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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도 반했다는 이탈리아 영화?

조회수 2020. 11. 18.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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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이탈리아 영화 <마틴 에덴>이 개봉 2주 차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며 절찬 상영 중이다.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하며 동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로 추앙받는 피에트로 마르첼로(Pietro Marcello) 감독의 작품이 한국에서 처음 개봉한 것.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중심으로 <마틴 에덴>을 소개한다.


이탈리아의 차세대 명장 ,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

배우 루카 마리넬리,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

<마틴 에덴>은 이탈리아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두 번째 극영화다. 2004년 데뷔한 그는 오랫동안 다큐멘터리 작업에 열중해왔다. 몇 개의 짧은 다큐멘터리를 만든 마르첼로는 기차로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만난 사람과 풍경을 담은 첫 장편 <선로의 길>(2007)을 발표했다. 제노아 교도소에서 장기복역 하고 출소한 한 남자의 일상과 트랜스젠더 연인과의 사랑을 따라가는 <늑대의 입>(2009)을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르첼로가 처음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가로지르는 접근을 선보인 작품이었는데, 이런 방향을 택한 많은 경우가 공간의 리얼리티를 획득했다면 <늑대의 입>은 그 효과가 공간을 넘어 감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갔다. 


아르메니아 감독 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Artavazd Peleshyan)에 관한 다큐멘터리 <펠레시안의 침묵>(2011)을 내놓은 지 4년 후, 마르첼로가 처음 픽션을 표방한 작품 <상실과 아름다움>(2015)이 세상에 나왔다. 마르첼로 홀로 각본을 담당했던 전작들과 달리 아벨 페라라, 마테오 가로네 등과 작업해 온 작가 마우리치오 브라우치(Maurizio Braucci)와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삶과 죽음의 중재자가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의 선한 양치기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어린 물소를 구해 북쪽으로 향한다는 이야기. 제목 그대로 상실과 아름다움을 은유한 우화와 이탈리아 전원의 풍광이 만나 독보적인 아우라를 내뿜는 걸작이다. (내년 상반기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마르첼로/브라우치 콤비가 다시 만난 최신작 <마틴 에덴>은 보편적인 극영화의 방향을 택해 한결 수월하게 마르첼로의 작가적 야심을 가늠할 수 있다. 마르첼로는 <마틴 에덴>에는 <선로의 길>, <늑대의 입>, <펠레시안의 침묵>, <상실과 아름다움>이 모두 들어 있다고 밝혔다.

출처: <마틴 에덴>

잭 런던의 원작

<마틴 에덴>과 잭 런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사회주의 작가 잭 런던(Jack London)의 후기 대표작 <마틴 에덴>(1909)을 영화로 옮겼다. 비천한 선원 마틴 에덴이 부유한 집안의 딸 루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글을 쓰지만 결국 계급간의 모순을 마주하고 좌절하게 된다는, 잭 런던의 자전적인 경험이 담긴 소설이다. 마우리치오 브라우치는 소설 <마틴 에덴>을 "우리의 이야기"라며 피에트로 마르첼로에게 소개해줬고, 그로부터 근 20년이 지나 영화 <마틴 에덴>이 탄생하게 됐다.


영화는 원작과 다른 노선을 택한다. 이제 막 20세기에 들어선 미국 오클랜드를 배경으로 한 원작의 설정은, 컬러TV는 있되 모든 연락이 편지로만 이루어지는 시대를 종잡을 수 없는 이탈리아 나폴리로 옮겨갔다. 주인공 마틴에게 사랑과 좌절을 선사하는 루스는 엘레나가 되었고, 루스의 이름은 마틴의 재능을 유일하게 알아보고 북돋아 준 중년의 사내에게 붙여졌다. 계급으로 인한 사랑의 균열을 그리는 뼈대는 비슷하지만, 사랑과 세속적인 성공보다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인정 욕구에 더 무게를 싣고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 문제를 덧붙이면서 잭 런던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 ,
배우 루카 마리넬리

이탈리아 배우 루카 마리넬리(Luca Marinelli)가 영화의 주인공 마틴 에덴을 연기했다. 마틴 에덴은 입체적인 인물이다. 멀끔하지만 내세울 건 몸 밖에 없는 가난한 선원인 마틴 에덴은 노동을 겸하면서 길고 지난한 습작기를 거쳐 곧 세상이 주목하는 작가로 성장하지만 내면으로는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루카 마리넬리는 마틴의 두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서 지식인이 되어 가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세세히 소화했다. 누구라도 처음 보면 잘생겼다고 느낄 만한 수려한 미모를 보여주고, 부르주아 집안에서 고급 교육을 받아 예술에 교양을 가진 엘레나를 (짝)사랑하고, 글깨나 읽었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나눴던 이를 무시하고, 가난과 부르주아의 냉대를 견디며 창작욕을 불태우고, 스스로 개인주의자임을 주장해왔지만 세간엔 사회주의자로 오해받거나 정작 사회주의자들로부터는 환대받지 못했던 마틴 에덴의 순간순간을 아우르는 명연. 2019년 베니스 영화제는 <조커>(2019)의 호아킨 피닉스가 아닌 루카 마리넬리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여하면서 그의 빼어난 연기에 찬사를 바쳤다.

