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영원하다, 할리우드 고전 미인 배우

조회수 2021. 4. 6.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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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

할리우드 역사 속엔 수많은 배우들이 기록되어 있다. 많은 미디어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의 외모와 연기력을 칭송하며 그의 이름을 띄우지만 이내 다른 스타가 나오면 가라앉고 만다. 스타의 인기란 터질 듯이 부풀었다가 시간 앞에 수그러들고 마는 게 마치 풍선과도 같다. 이러한 시간의 속성을 거스른 존재가 바로 ‘고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그들은 이름 자체로 시대의 상징이다. 존재는 사라졌어도, 가치는 기억된다. 오늘은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대단했던 여성 고전 배우들을 소개한다. 여기에 싣진 못했지만 내 마음을 훔쳤던 할리우드 고전 배우들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그레타 가르보
1905년, 스웨덴

1920~30년대 무성영화 시절 데뷔한 그레타 가르보는 북유럽의 차갑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대중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 현재 유명 여배우를 통칭하는 ‘은막의 여왕’이란 단어는 그의 타이틀 중 하나였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과도기, 목소리와 발성의 장벽을 넘지 못해 수많은 무성영화 스타들이 은퇴했으나 가르보는 우려가 무색하게 유성영화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의 서늘한 외모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기 때문에 그는 무난하게 유성영화 시대에 안착할 수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1935)

“가르보가 말한다.”(Garbo Talks). 영화 <안나 크리스티>의 광고 문구였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할 만큼 그의 인기는 신화에 가까웠다. ‘스웨덴의 스핑크스’ ‘신비로운 이방인’으로 불리며 16년간 28편의 영화를 찍은 그의 앞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30대, 그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배우를 그만둔 뒤, 잘 알려진 것처럼 가르보는 50년 동안 혼자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랜드 호텔>에서 그가 읊조렸던 대사 “혼자 있고 싶어요”를 지키기라도 하듯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어디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고 완벽히 군중 속으로 존재를 감췄다.

<그랜드 호텔>(1932)
<육체와 악마>(1926)

엘리자베스 테일러
1932년, 영국

가르보의 뒤를 이은 할리우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테일러다. 가르보가 1930~40년대의 여왕이라면, 테일러는 1950~60년대를 풍미했다. 아역배우로 일찍이 연기를 시작한 그는 특유의 관능미로 자연스럽게 성인 배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묘하게 보랏빛을 띤 눈동자와 풍성한 속눈썹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이 덕분에 그는 또래보다 성숙한 이미지를 낼 수 있었다. 그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원숙한 연기력을 선보여 16살에 성인 연기를 해내기도 했다.

<최고의 사랑>(1952)

여전히 아름다움의 교과서로 불리며 외모로 한 시대를 휩쓴 그에게 남성의 구애는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여덟 번 결혼하며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을 보냈다. 화려한 보석과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인생이었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뿐이었어요.” 찬사 속에 살았어도 외로웠던 그의 인생이 보이는 말이다. 실제로 그는 말년에 독신으로 살며 생을 마감했다.

<지난 여름 갑자기>(1959)
<클레오파트라>(1967)

비비안 리
1913, 영국

영원한 스칼렛 오하라. 비비안 리는 전설적인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완벽하게, 동시에 매력적으로 소화해 내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단 하나의 배역으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예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도하고 어쩌면 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스칼렛 역을 미워할 수 없도록 연기했다. 그의 연기는 캐릭터의 빈틈을 메웠고, 관객들은 스칼렛 오하라에게 열광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57)

비비안 리는 미의 아이콘이 되기보다는 철저하게 배우이길 바랐다. 스타보단 배우로서 인정 받고 싶었던 비비안 리는 1951년 말론 브란도와 함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며 다시 한 번 세계적인 배우임을 입증해 보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이미 한 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저명한 평론가 폴린 카엘은 그의 연기를 두고 “연민과 공포를 자아낼 만큼 보기 드문 연기력을 펼쳤다”며 극찬했다.


마릴린 먼로
1926, 미국

마릴린 먼로가 사망한지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모르는 이는 없다. 단순한 배우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이 된 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자, 섹스 심벌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무수히 많은 배우들이 그의 이미지를 차용했지만 원본을 뛰어넘는 이는 없었다. 아마 섹스 심볼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마릴린 먼로일 것이며, 이는 그가 등장했을 때 이미 정해진 것이다.

<러브, 마릴린>(2012)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에서 나온 백치 금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소비되었지만, 실제로 그는 흑인 인권 운동이 본격화 되기 전부터 인종차별에 반대하던 지식인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하는 마릴린 먼로에게 기자들이 비웃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철자는 압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저는 제가 말하는 단어의 철자는 하나도 모른답니다”라며 그의 무례함을 꼬집었다. 그는 계속해서 변화를 시도했으나 세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여전히 섹스 심벌의 아이콘이었다. “세상은 나를 상품으로만 여긴다”라는 말을 남긴 채, 그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오드리 헵번
1929, 영국

한국이 가장 사랑하는 할리우드 고전 배우 하면 오드리 헵번이 아닐까.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피아 로렌과 같이 육체미를 강조하던 1950년대에 돌연 여린 요정 같은 배우가 나타났다. 대세와는 다른 단아한 아름다움을 강조한 그의 등장은 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그가 영화속에서 선보였던 패션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재해석되며 많은 패션 피플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데, 특히 <사브리나>(1954)에서 보여줬던 지방시 룩은 그 자체로 하나의 패션 트렌드가 됐다. 덧붙여, 특정 브랜드의 의상을 협찬하는 일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마릴린 먼로와 같이, 또 다르게 시대의 아이콘이 된 그는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혼은 그대 곁에>에서 천사 역을 맡은 이후 영화계를 완전히 떠났다. 이후 그는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인도주의자로서 활동했다. 암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로 떠나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사브리나>(1956)
<로마의 휴일>(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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