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범의 자백, 이제 완전히 막을 내린 <살인의 추억>

조회수 2020. 11. 9.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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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

모두가 이 영화를 극찬했다. 국내외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한국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로 삼았고, 관객들 또한 이 영화를 흥행작의 자리에 올렸다. 2000년대 한국 영화 베스트 순위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한 이 영화. 그러나 영화 속 악인은 말한다. "아무 느낌 없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첫 살인 이후 34년 만에 법정에 선 진범 이춘재는 그렇게 말했다.

2020년 11월 2일, 수원지법에선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가 법정에 섰다. 별도의 살인 사건으로 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이춘재는 2019년 9월 18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자 동년 10월 1일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해 자백했다. 공소시효가 만료한 시점이었으나 지난 30여 년간 끊임없이 사회적 파장을 남긴 미공개 사건의 진범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이춘재의 자백과 함께 다시 화제에 오른 건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용의자가 특정 지어지고 사건의 명칭도 바뀌었다)을 추격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살인의 추억>은 김광림 희곡 '날 보러 와요'를 토대로 미궁 속에 빠진 사건과 두 형사의 관계 변화,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의 단면을 배합했다. 그 결과, 앞서 말한 것처럼 명작이자 500만 관객 돌파 흥행작으로 남았다.

지난 2일 재판에서 <살인의 추억>이 언급되면서, 사건과 이 영화, 실제 이춘재로 오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실제와 우리가 아는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냥 평범했어요"라는 대사에서 이제야 진짜로 막을 내린 <살인의 추억>을 다시 꺼내 들어보자.


연극 <날 보러와요> 20주년 공연 포스터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

1986년 9월 15일,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1차 사건이 벌어졌다. 마지막 10차 사건은 1991년 4월 3일에 일어났다. 작가 김광림은 1996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극으로 옮긴 희곡 <날 보러와요>를 발표했다. 이를 영화로 옮긴 <살인의 추억>은 2003년 4월 25일 개봉했다. 진범 이춘재는 2019년 10월 1일, 범행을 자백했다.


<살인의 추억> 첫 사건(위)과 마지막 사건

<살인의 추억>은 오프닝의 첫 희생자부터 마지막 희생자까지 총 6번의 사건이 그려진다. 실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0차까지 존재한다. 영화 속 사건은 각각 2차, 3차, 4차, 6차, 7차, 9차 사건의 모티브를 가져왔다. 이춘재는 10건의 연쇄살인 외에 4건의 살인과 30여 건 강간 및 강간 미수를 자백했다. 그는 1994년 1월 13일, 이른바 '청주 처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극 중 언덕 위의 여성이 진범에게 강간을 당했으나 얼굴을 보지 않아서 살아남았다고 묘사한다. 피해 여성은 "손이 여자처럼 부드러웠다"고 회상한다. 이는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화성에서 연쇄 강간 사건이 있었고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손이 부드러웠다"고 진술한 것에서 따왔다.


첫 번째 용의자 백광호(박노식)
두 번째 용의자 조병순(류태호)
마지막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영화에서 용의자는 총 3명. 백광호, 조병순, 박현규. 사건 조사 당시 더 많은 용의자가 있었으나 원작 희곡 '날 보러와요'에서 3명의 용의자가 등장한 것을 반영했다.

영화 속 용의자들은 유력 용의자 취급받은 실제 인물들의 특징을 가져왔다. 백광호는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고 풀려난 이후 후유증으로 자살한 인물을, 박현규는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인물을 모티브로 삼았다.


영화는 최종 용의자로 지목된 박현규에게 심증이 가도록 설계됐지만 봉준호 감독은 박현규를 진범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은 무고한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에 박현규 역 배우 박해일에게도 '진범이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연기하도록 했다. 다만 피해자의 회상 장면은 피해자의 시점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박해일이 진범 역할을 연기했다.


<살인의 추억>에선 진범이 강박에 가까운 성격으로 암시했다. 피해자가 모두 빨간 옷을 입은 것, 사건 날에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신청곡으로 나오는 것. 그러나 이런 특징은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으로 사건 당시엔 사건을 감지할 만한 특징이 일절 없었다. 빨간 옷을 입은 피해자가 여럿 있었을 뿐, 그것이 진범의 강박으로 보기엔 일관성이 없었다. 또한 영화 속 피해자가 젊은 여성이었던 것에 반해, 실제 사건의 피해자는 13세부터 72세까지 다양한 연령이어서 사건을 특징지을 만한 부분이 없었다.

당시 화성에 사는 25세~35세 남성 전부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다. 약 2만 1천여 명이 조사를 받았으며 이춘재 또한 다섯 차례 조사를 받았다. 하나 혈액형과 현장 발자국이 일치하지 않아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지 않았다.


연쇄살인이 거듭되면서 경찰 측은 사건 해결의 시급성을 통감했다. 그래서 DNA 수집 및 분석 수사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그러나 혈액형을 특정 짓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오류가 났다. 이춘재는 O형인데, 당시 검사 결과 B형으로 판명됐던 것. 과학 수사 초기에다 수사 자체가 오래전이니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지만 1. 표본 선택을 잘못했다 2. 올바른 표본이었으나 손상됐다 3. 결과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와전됐다 등 여러 가능성이 존재한다. 당시 실시한 체모 검사가 혈액 검사보다 정확도가 떨어진 것도 일조했다. 다만 당시 수사를 맡은 경찰들은 애초 B형으로 '확정'지은 바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춘재 또한 조사를 받은 용의자로 체모 검사를 2회 받았다. 1차 검사는 B형으로 나왔으나, 2차 검사에서 O형으로 나와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이 때문에 B형 남성을 용의자로 수사를 진행해 범인을 체포한 8차 살인 사건은 이춘재가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8차 살인 사건에서 진범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를 이춘재가 밝히면서, 8차 살인 사건도 이춘재의 범행으로 밝혀졌다.


8차 살인 사건은 그동안 '모방 사건'으로 지정됐었다. 또한 해당 DNA 분석과 현장 수사로 화성 연쇄살인 중 유일하게 진범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8차 사건의 용의자로 무기징역을 받은 윤성여 씨는 20년형으로 감형 받고 출소한 직후 "경찰의 강압 수사에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춘재의 자백을 시작으로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가 과학수사연구소의 허위 감정도 드러났다. 윤 씨는 2020년 8월, 신상을 공개하고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난 시점은 7차 사건 이후. 조암에서 수원을 오가는 버스의 운전기사와 안내양이 당시 수상한 탑승자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해당 남성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버스를 태워달라고 손짓했으며 바지의 하단과 신발이 흠뻑 젖어있었다. 이에 버스 기사는 수상함을 느끼고 그를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이춘재는 현재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특정된 10건의 살인을 모두 자백했다. 그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사건 증거가 전무한 1차 사건과 폭우로 현장 보존이 불가능했던 6차 사건, DNA에 검출되지 않은 10차 사건은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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