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사입 현장 속으로 -극락편-

조회수 2018. 12. 10. 16: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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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만의 특별한 가치사슬

영하 8도, 올해 들어서 최강의 한파가 몰아친 12월 7일이 시작된 자정. 해가 내려앉은 거리를 가지각색의 조명이 휘감는다. 이 거리의 아침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여행용 캐리어와 사람도 들어갈 것 같은 큰 가방을 들쳐 업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 지게를 메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거리를 가득 메운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큰 봉지들과 그 봉지를 묘기하듯 하늘 높이 싣고 오가는 오토바이와 트럭까지. 청평화시장과 디오트를 시작으로 늘어서 있는 동대문 도매시장 거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21세기 지게꾼
동대문 도매시장의 밤은 세기말 사이버펑크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21세기에 지게꾼을 만날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소다.

자정이 좀 넘은 시각. 블로그마켓 쇼핑몰 브랜디의 사입팀에서 일하고 있는 김민한님을 만났다. 그는 동대문 사입만 올해로 4년차인 경력자다. 사입을 하기 전에는 쇼핑몰을 운영하다 망해도보고, 동대문 도매시장에 들어가서 일을 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7일 새벽 그와 함께 동대문 도매시장 곳곳을 거닐었다. 주로 동대문 도매상가 중 하나인 ‘디오트’의 위아래 층을 오르내렸는데, 이 디오트에만 1500개의 도매상이 들어서 있다.


동대문 도매상가 ‘디오트’의 내부. 이곳은 모두가 잠들기 시작하는 자정부터 새벽3시까지 절정을 달린다.

사입(仕入)이란 무엇인가. 사전 의미처럼 단순히 ‘상거래를 위해 물건을 사들이는 행위’로 보기에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동대문은 디자인, 생산, 도매, 소매까지 이어지는 패션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2014년 기준 동대문시장권의 패션의류 생산업체수는 6228개, 2015년 기준 1만8286개의 도소매 영업매장이 입지해있다. ‘사입’이란 넓게 펼쳐진 동대문 가치사슬 안에서도 소매상이 도매상에서 판매할 물건을 구매하는 과정으로 한정하여 해석할 수 있다. (통계참고: 동대문 패션시장 구조고도화전략, 산업연구원, 2017)

출처: 동대문 패션시장 구조고도화전략, 산업연구원
동대문의 물류·유통 가치사슬

물론 사입자가 하는 일은 단순히 구매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입자가 맡는 자세한 업무를 알기 위해선 먼저 동대문 도매시장의 가치사슬 구조를 알아야 한다. 특히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함께 소호몰이 범람하면서 동대문 시장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의 등장이 만든 ‘신세계’


인터넷 쇼핑의 활성화로 동대문은 새로운 가치사슬을 만들어냈다. 재고를 보유하지 않은 판매자가 당일 소비자가 인터넷에서 구매한 상품을 당일 소싱하여 익일 택배로 출고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디자인, 시제품 제작부터 생산, 도매유통과 각 단계를 연결하는 물류사업자까지 한 지역에 몰려 있는 동대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소매점주들이 동대문 도매시장에 와서 옷을 사입하곤 하지만, ‘온라인’이기 때문에 만들어내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재고를 보유하지 않고 판매할 수 있다”는 누구나 소규모 자본으로 쇼핑몰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쿠팡과 같은 업체들이 재고를 직매입하여 판매하는 이들인데, 이렇게 되면 재고가 있기에 ‘빠른 배송(소비자 주문 기준 통상 익일배송)’을 만들 수 있다는 강점은 있겠다. 하지만 일단 재고를 매입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품구색을 늘리기 위해선 창업자본이 엄청나게 든다는 단점이 있다. 더군다나 재고로 구비해둔 상품이 판매되지 않을 경우, 그 비용은 전부 매입자의 몫이 되기 때문에 초기 사업자에겐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동대문의 가치사슬은 이러한 직매입과 재고에 대한 부담을 현저히 낮춰, 온라인 쇼핑몰 창업의 진입장벽을 무너뜨렸다. 쇼핑몰 사업자는 동대문에서 ‘샘플’만 구매해서(판매 물량이 많으면 도매상이 ‘공짜’로 샘플을 주기도 한다.) 모델에게 입혀 촬영하고, 상품컷을 만들어 쇼핑몰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기 때문에 샘플만 확보한다면, 비용 부담 없이 기하급수적으로 상품구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다. 앞서 여행용 캐리어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동대문 거리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샘플을 구매하고자 하는 쇼핑몰 MD나 대표자라고 보면 된다.

