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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백수시절 2년 글쓰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죠"

국민배우 안성기 "최인호 형의 '인생' 다시 꺼내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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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르게 사는 사람 곁에는 책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해서 살아보겠다는 뜻의 다른 말입니다.

그 사람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의 독서 근황을 알아보는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코너가 예측 불허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일기 릴레이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서 뜻밖의 독서 취향을 발견하고 의외의 책과 조우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소설가 김연수->'영혼의 슬픔' 저자 이종영->출판기획자 조원식->만화가 박흥용->임지훈 카카오 대표->이준익 감독->박정민 배우->임정욱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김봉진 '배달의 민족' 대표->에피톤 프로젝트의 차세정->김주환 연세대 교수->뮤지션 한희정->김대현 작가->서동원 바른세상병원 원장->이재민 그래픽 디자이너->재즈 보컬리스트 허소영 편까지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서동원 바른세상병원 원장이 추천한 영화배우 안성기 편입니다.

배우 안성기 씨를 추천할까 합니다. 이분 아들과 제 아들이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학부모 모임에서 보곤 하는 사이입니다. 배우로도 좋아하지만 이분 독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국민배우 안성기. 한국 영화계의 오랜 기둥인 그를 이런 독서 릴레이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서 원장으로부터 연락처를 건네받아 전화부터 했다. 마침 새 영화 촬영을 끝내고 이제 막 바깥 활동을 시작하던 참이라고 했다. 그는 압구정 CGV에서 만나자고 했다. 거기 신관 지하에 그의 이름을 딴 독립영화 상영관이 있다.


약속 당일 시간에 맞게 나온 그는 몸에 잘 맞는 블랙진에 편한 셔츠 차림이었다.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분장이라고는 없는 민낯이어서일까. 가까이 마주 앉았을 때 눈에 들어온 잔주름을 보고서야, 그도 이제 '원로 배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 1층 한쪽 모퉁이에 인터뷰를 할 만한 방이 있었다. 그는 직접 카페 매장으로 가더니 아이스커피를 들고 와서 건넸다. 특유의 푸근한 인상과 말씨에다 초면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마치 오랜만에 재회한 집안의 형님 같았다.


책 이야기에 앞서 그의 근황과 배우 인생에 대한 질문이 길어졌는데 그는 매번 성심성의껏 답을 이어갔다. 과장이나 가식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짐작이 갔다. 길지만 거의 전문을 싣는다.

-많이 바쁘시죠?

이제 좀 바빠졌어요. 어제는 '러닝맨'이라는 예능 프로그램도 처음 해봤어요. 그동안은 안 했는데 물론 이번엔 영화 마케팅 팀 의뢰도 있고 해서요.

영화 제목이 '사냥'인데 컨셉을 추격으로 해서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러닝맨 팀이랑 하루종일 뛰고 잠복하고 하느라 혼났어요.(웃음)

평소에는 서바이벌 게임 같은 게 애들 장난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저도 애처럼 진지해지더라고요. 긴장감도 생기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역시 새로운 걸 하다 보면 새로운 느낌이 생겨요.

-원래 TV엔 잘 안 나가시죠?

TV와는 성격이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영화는 생각할 여유가 많고 재고할 수 있고 작업이 맘에 안 들면 다시 한번 하자, 이런 게 있어요. 최선을 위해 달려가는 마음이 모이는 그런 게 있는데.

일정도 방송과는 달리 이날 꼭 해야 하는 건 아니고 다음에 할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는 반면에 TV는 싫으나 좋으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찍을 수밖에 없는,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보니까, 일단 근본적으로 안 맞아요.

또 TV는 굉장한 순발력을 요구하는데 저는 그런 순발력도 없어요. 아침에 대본 나와서 찍고 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어요. 물론 촬영할 때는 집중해서 하지만 서둘러서 하는 걸 원치 않아요.

-일상은 어떠세요?

