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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미가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기까지

조회수 2020. 10. 19.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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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소설가 정세랑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 지난 9월 25일 공개됐다. 주인공 안은영 역의 배우 정유미는 작년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영화화 한 작품에도 주연을 맡은 바 있다. 근래 한국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두 소설의 영화화 한 작품을 정유미 한 배우가 연기했다는 건 꽤나 의미심장하다. 정유미가 지난 16년간 거쳐온 영화들을 되짚어 봤다.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의 선아

2004년 공개된 화제의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정유미라는 보석을 한국영화계에 선사했다. 반나절 만에 찍은 6분 짜리 소품. 짝사랑 하는 선배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 작동법을 배우는 이의 떨림이 고스란히 담긴 맑은 얼굴은 단숨에 눈밝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정유미의 서울예대 영화과 선배였던 김종관 감독은 과 모임에서 유독 수줍음을 많이 타던 정유미의 모습을 보고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달콤한 인생>(2005)의 미애

워낙 비중이 낮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정유미는 <달콤한 인생>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희수(신민아)의 친구 역. 선우(이병헌)이 남기고 간 선물을 전해주며 "이거야, 그 사람 이것만 놔두고 가버렸어" 대사 한 마디를 남긴다. 미쟝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이었던 김지운 감독이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좋게 보고 곧장 캐스팅 했다고.


<사랑니>(2005)의 조인영

정지우 감독은 <은교>(2012)의 김고은, <4등>의 박해준 등 범상치 않은 신인을 알아보고 그 재능을 더욱 빛나게 한 바 있다. 그 시작은 <사랑니>의 정유미였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설렘을 한껏 밀어붙여, 사랑의 열병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는 17살 조인영의 펄떡이는 마음을 구현했다. 정유미를 바라보는 카메라가 시종일관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인영의 감정을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가족의 탄생>(2006)의 채현

정지우만큼이나 미세한 감정을 포착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김태용 감독 역시 정유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고두심, 문소리, 공효진, 김혜옥 등 쟁쟁한 배우들 가운데서 정유미는 막내 경석(봉태규)의 여자친구 채현을 연기했다. 세상 어떤 사람과도 잘 지낼 것 같은 친화력 덕분에 경석과 사귀게 되지만, 바로 그 넓디넓은 친절함으로 인해 멀어진다. 애인의 걱정도 헤아려지긴 하지만, 제 삶의 방식을 덜어내고 싶지 않은 사랑스러운 캐릭터. "헤픈 거 나쁜 거야?"라고 묻는 채현의 분방한 태도는 영화가 제시하는 가족의 대안적인 형태를 가능케 한다.


<좋지 아니한가>(2007)의 하은

똑 부러지지 않은 말투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정유미의 초기 캐릭터와 달리, 하은은 매사 확신을 가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가정 형편 때문에 원조교제를 하고, 비 오는 날 밤 구해준 심창수(천호진)를 원조교제 범죄자로 몬다는 설정이 꽤나 위태로워 보이지만, 대쪽같은 정유미의 얼굴이 그 불편함을 얼마간 사그라트린다. 현실적으로 가장 연약해 보이는 소녀 하은을 연기하면서 정유미의 캐릭터는 순수의 틀을 벗어났다.


<그녀들의 방>(2008)의 구언주

첫 드라마 <케 세라 세라>로 연기 활동의 또 다른 측면을 경험한 정유미는 잠시 휴지기를 가진 후, 한국영화 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제작된 <그녀들의 방>에 출연했다. 철저히 정유미와 예수정 두 여성배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작품이다. 고시원에 살며 총무 업무를 보는 언주(정유미)는 학습지 교사로 방문한 집에서 홀로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중년여성 석희(예수정)를 만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을 영위하는 두 주인공의 일상은 팍팍하지만, 그들이 석희의 집에서 만나 쌓아가는 우정은 잠시나마 희망을 안긴다. 웃음기라곤 없는 영화 속에서 정유미의 얼굴 역시 건조하기만 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의 유신

홍상수는 정유미에 대한 편애를 꾸준히 드러내온 감독이었다. 그 시작은 제천과 제주도에서 펼쳐지는 여름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다. 영화감독인 주인공 구경남(김태우)이 제천에서 만나는 후배 부상용(공형진)의 아내 유신 역을 맡았다. 기분좋게 취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경험에 대해 늘어놓던 유신은 "여자를 밝히는" 구경남의 리비도를 보여주는 대상이 된다.