커다란 사입가방을 메고 동대문을 거닐고 있는 한 사람

더군다나 카페24 같은 호스팅 서비스를 이용하면 쇼핑몰은 당장 내일이라도 ‘공짜’로 만들 수 있다. 요즘에는 유튜브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채널로 상품을 판매하는 이들도 넘쳐흐른다. 누구나 쇼핑몰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시대다.


재고 없이 굴러갈 수 있는 이유


동대문 쇼핑몰들이 ‘재고 없이’ 상품판매가 가능한 이유는 동대문 도매상가 인근 5km 이내에 밀집된 봉제공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당동, 창신동, 숭인동 등에 밀집한 수많은 봉제공장들이 쇼핑몰에 ‘당일’ 들어온 고객주문을 새벽까지 열일하며 생산량을 맞추고자 노력한다.

쇼핑몰들은 당일 고객 주문이 들어오면 해당 주문내역을 거래하고 있는 도매상들에게 전달한다. 도매상은 주문정보를 기반으로 봉제공장에 당일 제작 주문을 넣거나 근처에 있는 물류센터에 구비해둔 재고를 빼오는 식으로 쇼핑몰에 전달할 물량을 미리 준비한다. 앞서 사진을 통해 봤던 동대문 시장에서 ‘지게’를 메고 다니는 분들은 대부분 봉제공장과 물류센터에서 도매상까지 물량을 전달하는 일을 하는 분들이다.

한 동대문 도매상 앞에 쌓여있는 봉투. 카카오톡과 중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메신저인 위챗으로 연결되는 QR코드가 눈에 띈다. 동대문 도매상 중에는 거래하는 소매상들에게 신상 정보를 사진과 함께 메신저로 전달하는 업체도 있다. 물론 소매상 중에는 중국과 일본 바이어도 있는데, 동대문에는 이들을 위한 국제물류 서비스를 전문으로 제공하는 업체도 있다.

도매상은 이렇게 받은 상품들을 서로 다른 쇼핑몰별로 분류하여 ‘장끼’라고 불리는 간이영수증과 함께 봉지에 넣어둔다. 동대문 밤 도매시장이 오픈하는 시간은 오후 8시부터 12시 사이로 도매상가마다 제각각인데, 도매상들은 오픈 전부터, 혹은 오픈 이후까지 당일 쇼핑몰에서 주문이 들어온 상품을 준비하느냐 분주하다.


동대문 왜 매일, 직접 오세요?


쇼핑몰 사업자들은 그렇게 도매상이 준비한 상품을 직접 동대문 시장에 방문하여 픽업할 수 있다. 하지만 지방에서 쇼핑몰을 운영하는 사업자라면 매일밤 동대문 도매상가에 오고가는 과정은 부담이 될 수 있다. 이 때 ‘사입삼촌’이라 불리는 동대문 구매대행 사업자를 활용할 수 있다.

대봉을 들고 이동하고 있는 한 사입삼촌. 대봉 3개 동시에 들기는 기본이다. 저거 옷가지 들어있는 봉투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나도 들어봤는데, 체감상 대봉 하나에 쌀 한 포대 드는 느낌과 비슷하다.

사입삼촌들은 쇼핑몰을 통해 고객주문정보를 받고 오후 8시~12시 사이 밤 도매시장에 방문하여 새벽까지 해당 상품을 픽업한다. 쇼핑몰로 들어온 고객 주문을 하나의 도매상에서만 픽업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여러 도매상을 돌면서 모은 작은 봉지를 하나의 큰 봉지(‘대봉’이라 불린다.)에 넣어서 특정장소에 모아둔다. 동대문 도매시장 거리를 가득 메운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큰 봉지’들의 정체다.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한 손에는 고객주문 상품 정보와 픽업해야 할 도매상 이름이 적힌 장표, 다른 한 손에는 큰 봉지를 끌고 다니는 사람을 만난다면 필히 ‘사입삼촌’이다.