저는 살아오면서 큰 부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늘 비슷해요. 일상이라는 것도 나다니는 것보다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해요. TV도 보고 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 집안 청소는 제가 다 합니다.(웃음) 꽃도 가꾸고 이런 소소한 것들이 저한테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지만 재미가 있어요.

사람이 큰일을 해서도 재미가 있겠지만 평소 소소한 일에서 오는 재미도 커요. 그리고 안정감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에 중독이 됐다고도 할 수 있어요. 날마다 하던 걸 안 하면 찌뿌둥하기도 하고, 땀을 흘렸을 때 어떤 성취감, 쾌감이 있거든요.

-운동은 어떤 걸 하세요?

달리거나 웨이트를 하죠. 체육관에서 하는 운동들. 요즘은 아파트 단지 안 피트니스센터를 이용해요. 일상적으로 하는 것 외에 골프 같은 것도 오래 됐고, 예전엔 축구도 했는데 부딪힘이 좀 많다 보니까 몸 다치는 건 둘째 치고 서로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더라고요. 그래서 자제하고 있어요. 바둑은 못 두지만 아주 좋아해요. 보는 것도 좋아하고, 어쩌다 수가 비슷하면 만나서 두기도 하고.

-그 외는 영화 일인가요?

요즘은 1년에 한 편 정도 찍는데 준비와 촬영에 대부분의 시간이 들어가요. 그 외에 제가 많은 일이 좀 있어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 이사를 맡으라고 해서 거기서도 눈에 잘 안 띄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젊은 감독들 지원하는 프로그램. 어린아이들 캠프, 장학 사업, 유니세프도 24년간 했고요.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일도 13년 됐어요.

저는 한번 일을 하면 오래가는 걸 좋아해요. 그일 하는 사람과 같이 호흡하는 걸 좋아하죠. 그래서 그런 일들이 쭉 같이 가고 있는 거죠.

-촬영하는 영화에 따라 평소 생활이나 기분이 바뀌기도 하나요?

이번에 개봉하는 '사냥'의 경우에는 육체적인 장면이 많이 요구되는 영화예요. 그전의 임권택 감독의 '화장'은 어떤 사람의 생각에 관한 것이고. 어떤 영화를 하느냐에 따라 분위기도 많이 달라지죠.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일의 성격에 따라 조용해지기도 하고 활발해지기도 하고.

'사냥'은 작년말에 촬영이 끝나서 일상으로 돌아와서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아직 믹싱을 안 한 상태여서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촬영이 끝나도 연기자로서 할 일이 남아 있나 보죠?

보충 녹음 같은 게 있어요. 대사 전달이 잘 안 됐다거나 어떤 장면에서 감정이 좀 모자랐다거나 할 때 다시 입히는 작업이죠. 그런 건 늘 하는 거예요. 영화는 연출자와 제작자가 참여하는 시간이 제일 길지만, 배우는 캐스팅되면서 일이 시작되니까 짧은 편인데도 최소 7-8개월은 간다고 봐야죠.

-이번 영화는 얼마나 걸리셨죠?

작년 5월에 제의가 와서 촬영은 9월부터 들어갔죠. 그전에 시나리오 보면서 계속 얘기를 하다가 두 달 전부터 액션을 연습했죠. 서로 치고받거나 낙법 같은 것, 총 쏘는 것 때문에 사격장 가서 총도 좀 쏘고, 이런 준비 과정 거쳐서 12월 중순쯤에 촬영이 끝났어요. 영화는 9월 16일에 시작해서 하루 만에 일어나는 일을 그린 건데도.(웃음)

촬영 기간 중에는 시간이 가면서 낙엽도 누렇게 변해 있어서 CG로 색도 입히고, 날씨도 추워져서 물에 들어가고 비도 맞아야 할 때는 어휴, 관객이 모르는 고통이 많이 있었죠.

-이번이 몇 번째 작품인가요?

