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건축사의 집 이야기 9편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⑵

조회수 2019. 11. 9. 09: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건축사의 집 이야기

양성필 건축사(건축사사무소 아키제주 대표)

     www.archijeju.com 064-751-9151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집을 짓기 위한 계획인 도면은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수정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도면대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은 집을 짓는 과정에서 필요한 변수를 생각지 않은 것이지요. 도면에 명시된 재료를 변경하기 위해 도면과 달리 시공하겠다는 주장은 현장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주장이 합리적일 때, 그것을 쉽게 수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해법이 아닌 디자인과 관련된 문제는, 누가 제안하더라도 판단 권한은 건축사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엉뚱하게도 공사의 편이만을 위해 디자인을 변경해 달라고 건설사에서 요청한다면, 그것은 좋은 기술자의 태도가 아니지요. 


최근 제가 감리하는 현장에서 외장재인 징크를 화강석으로 바꿔 달라는 시공자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시공자의 주장은 해안가에 짓는 건물은 바람을 많이 받으므로 징크가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디자인한 설계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주 해안에 징크로 마감한 많은 건물이 아직 무사한 것은 잘 시공했기 때문인데, 시공하기 불편해서 그런 요청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둘 모두의 주장에 합당한 이유와 경험적 지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자가 단지 시공상의 편이를 위해 디자인을 변경해 달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입니다. 반면, 기술적으로 더 뛰어난 공법이 있다면, 디자인을 변경하도록 제안하는 것은 기술자의 역할입니다. 징크 마감이 견고하지 못해서 하자가 염려된다면 도면보다 더 강하게 바탕 틀을 작업하겠다거나, 강성을 더 높이도록 징크의 조립 방향을 변경하겠다는 것 등입니다.


분명 설계자는 그 건물을 디자인하기 위해 수개월 고민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징크를 외장재로 선택할 때, 그 재료에 어울리는 외형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외장재를 징크에서 화강석으로 바꾼다는 것은 건물 디자인을 전체적으로 다시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아마 연애 시절 연인을 만나러 갈 때 남방셔츠와 바지의 색상을 맞춰 입고 어떤 모자를 쓸까 하고 전신거울 앞에 섰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바지와 남방셔츠, 모자, 안경 이런 것들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징크로 설계한 지붕을 비용상의 이유로 기와로 바꿔 달라고 하면 설계자들은 곤란해합니다. 그 건물의 형태와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디자인의 문제이지요.

이런 식의 논쟁은 공사 현장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왜, 도면대로 시공하지 않고 현장에서 바꾸려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도면은 계획이고 현장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기술 문제, 비용 문제, 혹은 대지 여건 등이 구체화됩니다. 계획을 세울 때 가장 현실에 가깝게 구상하면 좋겠지만 쉽지 않습니다. 건축사는 상상의 공간을 도면과 수치로 표현한다면, 기술자는 도면과 수치로 표현된 공간을 구체적인 사물로 만듭니다. 건축사가 도면으로 그리는 게 귀찮다고 의뢰인의 상상과 꿈을 포기하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기술자는 시공하기 불편하다고 디자이너에게 도면을 포기하거나 바꾸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계에는 디자인설계와 기술설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건축사사무소의 업무는 그것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합니다. 건축사는 디자인설계를 교육받은 사람이지 기술설계를 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종 건축사가 그런 기술적인 것도 모르냐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것을 건축사가 이해해야만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설계의 기술적인 부분을 현장에서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여건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목조주택은 설계하지 않습니다. 디자인을 못 해서는 결코 아닙니다. 그것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기술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술적인 지식이 없어서 설계를 못 한다고 말해야 하는 현실이 저는 매우 불만스럽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디자이너가 기술적인 지식까지 전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이나 현장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기술을 적용해서 설계하는 것이 제게 부담스럽고 무책임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공기술자 중에 도면대로만 시공하면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장에서 기술적인 문제는 시공자가 책임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현실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요.


디자인설계와 기술설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건축사도 기술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책임지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때로는 창호를 선택하고 도면화할 때 어떤 제품이 좋은지, 또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건축사 고유의 업무는 그런 기술적인 지원이 아닙니다. 건축사가 설계 경험이 많다고 해도 기술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는 역시 시공자가 전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쉽습니다.


그러면 디자이너인 건축사는 무엇을 잘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보지요. 식탁과 텔레비전, 침대를 선택하는 것도 집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입니다. 어떤 식탁을 설치할지 고민하는 것이 건축사의 일일까요. 하지만 그것들은 공사하면서도 얼마든지 선택하거나 바꿀 수 있고, 굳이 건축을 계획하면서 어떤 제품을 쓸지 고민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건축사와 의논해서 결정할 것은 텔레비전의 위치입니다. 그에 따라 콘센트나 전등의 위치가 달라지며, 현관과 주방의 위치도 영향을 받습니다. 침대의 위치는 안방 화장실과 드레스룸 위치에 영향을 줍니다. 침대의 위치 정도야 현장에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른 공간의 배치에 영향을 주기에 쉽지 않습니다. 화장실 입구의 스위치 하나 때문에 붙박이장을 설치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건축사의 디자인설계가 중요한 이유이지요. 건축사의 디자인 설계는 제품 디자인처럼 외형을 디자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보통 계획한다고도 하고, 프로그램한다고도 하는데 무형의 생활 패턴들을 형상화하는 일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건축사와 주로 무엇을 의논해야 할까요. 건축사와 논의하고 해결할 문제는 주로 공간과 형태의 계획적인 측면입니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지, 집을 어떻게 형상화할지, 생활 패턴과 기능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지 하는 등의 문제입니다.

의뢰인의 생활 패턴을 이해하지 못할 때 건축사는 설계의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의뢰인은 자신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건축사는 디자인설계를 위해 의뢰인과 많이 대화합니다. 최근 150평 규모 단독주택을 설계한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렇게 큰 집에서 살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계한 주택들은 대개 30평 정도 규모고, 저 역시도 20평 내외의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하는데, 건축사가 의뢰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설계가 정말 어렵습니다. 때문에 의뢰인은 건축사에게 자신의 생활방식을 친절하게 알려줘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주택을 설계했어도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건축사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의 주택을 설계하는 데 여러 가지 질문을 받습니다. 거기에는 엔지니어의 지식을 요하는 내용도 있고, 디자이너의 지식을 요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현실은 건축사가 그 두 가지의 지식을 모두 겸비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건축을 공과대학에 포함시킨 일본에서는 건축사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다시 세분화한다고 합니다. 주택설계전문가, 병원설계전문가, 숙박시설설계전문가가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설계 분야를 세분화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건축사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겸비하는 데 부담이 덜 하겠지요.


무엇을 물어도 명확하게 대답해 줄 수 없는 현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건축사의 과욕이 부른 것이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좋은 디자이너로서 건축사가 되고 싶습니다. 현실적으로 건축 디자인 과정에서 기술설계자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할 일이 많음에도 아직은 엔지니어의 인프라가 건축 분야에서는 부족하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듯합니다.

'건축사의 집 이야기'기사는 연재 시리즈로 매주 토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더보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