 한다.

약봉 태실 대청. 민도리집 기둥인데 대청 두 칸 가운데 기둥만 주두를 사용하고 좌우에 뜬창방을 뒀다.
소호헌대청. 정면 두 칸 측면 네 칸 규모다.
소호헌蘇湖軒이란 이름에서 蘇가 '향할 소'이니 호수를 바라보는 집이란 뜻이다. 지금 소호헌 앞은 아무것도 없는 널찍한 마당이 있으나 예전에는 앞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과 함께 있는 소호헌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단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또한 바로 앞으로 지나가는 5번 국도가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에는 넓은 들을 바라보는 시원함이 있었을 것이다.
집은 주변 환경과 같이 존재할 때 그 빛을 발한다. 지금 소호헌은 앞을 지나가는 도로 때문에 경관을 바라보는 집의 가치를 잃고 말았다. 참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소호헌, 고성이씨 안동문화유산/고성이씨 안동종친회

소호헌안내팜플렛, 문화재청 사이트/소호헌

약봉 서성의 가문家門, 대구 서씨의 발흥지 안동 소호리

디지털 안동문화대전/소호헌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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