지금까지 90편 정도 될 겁니다. 성인이 돼서는 90편. 어렸을 때 아역으로는 70편 했다고 그래요. 정확한 숫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 영화는 필름이 소실된 게 많아요. 정말 안타까운 일인데 그래서 아주 훌륭한 감독님들이 많은데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필름이 없어서.

심지어 김기영 감독님 같은 분도 여러 작품을 같이 했는데. 그 중 필름이 남은 영화가 '하녀'예요. 그래서 지금은 그 작품이 주로 소개되는데, 그분이 사실은 굉장한 분이세요. 초기에는 굉장히 네오리얼리즘적이었어요. 이태리 전쟁 이후 극사실주의적인 영화가 많이 나왔는데 그 감독님도 그렇게 접근한 게 많아요.

그런데 그 필름이 하나도 없어요. '하녀'는 뭐랄까, 약간 좀 만들어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 거거든요. 나중에 시리즈로 '충녀' '화녀'가 나와서 그분은 그런 식으로만 규정이 지어졌는데 그전의 필름들이 진짜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 저의 생각으로도 굉장히 좋았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왜 그렇게 소실이 많이 됐죠?

보관이 부실해서죠. 1976년부터는 한국영화진흥공사가 영화 제작사에 의무적으로 보관용 필름을 제출하게 했지만 그전에는 관심들이 없었어요. 보관했던 필름도 어디 영화제에 쓴다고 가져갔다가 분실되거나 아주 어처구니 없이 사라진 게 굉장히 많아요.

지금은 영화 투자사들이 메이저 아닙니까. 컨텐츠가 두고두고 자산이 되니까 보관도 잘하는데. 예전에는 영화 제작자들이 개인이고 대부분이 돈 받아서 벌면 끝이라고 생각했죠. 그게 자산이 된다는 생각을 안 했으니 보관이 허술했죠.

필름이라는 게 보관 상태가 조금만 안 좋아도 달라붙고 금방 안 좋아지거든요. 옛날엔 냉방도 잘 안 되던 시절이니까 다 엉망이 돼서 갖다버린다든가 했죠. 그래서 감독들도 제대로 평가를 못 받게 된 거죠.

-76년 이전 것은 대부분 유실됐겠네요.

그런 게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제가 몇 편에 출연했는지 정확히 몰라요. 그런 기억을 잘 하시는 정종화 선생님이라고 계시는데, 영화 포스터니 뭐니 자료를 제일 많이 갖고 계세요. 그분이 영화 연도까지 컴퓨터처럼 기억하시는 분인데, 저보고 70편 했다고 하더군요.

-영화 출연하실 때 기준 같은 게 있나요?

그것도 큰 일 중 하나예요. 쓴 분들은 열심히 썼으니 어떻든 잘 읽어봐야 할 것 아니예요. 그래도 좋은 것보다는 별로다 싶은 게 많고, 애매모호한 게 대부분이에요. 좋다는 것은 극소수죠. 그런 걸 만나면 무조건 하는 거죠. 좋은 시나리오라는 건,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굉장한 상상력을 자극해요. 읽어가는 중에 영상이 보이죠. 생각이 떠올라요.

반면에 그런 게 안 떠오르고 꽉 막히는 게 있어요. 더 이상 발전이 안 되는 시나리오가 있거든요. 그러면 괴롭게 읽죠. 어떻게 다 읽긴 해도 이건 안 되겠구나 싶죠. 좋은 시나리오는 읽기만 해도 신이 나요. 읽었던 것 다시 읽고, 액션도 생각이 나고 카메라 시선도 음악도 막 생각이 나요. 그런 게 훌륭한 시나리오죠.

-시나리오 읽는 데도 시간이 많이 들어가겠네요.

그렇죠. 평소에도, 가령 '사냥'을 찍는다고 하면 촬영하는 기간에는 거의 날마다 읽어요. 그 다음날 할 것들, 어떤 생각을 더 할 수 있을까, 어떤 느낌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돌발적인 상식을 깨는 뭔가가 없을까, 끊임없이 생각해보는 거죠. 그게 굉장히 중요하고 거기서 새로운 생각이 나와요.