<차우>(2009)의 변수련

<차우>는 정유미의 첫 장르영화다. 스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넓혀야겠다고 판단해서 택한 방향이었다. 정유미 자신인 채로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카메라는 그걸 따라갔던 전작과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는 작품인 셈. 식인 멧돼지와 맞서는 5인조 추격대 중 동물 생태 연구가 변수련은 멧돼지 연구에 성공해 교수가 되겠다는 일념 하에 조직에 합류한다. 부스스한 머리에 치아교정기를 착용하는 등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와이어 액션까지 직접 소화하는 등 처음 경험하는 과정들을 거쳐 만화적인 캐릭터를 만들었다.


<카페 느와르>(2009)의 선화

이름난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감독 데뷔작 <카페 느와르>에 신하균, 문정희, 김혜나, 요조 그리고 정유미를 캐스팅 했다. 3시간18분에 달하는 영화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고, 정유미는 후반부에 등장한다. 주인공 영수(신하균)가 청계천 가에서 위협으로부터 구해주는 선화를 연기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원작 삼아 문어체로 구사하는 대사와 더불어, 10분 동안 독백을 이어가는 무시무시한 롱테이크도 소화했다. 정성일 감독은 선화를 가능케 하는 배우는 지구상에서 정유미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써내려 갔다고.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의 세진

JK필름이 제작한 <내 깡패 같은 애인>은 정유미와 박중훈이 호흡을 맞춘 로맨틱코미디다. 깡패와 취업준비생의 아기자기한 로맨스에 더해, 정유미가 연기한 세진을 통해 취업의 벽에 부딪혀 힘겨워 하는 당대 20대의 초상까지 담아낸 잘 만든 대중영화다.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지만, 각박한 처지에 주눅들다 사랑으로 점차 자존감을 찾아가는 정유미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박중훈의 다혈질 깡패 연기가 만드는 합이 주는 울림이 상당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2010)의 은희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의 첫 장편. 5개의 짧은 사랑 이야기를 엮은 옴니버스 영화다. 정유미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 윤계상과 헤어진 연인을 연기했다. 다짜고짜 현오(윤계상)의 차에 탄 은희(정유미)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키다가 "난 너 용서 안 할 거야. 너, 내 인생 망가트렸으니까" 라고 운을 떼며 저주의 말들을 퍼붓는다. 아이라인을 까맣게 칠한 정유미는 비 내리는 밤의 차 안, 카페, 비가 그친 거리에서 지난 연애에 대한 질척이는 말들을 늘어놓고, 윤계상은 거기에 괴로워 하는 반응을 보이는 식이다. 많은 관객들이 다섯 이야기 중에서도 이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연애담에 특히 많은 공감을 보였다. 정유미는 6년 후 김종관의 또 다른 옴니버스 <더 테이블>에서도 한 파트를 차지했다.


<도가니>(2011)의 서유진

무진의 청각장애학교 학생들이 학대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공지영의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 정유미가 연기한 서유진은 신입 미술교사 인호(공유)를 도와 아이들을 위해 투쟁하는 인권센터 간사다. 아이들에게 가해진 고통이 너무나 끔찍한 실화를 다룬 영화라 톤은 물론 인물들도 대개 어둡기만 한데, 불의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유진의 에너지는 얼마간 <도가니>에 숨통을 트이게 한다. 그전까지는 큰 흥행작이 없었지만, <도가니>는 460만이 넘는 관객을 만났다.


