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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의 집 이야기 13편, 계획설계와 설계비(1)

조회수 2019. 12. 7.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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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의 집 이야기

양성필 건축사(건축사사무소 아키제주 대표)

     www.archijeju.com 064-751-9151

계획설계와 설계비

건축사협회에서 회지를 통해 회원들에게 ‘계획설계 비용을 제대로 받자’고 주장합니다. 그만큼 비용을 받지 않고 계획설계를 해주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겠지요. 계획설계는 흔히 ‘가假설계’로 통용됩니다. 최근 관공서의 행정편람에서도 가설계란 용어를 보았습니다. 가설계란 본격적인 설계 전에 임시로 만든 설계안을 뜻합니다. 건축사협회에서 가설계란 말도 사용하지 말자고 합니다. 설계란 본래 무형의 지적知的작업인데, 임시로 하는 설계가 말이 되느냐는 것이죠. 저 역시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건축설계 과정에서 계획설계가 갖는 의미와 비중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계획설계를 무료로 하지 말자는 것은, 그만큼 업무 비중이 작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비용이나 업무 비중의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무료로 계획설계를 하지 않습니다. 물론 설계 계약을 하면 계획설계부터 시작하지요. 계획설계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료로 해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이 글을 쓴 이유 중 하나가 무료로 계획설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계획설계가 갖는 의미와 과정이 의뢰인과 건축사 모두에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의뢰인이 계획설계를 받아보려는 이유는 수많은 건축사 중에서 누가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집을 잘 이해하고 설계할 수 있는지를 계약 전에 확인하려는 것이겠지요. 많은 오해 중 하나가 건축사들은 늘 계획설계를 해왔기에 컴퓨터로 쓱싹쓱싹하면 금방 도면으로 만들어 보여줄 거란 생각입니다. 심지어 건축사사무소의 컴퓨터 속에 다양한 도면이 들어 있어, 그중에 적당한 것 하나를 꺼내 땅에 맞춰 늘리거나 줄이기만 하면 되는 일 정도로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 생각에 부응하려고 고생하는 건축사도 많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란 점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건축설계는 정신적인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에 계획설계를 제대로 한번 하고 나면 탈진할 정도입니다. 초창기 사무실을 운영할 때 열심히 계획설계하고 미팅 전에 외관 이미지를 홈페이지에 올렸더니, ‘자기가 원하는 디자인이 아니어서 미팅할 필요가 없다’는 전화를 받고 황당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걸 무료로 서비스해 달라는 것은, 그런 에너지가 소모됨을 모르는 것이겠지요. 점차 계획설계가 간단하지 않은 설계 과정으로 많이 인식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간단하게 안을 잡아줄 수 있지 않냐’는 요구를 종종 듣습니다.


계획설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공공기관의 설계 방식인 ‘현상설계 공모’ 제도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어떤 시설을 지으려고 할 때 좋은 안을 제시한 건축사에게 설계권을 주는 방식이지요. 여러 곳의 건축사사무소에서 지원서를 제출하고 며칠 동안 밤샘작업해서 설계안을 만들어 응모합니다. 그중 가장 좋은 안을 심사해 당선시키는 방식이지요. 최근 2등과 3등에게 약간의 참가비를 주기도 합니다. 현상설계라는 것은 결국 계획설계안을 심사해 당선안을 뽑는 방식이지요. 인맥이나 가격경쟁을 통하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현상설계는 건축사에게 실력을 겨루는 장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현상 설계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간혹 현상설계 참가 경험이 있는 건축사들은 공정한 심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상설계의 핵심은 공정한 심사지만, 저는 현상설계란 방식 자체에 좋은 집을 만드는 데 적절치 못한 시스템이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현상설계에서 표출되는 것은 평면 구성과 외관입니다. 따라서 설계자는 멋있는 외관에 집중하지요. 그러다 보니 현상설계를 통해 완공된 건물들의 공통점은 멋있는 외관에 비해 내부 시설은 참으로 단출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당선안에서 제시한 외관을 만들려고 외관 공사에 큰 비용을 들이고 한정된 예산으로 마무리하려다 보니 내부 공사에 비용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또는 당선안의 수준을 따라가다 보니 초기에 제시한 예산을 훨씬 넘는 공사비가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습니다. 물론 현상설계에 공사비 예산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만, 계획설계 단계에서 공사비에 맞춰 설계하는 것도 그걸 심사할 때 제시한 예산으로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는 건축물인지 확인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일이 사례를 들 순 없지만, 좋은 집의 조건을 고려할 때 우선순위를 외관에 두지 않는 저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현상설계에서 당선된 안이 실시설계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며 괴로워하는 건축사를 볼 때도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계경기를 통해 좋은 안을 뽑는다는 취지는 좋지만, 그 이후에 유연하게 현실 문제를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제도입니다. 공사 예산과 저작권 문제가 현상설계 결과를 융통성 있게 조절할 수 없게 하면서 뒤늦게 발견되는 요구와 기능에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디자인에서 초기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복잡한 상황이 엮이는 건축에서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초기 디자인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고는 그렇게 완벽하지 않거든요. 한두 달 주어진 시간에 몇백억 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는 완벽한 계획설계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 아닐까요. 저는 사무실의 책상을 배치할 때도 몇 달간 이리 옮겼다가 저리 옮겼다가 했습니다.


초기에 제출한 안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없다는 불편함은 설계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계자도 자신이 제시한 안으로 현상설계에 당선됐으니 진행 과정에서 계획이 잘못됐음을 알아도 쉽게 디자인을 바꾸자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진행 과정에서 설계를 바꿀 수 있다고 한다면, 떨어진 설계자들은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실력으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매우 합리적인 방식처럼 보이는 현상설계가 현실적으로 융통성이 없는 불합리한 구조를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계획설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위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설계 계약 없이 소위 가설계를 요청하는 경우, 의뢰인 역시 설계 조건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곳저곳 안을 받아보자고 생각했다면 자신이 원하는 집이 무엇인지, 가는 곳마다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간략하게 방과 화장실 개수, 드레스룸 유무, 주방 크기 정도로 가설계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요구를 바탕으로 점쟁이처럼 상상해서 나머지의 생활 패턴을 그린 계획설계도면은 제가 보기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작성된 도면은 외형을 멋있게 디자인해서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평면 구성엔 분명히 의뢰인의 생활을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면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형태 역시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식의 설계가 의미가 없다면, 단지 계약 성사를 위한 목적만으로 열심히 작업할 수 없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계획설계를 마치 현상설계를 하듯이 멋있는 안을 보여줘서 의뢰인을 현혹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좋은 집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매우 부적절합니다. 물론 건축사의 디자인 능력을 확인하는 정도의 기여는 하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의미 있는 계획이 되려면 최소한 한 달 정도 기간을 두고 건축사와 의뢰인 간 5회 이상 미팅이나 의견 교환이 이뤄져야 겨우 가능할 것입니다. 한 달 동안 5회 이상 미팅하면서 가설계를 요구한다면 제대로 설계한다는 차원에서 옳은 얘기지만, 그런 작업을 무료로 진행하긴 어렵겠지요. 그렇습니다. 그건 실제로 설계자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는 건축사로서 중요한 일입니다.

'건축사의 집 이야기'기사는 연재 시리즈로 매주 토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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