물론 연극 같이 세팅된 무대에서 하는 게 아니고, 촬영 현장이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현장에 가서 순발력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전에 많은 생각과 연구에 의해 좌우가 된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평소에 많이 얘기하는 건데, 배우는 자기 시간이 많아야 해요. 생각할 시간, 공상, 상상할 시간이 많아야 해요. 요즘은 다들 배우들이 촬영할 때 제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방해를 안 받고 집중하려고.

-시나리오를 읽다가 공부도 하시나요

물론이죠. 필요한 공부도 하고 액션도 배우고.

-책을 찾아 읽기도 하나요?

그런 경우도 있어요. 최근에는 내년에 찍을 예정인 영화가 있는데, 진도 다시래기 풍속이 들어가요. 장례식장에서 상가 분위기를 축제처럼 띄우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거기선 진도 사투리를 써야 해요.

감독이 추천해줘서 전라도 탯말이라는 걸 익히는데, 소설을 읽어요. 전라도 쪽 주제로 한 소설 속에 대화가 많이 나오는데 그런 걸 읽으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죠. 그 외에도 작품 속 인물에 가까이 가려고 이 노력 저 노력을 하죠.

-이번 영화 '사냥'도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그림이 막 그려졌나 보죠?

네. 아주 참 좋았어요.(웃음) 영화 내용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서 곤란한데. 주인공의 아주 어두운 개인사가 나오는데, 주제가 아주 새로울 수 있고 깊이를 가질 수 있는 문제예요.

하지만 그걸 너무 다루면 대중이 힘들어 하고 외면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영화 제작 연출하는 사람들의 고민인데. 독립 영화 한다는 친구들도 그런 갈등이 있을 거예요.

자기 고집 대로 자본이나 누구의 간섭도 안 받는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코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죠. 이번에도 제작자도 연출자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국 어떤 문제의 장면을 슬쩍 정도로만 넣었어요.

제가 사실은 나이가 들어서 안정적인 고정된 이미지 그런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찍으면서 같이 뛰어다니면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어서 아주 좋았어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도 이게 힘은 들겠지만 참 신나겠다, 이런 걸 하면 나도 에너지를 많이 얻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랬어요.

-연초에 어떤 행사에서 뵈었을 때 백발이었는데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서였나요?

몰입보다는 극 중 캐릭터 때문이죠. 머리를 두고도 몇 일을 만나서 이야기해요. 생각도 해보고 그림도 비춰보고. 배역이 60대 중반이어서 반백 정도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냥 직접 길러서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기를 때까지 길러봤는데 결국 묶기에는 짧았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촬영 끝나고도 이러고 다닐 거야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지금 모습은 제 나이에 비해 젊은데, 흔히 생각하는 육십대 중반은 그게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낯설어 해서 다시 돌아왔어요.

촬영 기간 중에는 영화 찍느라고 그렇다고 답하면 모든 게 설명이 됐는데, 그게 아니면 이상하게들 생각해요. 무슨 변화 있냐면서 어려워해요. 그래서 수염부터 깎고. 다시 염색하고 머리도 짧게 자르고 해서 원래로 돌아왔어요.

-영화 촬영할 때 징크스나 수칙이 있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저의 외부에서 뭘 찾으려고 하지는 않아요.

-늘 꾸준하고 기복이 없는 인상을 줍니다. 배우는 좀 극적이어야 할 것 같고, 일상도 일반인과는 좀 달라야 할 것 같은데. 바른생활 모범생 같아요.(웃음)

어차피 삶은 자기 인생을 사는 거니까 자기 만족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배우는 대중을 상대로 뭔가를 줘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저는 영화 속에서 다 깨보고 싶어요. 그냥 평소에는 흰색 도화지. 아무것도 안 입힌 상태로 놓아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주 일상적이고 평상적이고, 어떤 느낌도 없을수록 좋아요.