<우리 선희>(2013)의 선희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시작된 홍상수 감독과의 연은 <옥희의 영화>(2010), <다른나라에서>(2011) 등 4개의 장편, 2개의 중편으로 이어졌다. <옥희의 영화>에 이어 정유미가 맡은 주인공의 이름을 단 <우리 선희>는 (현재까지는) 정유미-홍상수의 마지막 협업작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영화과 졸업생 선희가 교수(김상중), 신인감독(이선균), 중견감독(정재영)들을 차례대로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 순간순간 미세하게 달라지는 정유미의 목소리 톤이 선희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것 같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2013)의 일호

평소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정유미와 유아인은 <좋지 아니한가>, <깡철이> 등에 함께 출연했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2000년 중후반 여러 단편을 통해 기대주로 손꼽혔던 장형윤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수명이 다 돼 지구에 추락해 소녀의 모습으로 태어난 인공위성 일호(정유미)는 소심한 얼룩소로 변해버린 경천(유아인)이 악의 무리에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다. 목소리 연기로선 아마추어인 기성 배우의 목소리를 빌린 방향은 인간의 모습을 한 위성, 동물의 모습을 한 인간이라는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부산행>(2016)의 성경

특별출연으로 참여한 <히말라야>(2015)에서 처음 '누군가의 아내' 역을 맡은 정유미는 이듬해 연상호 감독의 첫 실사영화 <부산행>에선 '아내'이자 '엄마'를 연기했다. 남편 상화(마동석)과 함께 만삭의 몸을 이끌고 부산으로 가는 성경. 커다란 덩치를 휘두르며 슈퍼히어로적 면모를 선보이는 마동석과 그의 곁에서 제 가족의 생존보다는 공생을 추구하며 아담한 몸을 겨우겨우 옮기는 정유미의 부부케미가 보기좋았다. <부산행>의 오묘한 엔딩은 바로 어머니를 연기한 정유미가 있기에 가능했다.

<염력>(2017)의 홍 상무

<부산행>에 이어 연상호 감독의 새 영화 <염력>에 출연한 정유미는, 10년이 훌쩍 넘는 커리어 중 처음으로 악역을 맡았다. 을지로 재개발 사업을 밀어붙이는 극악무도한 자본가 홍상무는 원하는 게 있으면 남의 고통 따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민사장(김민재)가 담당하는 사업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홍상무는 그를 무참히 구타하게 시키고, 그 옆에서 마치 겁에 질린 것 같은 연기를 해 녹음하는 소시오패스적 면모를 선보인다. 정유미의 기존 이미지를 비트는 효과를 노린 설정이다.


<82년생 김지영>(2019)의 김지영

무수한 백래시를 마주해야 했던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 됐고, 주인공 김지영 역에 정유미가 낙점됐다.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한 채 육아에 점점 지쳐가는 지영의 메마른 얼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지영이 할머니와 어머니에 빙의되는 모습까지 능히 소화했다. 이 유명한 캐릭터를 부끄럽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배우로 활동해온 김도영 감독의 세세한 디렉션까지 받아 한국을 사는 여성의 보편적인 초상이 완성할 수 있었다.


<보건교사 안은영>(2020)의 안은영

<보건교사 안은영>의 주인공 안은영은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여자다. 당대 대중에겐 너무나 익숙한 슈퍼히어로가 떠올려지는 설정인데, 안은영의 고군분투는 쾌감보다는 그 어쩔 수 없는 굴레를 안고 살아야 하는 여자의 고통이 더 크게 드러난다. 학창시절 유일한 친구 강선을 만나기 전 중학생 은영의 얼굴 가득한 상처를 마주하면, 아담한 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옷차림 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숨어 있을까 내다보게 된다. 안은영은 분명 범상치 않은 사람이지만, 이 어수선한 판타지를 차근차근 지나오면, 은영의 욕설과 기괴한 표정보다, 야만적인 세상 속에서 선한 의지를 지킬 수밖에 없는 이들의 보편적인 심정을 곱씹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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