주문정보가 적힌 장표를 확인하고 있는 사입삼촌. 사실 같이 동대문 도매시장을 돌았던 브랜디 사입팀의 김민열님이다.

사입삼촌들은 단순히 구매업무만 하지 않는다. 쇼핑몰에서 도매상까지의 역물류도 책임진다. 예컨대 사입삼촌은 쇼핑몰에서 촬영을 마친 샘플반납을 도매상까지 해준다. 만약 도매상에서 쇼핑몰로 잘못된 상품이 들어가거나(오배송), 공장 염색 과정에서 샘플과 ‘색상이나 워싱(동대문 용어로 ‘탕’이라는 말을 쓴다)’이 다르거나 하는 등 불량 상품이 나온다면 반품 업무도 대행한다.


이 외에도 사입삼촌은 동대문의 가치사슬을 넘나드는 각양각색의 바리에이션을 보여준다. 예컨대 쇼핑몰 MD를 대신하여 샘플을 찾아주는 사입삼촌이 있다. 구매대행 이후 이어지는 쇼핑몰 사무실(물류센터)까지의 화물운송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사입삼촌도 있다.


가치사슬의 완성은 택배로


그렇게 사입삼촌들이 대봉에 넣어 쌓아둔 상품은 택배업체, 화물운송, 퀵서비스 사업자 등을 통해 새벽시간을 이용해 쇼핑몰까지 전달된다. 동대문 화물운송을 하는 개인사업자를 ‘화물삼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대문 도매시장 앞에 길게 늘어서 대봉을 싣고 있는 화물차들의 정체다. 퀵서비스 오토바이는 근처에 있는 쇼핑몰까지 배송도 하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누락 주문을 처리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동대문의 각 가치사슬을 연결하는 물류사업자들. 난닝구, 민스샵 등 어느정도 규모를 갖춘 쇼핑몰들은 이 화물차에 랩핑을 하여 자체물량 처리 용도로 내재화했다. 요즘 봉제공장과 직접 거래를 하여 PB상품을 찍어내는 쇼핑몰도 늘어나고 있는데, 이 경우 가치사슬에서 도매상이 배제되는 만큼 동대문 도매업계의 위기 신호로 받아들이는 업자도 있다.

쇼핑몰은 화물삼촌 등 물류사업자를 통해 사무실에서 받은 상품을 현장에서 검수하고 고객주문 별로 분류하여 합포장한다. 쇼핑몰은 그렇게 준비해둔 상품들을 당일 지역 택배업체 대리점에 출고(택배업체 입장에선 ‘집하’다.)한다. 상품을 주문한 고객은 허브앤스포크 택배 프로세스에 따라 통상 쇼핑몰 출고일 다음날에 주문 상품을 배송 받을 수 있다.

새벽 4시경, 브랜디 사무실에서 분류작업을 하는 작업자의 모습. 브랜디는 자체차량 2대를 통해, 하루 2번(3시 30분 1차, 7시 이후 2차) 뚝섬역 옆에 있는 사무실까지 픽업한 물건들을 배송한다. 브랜디 사입팀에서 하루 평균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픽업하는 상품은 약 6000개 이상이다.

요약하자면 동대문의 특별한 가치사슬은 인터넷 쇼핑몰 사업자가 재고 없이, 소비자 주문일 기준 +2일 배송, 판매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줬다. 만약 쇼핑몰 사업자가 동대문 현장에 즐비한 택배업체를 이용한다면 소비자까지 익일배송도 가능하다. 앞서 가치사슬에서 쇼핑몰까지 이동하는 물류를 생략하고, 동대문 현장에 있는 택배업체 부스에서 바로 송장을 작성하고 화물을 맡기면 된다.


여기까지가 동대문 가치사슬의 이상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처럼 세상은 생각대로 아름답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다음에는 동대문 사입 현장 속으로 <지옥편>으로 돌아온다. 혁신은 대개 불편함인지도 몰랐던 불편함을 알고, 극복하는데서 그 꽃을 피운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엄지용 기자> drak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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