제 이미지는 고착된 게 많죠. 부드럽고 가정적이고... 그런 게 있지만, 거기에다 더 많은 것을 칠해 놓으면 배우로서 어떤 인물을 채색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평상시에는 놔뒀다가 영화 속에서 마음껏 뭔가를 보여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편차가 더 클 수 있을 것 같아요.

늘 변화가 많은 사람은 영화에서도 그래봐야 비슷한 느낌일 테고, 평소에는 조용한 사람이 영화 속 인물의 감정 기복 같은 데서는 표현이 크면 효과가 더 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가끔 정치 같은 것 제의가 오면 저는 그럽니다. "저는 영화 속에서 대통령도 하고 왕도 하고 충신도 해보고 다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는 저 개인으로 조용하게 사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하죠.

-아직 못 해본 역할도 있나요?

지독한 악역은 못 해봤어요. 그렇다고 그걸 꼭 해야겠다는 강박도 없어요. 거의 모든 직업을 다 해본 것 같아요. 특별한 것 말고 일반적인 직업은.

-그중에 제일 잘 맞는 옷 같은 배역은?

대부분의 배우들이 평소에 쉴 때도 아무 땅바닥에나 앉아도 되는 편한 역을 좋아해요.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의 역할 같은 걸 좋아해요. 평소 입던 옷 그대로 입고, 특별히 분장 안 해도 되는 그런 역할이 좋아요.

-아역 배우를 하다가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지요?

10년 가까이 되죠.

-지금까지 오랜 연기 이력을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은 일단 제쳐놓고요. 제 의지로 배우를 다시 시작한 게 78년이니까 그때부터 80년도까지를 한 시기로 볼 수 있을 텐데, 70년대 우리 영화 패턴을 그대로 따라갔던 시기예요. 그때 유일하게 흥행작으로 만들 수 있었던 소재인 사랑 영화 두 편과 반공 영화 한 편을 했죠.

의무 제작 편 수를 채우기 위한 영화를 포함해서 모두 네 편을 했는데, 그때는 심적으로 힘들던 시기였어요. 평생 해야 할 작업인데 이렇게 갇혀 있고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어요.

80년대에 들어와서 이장호 감독을 만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을 했지요. 박 대통령 죽고 5.18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던 와중에 5공이 시작되기 직전에 개봉했어요. 당시로서는 행운이었어요. 사회성 있는 영화여서 검열 통과하기가 어려울 거라고들 했는데 어수선한 시기에 어떻게 해서 나왔어요. 확실치는 않은데 제 기억으로는, 박완서 선생님이 민간인측 심의위원으로 있으면서 통과시켜야 된다고 고집해서 상영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영화계가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고,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시도해보려던 시기였죠. 그때 출연작이 많았어요.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곽지균 감독의 '겨울 나그네'.. 하여튼 신인 감독이 전부 데뷔한다고 하면 저랑 같이 했어요.

-전성기였네요?

네. 80년대는 배창호 감독과 계속해왔고. 점차 영화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기술적으로도 조금씩 좋아졌죠. 동시녹음도 다시 생겨났고. 하지만 아직도 국내 영화 자본이 영세했어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소재도 많이 개방되고, 대기업 자본도 들어오면서 영화가 산업화하기 시작했죠. 제 개인적으로는 90년대 중반까지는 주연만 하다가 조연을 하기 시작했어요.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세계 속 한국 영화가 됐죠.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 작가로서 감독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오고 멀티플렉스도 늘어나고 극장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죠. 모든 게 전산화해서 한눈에 상황도 알 수 있고.


배우 안성기는 여덟 살 때 아역 배우로 데뷔했다. 지금은 부모가 연기학교에 데려가는 경우도 많다지만 당시엔 아역 배우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영화계 인사와 인연이 있는 집안의 자녀가 입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 출연 장면

-아역 배우를 하다가 그만두신 것은 영화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나요?

영화가 싫어서라기보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역할이 없어진 거죠. 요즘도 영화에서는 고등학생 역할이 별로 없어요.

