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의 집 이야기 11편, 좋은 집

조회수 2019. 11. 23. 09: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건축사의 집 이야기

양성필 건축사(건축사사무소 아키제주 대표)

     www.archijeju.com 064-751-9151

좋은 집

주거용 집을 설계할 때와 상업용 건축물을 설계할 때는 생각의 초점이 다릅니다. 상가나 호텔, 병원, 아파트 등을 설계할 때 우선 조건은 수익성입니다. 그래서 상업용 건축물을 설계할 때 건축주를 의뢰인보다 투자자라고 부릅니다. 즉, 건물을 짓는 이유가 자본을 투자해 그 이상의 이익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초 건축하는 목적이 거주를 위한 집과 다른 것이지요.


그러면 집을 설계할 때 무엇을 먼저 고민할까요. 당연히 의뢰인의 생활입니다. 집을 짓는 이유가 거기에서 살기 위한 것이니까요. 냉장고는 식재료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것이 목적이고, 집은 사람이 안락하게 생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만약 가동되지 않는 냉장고라면 아무리 디자인이 좋아도 가치가 없겠지요.


집을 디자인하는 데 필요한 생활정보를 담아내기엔 건축 관련 인터넷과 잡지는 매우 취약합니다. 생활을 사진으로 표현하기엔 어려움이 많거든요. 그리고 대개의 사진은 좋은 장면을 만들기 위한 연출이 많이 들어갑니다. 사진을 보고 감명을 받았는데 직접 찾아가 보면 기대와 다른 느낌 때문에 실망하는 경우도 적잖습니다. 그래서 요새 사진을 찍는 기술 못지않게 사진을 보는 기술도 많이 필요합니다. 사진이 실물을 사실적으로 전달한다는 생각은 정말 순진한 것이지요. 사진을 찍는 시간과 각도, 포커스를 잡는 것만으로도 같은 대상을 다른 느낌으로 만드니까요.


저는 좋은 집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시각적 정보의 비중을 크지 않게 봅니다. 사진이 아니라 실제로 그 집을 보고 예쁘다는 느낌을 받더라도 저는 그 집이 좋은 집이란 판단을 보류합니다. 외형이 좋은 집의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형태에 대한 저의 취향은 가급적 디자인하지 않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집이 좋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간혹 ‘평생 한 번 짓는 집이니 정말 예쁘고 멋있게 디자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의뢰인이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 집은 남들보다 더 멋있게 설계해 달라’고 하지요. 그럴 때 저는 요샛말로 시니컬하게 ‘저는 멋있는 집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답합니다. 저는 좋은 작품이라고 알려진 집주인에게 ‘보기에만 좋지 생활하기엔 영 불편하다’는 불만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놓고 말하자면, 그것은 실패한 디자인이지요. 보기에 좋은데 생활하기에 불편하다면, 그 집은 음식 재료를 보관할 수 없는 예쁜 냉장고와 같습니다.


좋은 집이란 생활에 편리한 게 우선해야 하지 않겠어요. 당연한 얘기라고요. 하지만 정말 생활에 편리하게 설계하기 위해 건축사에게 충분히 자신의 생활을 설명할 마음의 준비를 했나요. 그리고 건축사는 그런 생활 패턴을 듣고 설계에 반영하면서 디자인할 준비를 했나요. 그런 마음의 준비를 했다면, 멋있고 예쁜 집을 디자인해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좋은 집을 설계해 달라고 요구하기 바랍니다. 정말 다른 이야기이지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집은 특정 형태를 지향하지 않아요. 그게 조적조일 수도, 콘크리트조일 수도 있지요. 목조주택인데 좋은 집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요. 물론 제가 더 선호하는 구조가 있습니다. 하지만 꼭 어떤 구조를 선택해야 한다든가, 어떤 디자인을 지향해야 한다든가 하는 기준은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러면 좋은 집을 설계하는 것과 외형이 멋있는 집을 설계하는 것은 양립할 순 없을까요. 당연히 양립할 수 있으며, 기왕이면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굳이 이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데엔, 이 두 가지의 목표는 설계의 주체와 방법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바람에서입니다.


건축설계는 누가 하는 것일까요. 건축사가 승인한 설계도면만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당연히 건축설계의 주체는 건축사이지요. 건축물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할 때에도, 그 주체를 건축사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주위의 많은 건축주가 자기 건물을 자기가 설계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건축사는…,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서 그냥 도면만 그렸을 뿐인가요. 건축설계의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가.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작품성이 있는 집의 설계 주체는 대부분 건축사입니다. 작가란 타이틀에 그런 속성이 있지요. 저는 그 작가란 타이틀엔 좋은 집을 설계할 수 어렵게 만드는 함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사 본인의 집이 아닌 바엔 작가의 의지만으로 디자인해선 안 되는 것이 집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만들겠다는 데엔 디자인 주체가 작가라는 의지가 있으며, 그 작가가 누구이건 타인은 소외될 가능성이 높지요. 그 집의 설계 주체가 건축사라면 의뢰인이, 또는 의뢰인 스스로 자기 집을 작품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면 건축사가 소외되겠지요. 그것은 좋은 집을 설계하기 위한 적절한 방식이 아닙니다.


건축사와 의뢰인은 서로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의뢰인은 자기 집의 평면구성과 동선계획에 더 깊이 고민할 수 있고, 건축사는 보편적인 해법과 형태 디자인에 접근하는 데 더 깊이 고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건축설계 과정에 기본적으로 의뢰인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운전으로 치자면 핸들을 처음 잡아 본 이에게 난해한 모든 코스를 직접 운전하라고 맡길 순 없지 않을까요. 누군가가 술을 많이 마시고 대리운전기사를 불렀어요. 핸들은 운전을 잘 하는 대리운전기사가 잡고, 코스는 길을 잘 아는 집주인이 가르쳐줘야 하지요. 아무리 술이 떡이 됐어도 집에 가려면 핸들을 맡겨놓고 잠이 들어선 안 됩니다. 집을 구상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집을 완성하려면 의뢰인이 설계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뢰인이 직접 전적으로 설계하려는 것은 초보운전만큼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이 조합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운전을 잘 하는 운전기사입니다. 당연히 옆에서 운전도 못 하는 취객이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고 하면 운전도 잘할 수 없고 불편하지요. 하지만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손님이 가려는 곳으로 운전해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제아무리 디자인 능력이 뛰어난 건축사라도 의뢰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설계할 순 없습니다. 설계를 업으로 하는 제가 방 세 개에 욕실 하나인 30평형 주택을 설계해 달라는 요구에 쓱싹쓱싹 설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요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정도의 요구만으론 정말 자기 집을 가질 수 없어요. 대량생산된 아파트와 다른 자기 집을 가질 기회를 그렇게 쉽게 놓쳐선 안 됩니다. 이제 좋은 집을 설계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집을 메모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스트 드라이버에게 그 집으로 가자고 요구하기 바랍니다.

'건축사의 집 이야기'기사는 연재 시리즈로 매주 토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더보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