2019년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마리넬라
출처: <레인보우: 나의 사랑>

연극 무대에서 경력을 쌓고 2010년 <소수의 고독>으로 영화 작업을 시작한 마리넬리는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로맨스, 코미디, SF, 액션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행보를 선보였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레이트 뷰티>(2013)와 파올로 타비아니 감독의 <레인보우: 나의 사랑>(2017) 정도가 한국에 개봉된 마리넬리의 출연작이다. FX의 TV 시리즈의 <트러스트>(2018)에 출연하면서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는 지난 여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올드 가드>(2020)를 거치면서 활동 반경을 활짝 넓혔다. 이탈리아의 유명 만화를 영화화한 <디아볼릭>(2020)이 오는 연말 개봉 예정이다.

출처: <올드 가드>

파운드 푸티지의 과감한 배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걸친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작법은 비단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경유해 픽션을 구현해내는 수준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사내가 "...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 만하다. 왜냐하면 감옥을 짓는 자는 자유를 쌓는 이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라고 녹음하는 첫 신을 지나면, 노이즈 가득한 파운드 푸티지 화면들이 이어진다.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의 아버지 격의 존재이자 마르첼로에겐 레닌과도 같은 혁명가 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가 1921년 활동하던 모습이 담긴 자료화면이다. 마르첼로는 바로 전 목소리를 녹음하던 남자가 누구인지 이 신이 언제 어디를 배경으로 하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에리코 말라테스타가 찍힌 푸티지를 배치함으로써 <마틴 에덴>이 20세기 초 이탈리아를 배경 삼아 지극히 정치적인 메시지를 내포할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은밀히 드러낸다.


영화 내내 속속들이 자리한 푸티지의 활용은 더 방대하다. 마틴이 거리 곳곳을 돌아다닐 때 그 상대숏의 자리에 종종 파운드 푸티지들이 배치돼, 새로운 촬영분으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을 시대와 장소의 공기가 불어넣어진다. 엘레나에게서 받은 보들레르의 책을 들고서 예술과 사랑의 에너지에 흠뻑 취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이어지다가 문득 인형을 안은 아이를 기록한 푸티지가 끼어들 때, 출처가 다른 두 숏은 자연히 하나의 신이 된다. 이와 같은 연결을 통해 마르첼로가 <상실과 아름다움>에서도 사용한 16mm 필름의 질감이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마르첼로는 <마틴 에덴> 제작 과정 가운데 두 명의 편집자와 함께한 편집할 때 가장 아드레날린이 샘솟았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심정의 은유로도 작용한다. 마틴이 스승과도 같은 루스의 죽음을 마주하고 벌판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면, 관객은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배를 마주한다. 그렇게 선원인 마틴의 세계는 무너지고, 그냥 훌쩍 시간을 점핑해, 작가로서 성공했지만 영혼은 완전히 망가진 마틴이 곧장 따라붙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마틴 에덴>은 마틴의 성공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마틴이 어떻게 파괴되었는가를 파고들 뿐이다.


봉준호의 지지

올해 초 봉준호 감독은 영국을 대표하는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의 창간 83년 사상 최초의 게스트 편집장으로서 2020년 3월호를 만들었다. 특히 주목을 받은 기획은, 봉준호가 선정한 '다음 20년이 기대되는 감독 20명'의 리스트였다. <유전>(2018)의 아리 애스터, <아사코>(2018)의 하마구치 류스케, <팔로우>(2014)의 데이빗 로버트 미첼, <겟아웃>(2017)의 조던 필, <행복한 라짜로>(2018)의 알리체 로르바케르 등과 함께 피에트로 마르첼로도 그 명단에 속했다. 특히 마르첼로 소개 글엔 유일하게 <마틴 에덴>이 '지난 10년의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찬사가 포함됐다. <마틴 에덴>에서 마르첼로가 이뤄낸 미학적 성취에 대한 반응이겠지만, 봉준호의 최신작 <기생충>이 계급 간의 선은 절대 넘을 수 없다는 결단으로 내달리는 영화였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그의 지지는 더욱 남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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