-청춘스타들이 있지 않나요?

고등학생 역할은 거의 없어요. 특별한 경우만 그렇고, 일상적으로는 배역이 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러면 잘 됐다, 그동안 제대로 다니지 못한 학교나 제대로 다녀야겠다' 싶었죠. 그래도 고1, 고2 때 한 편씩은 했던 것 같아요. '하얀 까마귀', '젊은 느티나무' 두 편을 더 했죠.

계속 이어서 하던 것은 중3 때까지뿐이었어요. 사실 저는 평범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딴 생각 안 하고 다니는 게 좋았어요. 어릴 땐 초등학교때부터 학교에 안 간 날이 더 많았거든요. 늘 불안했어요. 뭔가 안정이 안 된 거죠. 오전에 공부하고 있으면 오후에 제작부장이란 분이 데리러 와요. "촬영하러 가자"고 하면 다른 애들이 "야 좋겠다"고 하는데 저는 하나도 안 좋았어요.(웃음)

공부가 좋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친구들하고 같이 있고 싶었어요. 그런데 자꾸 빠져나가야 하니까 싫었어요. 그래서 제가 영화를 다시 하겠다는 생각은 잘 안 했어요. 대학 가서는 연극회 회장도 하곤 했지만 영화를 하기 위해서 계속 연결을 한 건 아니었어요.

외대 베트남어학과에 갔을 때도 베트남에 가서 돌파구를 찾아보자 싶었어요. 그래서 ROTC도 지원했죠. 여러모로 행동하기 편하게 장교로 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월남 추가 파병이 금지됐어요. 결국 전방에 가서 근무를 했고, 베트남이 공산화하는 바람에 국내 취직도 안 됐어요. 당시 ROTC 출신은 서류만 내면 대기업에 다 들어갔는데 저만 안 됐어요. 베트남어 전공자가 쓸모가 없어졌으니 떨어진 거죠.

결국 다시 생각을 해보니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건 영화 아니겠나 싶었어요. 신인 배우들이 어려워하는 게 카메라 앞에 서면 시선 둘 데가 마땅치 않다는 건데, 저는 편안했거든요. 어릴 때 늘 그 앞에 있었으니. 그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됐고 다시 시작하는데 무기였던 거죠.

또 하나는, 어릴 때 봤던 분들이 영화 현장에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저를 반갑게 맞아줬어요. 신인은 처음에 모든 게 낯설고 좀 힘들게 하는 사람도 많고 한데, 저한테는 전부 "야 많이 컸구나" 하면서 반겨주니까 좀 빨리 시작할 수 있었죠.

-영화계 복귀해서는 빨리 스타가 된 편이죠?

복귀하기 전에 업자 생활을 한 2년 했고...

-업자라면 무슨 일을 하셨지요?

제대하고 영화 하기 전까지 실업자! 방콕맨 말이에요.(웃음)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겠군요.

가장 좋았던 시기...

-가장 좋았다구요?

가장 힘들었지만 저한테는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었으니까...

-어떤 점에서요?

그 2년 동안 영화를 다시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했어요. 우선 영화 현장에서 뛰려면 몸을 잘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체력을 준비하고, 영어도 좀 하자, 이러면서 실업자 기간 동안 시간표도 만들고 해서 일부러 아주 바쁘게 지냈어요.

가장 좋았던 것은 저녁에 밥을 먹고 나서는 무조건 방에 틀어박혀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게 네 편이었는데, 개발새발 내용이야 어떻든간에 끝을 본다는 게 참 의미 있는 일이더라구요. 네 편을 딱 쓰면서 하여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알게 된 것 같았어요.

그때는 딱히 일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저녁 시간을 돈 안 들이고 집에 폐가 안 되게 보낼 수 있을까 싶었죠. 시나리오는 원고지와 펜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일단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집에 피해는 안 주겠구나 생각했어요. 한 시간 정도 뭘 하나 구상해서 시퀀스를 써 나가는데, 오늘 한 마디 했다가 요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썼어요.

