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건축사의 집 이야기 12편, 삶을 통해 집을 설계할 수 있다면

조회수 2019. 11. 30. 09: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건축사의 집 이야기

양성필 건축사(건축사사무소 아키제주 대표)

     www.archijeju.com 064-751-9151

삶을 통해 집을 설계할 수 있다면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1887∼1965)라는 유명한 건축가는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집을 규정한 이보다 더 명확한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디자인하고픈 좋은 집도 삶을 담는 집이랑 다른 말은 아니지요. 우리말인 ‘집’에 가정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으므로, 집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이미 삶을 고려해서 설계한다는 의미입니다.


한동안 외지에서 살다가 온 저는 제주도의 고유한 건축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에 참 답답했습니다. 물론 제주도의 초가가 안거리와 밖거리로 되어 있고 일찍이 핵가족제도가 발달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 시절에 저도 초가에서 살았습니다. 지붕을 새로 이을 때면 쌓아놓은 새[茅] 묶음 속에서 친구들이랑 작은 집을 만들어서 놀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정작 건축과에 진학해서 공부할 때, 제가 본 것은 양동마을이니 하회마을이니 하는 육지의 양반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때야 제가 자란 서귀포에서는 기와집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으며, 집은 지역마다 모양이 다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담아야 할 삶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외국 건축가의 작품이 많이 세워졌고, 또한 우리나라 건축가도 해외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에도 외국 건축가가 설계한 아름답고 좋은 건축물이 많습니다. 반드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 건축가가 설계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편협한 사고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는 제주도 출신 건축가가 설계해야 한다는 것 역시 편협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누가 설계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좋은 집을 설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주도라는 지역성을 잘 이해하는 건축사라면 그렇지 않은 건축사보다 그곳에 잘 어울리는 집을 설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말에는 어떤 선입견이 있습니다. ‘제주도민의 삶은 그래도 제주도 출신 건축가가 더 잘 이해하겠지’ 하는 선입견이지요. 글쎄요.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지에서 온 성실한 건축사가 제주도에 더 어울리는 감성을 담은 건축물을 디자인해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훌륭하고 능력 있는 건축사는 지역성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거든요.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특수한 부분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래서 대기업에서 만드는 자동차, 가방, 가구들이 대량으로 생산·판매되는 것이지요. 모두 개성만으로 살아간다면 똑같이 생긴 제품들은 팔리지 않겠지요. 제주도민은 분명 다른 지역 사람들과 다른 문화와 생활방식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보편적인 삶의 방식은 크게 차이나지 않지요. 어쩌면 제주도민이 갖는 특수한 방식을 이해하는 것보다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방식으로 인간을 생각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인간을 정의하려고 하겠지요. 그래서 남의 집을 설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요. 인간의 삶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집을 마음대로 만들면 안 되니까요.

저는 집을 잘 설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주의 민가를 공부하고 조사해보았습니다. 몇 번 건축을 답사하다 보니 제주도라는 작은 지역에서도 동쪽과 서쪽이, 또 남쪽과 북쪽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건축은 지역과 관계없이 비슷하지만, 초가와 같은 목구조 집은 바람의 방향이나 물길의 흐름에 따라서 형태와 배치가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세세하게 여기서 나열할 필요는 없지만, 제게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옛집을 관찰한다고 해서 잘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주위에서 옛날에 그렇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때와 삶의 방식이 다르지 않느냐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건축공간에 담아내는 기술을 배워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 디자인을 위한 정보는 책과 인터넷으로 배울 수 있지만, 정작 좋은 집을 설계하기 위한 정보를 제가 얻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삶을 담는 그릇과 같은 멋진 집을 디자인할 수 있을까요.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얻는 건축 디자인에 관한 정보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지요. 또한 제가 제주의 민가를 살펴본 것도 역시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학문 역시 보편적인 지식을 추구하며, 책에서 서술하는 집도 많은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설계한다는 것은 특정의 단 한 명의 주인을 위한 특별한 집이어야 하는 것이니까,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늘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원하는 집을 ‘방은 3개고 면적은 30평 정도였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물론 여기에 매우 많은 정보가 이미 들어 있습니다. 방이 3개는 그만큼 가족 수가 많거나 제사 등으로 손님이 많을 수 있다는 의미고, 30평 면적에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공사비에 대한 생각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자신이 원하는 집을 이야기할 때 좀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방 3개를 원한다기보다 ‘집에 우리 부부와 중학생 남자애와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이 있는데, 아들은 공부보다 운동을 좋아하고 딸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준다면 더 좋겠습니다.


집을 설계할 때 처음에 어떤 집이 좋을지 몰라서 이런저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집을 디자인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도 할 수 있고요.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참 특이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그런 희망 사항이 잡담하는 가운데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경우도 많이 보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좋은 집을 설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일반적으로 주택설계를 위해 소요 시간을 대략 3개월을 고려하라고 말합니다. 대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느냐고 반문합니다.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저도 빨리 끝내고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회사 운영을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설계를 위해 대화하다 보면 그 정도 시간은 늘 필요합니다. 그것도 의뢰인이 놀랄까 보아 기간을 줄여서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서둘러서 후회하는 것보다 이참에 차분히 자기가 원하는 집이 어떤 집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야말로 집을 짓는 것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이니까요.

'건축사의 집 이야기'기사는 연재 시리즈로 매주 토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더보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