지문도 감독 콘티처럼 아주 세밀하게 썼어요. 인물의 심리라든가 카메라 앵글, 빛까지 다 생각하면서. 어떤 날은 원고지 한 장을 쓴 적도 있고, 많이 써야 넉 장 썼을까요, 어떤 날은 하나도 못 쓰고 생각만 하다가 잠들기도 하고. 그 밤 시간이 저한테는 굉장히 풍부하게,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으면서도 끊임없이 영화를 생각해보게 만든 거죠.

당시엔 일반 배우들이 감독들하고 작품 이야기하는 게 드물었어요. 시스템 자체가 한 영화 끝나면 좀 쉬었다가 털어내고 다른 영화로 넘어가고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서너 작품을 늘 같이 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일반화됐지만.

이장호 감독님하고 처음 만나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찍을 때, 처음엔 원래 제가 캐스팅이 아니었어요. 하고는 싶은데 그 역할을 하기에는 제 외모가 너무 샤프하고 잘 생긴 쪽이라고 했어요. 그래도 저는 '아니다, 난 할 수 있다'면서 장호형한테 "제가 시나리오 쓴 것 있는데 보실래요?" 했어요. 그걸 높게 평가해주셨어요.

당시 배우들 삶이 그렇지 못했으니까.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없었으니까 그러기가 어려웠는데, 제 시나리오를 보시고는 "너 감각 좋다" 이러면서 점점 가까워져서 결국 일을 하게 됐죠. 그 후에 배창호 감독과도 영화를 열 몇 편 계속 하면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요즘에는 그런 친구들이 많죠. 영화 전공한 친구도 많고 자기 역할 외에도 작품 자체를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당시만 해도 없었어요.

그 실업자의 시간이 제게는 굉장히 좋았어요. 오후에는 주로 프랑스 문화원에 가 있었어요. 당시엔 스크린쿼터제 때문에 해외 영화는 볼 수 있는 게 연 25-30편 정도였어요. 그러니 헐리우드의 아주 상업적인 영화가 주를 이뤘죠. 돈을 벌어야 하니까. 다른 유럽 예술 영화 같은 것은 보기 힘들었어요. 알랭 들롱이나 장 가뱅이 나오는 갱스터 영화 몇 편 말고는. 영화 편식이 심했죠.
저로서는 영화의 규모라든가 인간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영화가 공부하기 좋겠다 싶어서 주 2-3회씩 날을 잡아서 계속 갔는데 그게 굉장히 공부가 많이 됐어요. 그런 시간이 2년, 그리고 조연 생활 2년 할 때와 연결이 되면서 한 4년의 시간이 지금까지도 제겐 아주 굉장한 힘이 되고 있어요.

그 당시로선 너무 힘들었지만, 왜냐면 잘될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일을 시작하는 신인들은 마찬가지겠죠. 잘되고 보니까 그때 시간들이 나한테는 정말 좋은 약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겉보기에 워낙 무난하고 꾸준한 분이어서 저런 분도 좌절이나 힘든 시기가 있었을까 싶었는데 그런 시간이 있었군요.

네. 그래도 제 경우에는 시행착오가 적었던 게, 어른들 모습을 보고 자라서일 거예요. 어렸을 때 보던 어른들이 나이 들어 보니까 변해 있을 거 아녜요? 계속 잘된 분도 있고, 완전히 망가진 분들도 있고 하니까. 어떻게 지내오신 분들이 아직도 잘 건재하고 있나 봤더니, 대부분이 가정적으로 안정되고 일에 집중하고 일 중심으로 사는 분들이더군요.

그렇지 않고 집중 안 하고 다른 일 신경 쓰고 부업도 하고 하면, 그건 아니더라는 거죠. 그런 식으로, 신인이 겪을 시행착오 같은 것을 미리 느꼈어요. 그리고 인기라는 게 그렇게 허망한 것이라는 걸 미리 알아버렸어요. 거기서 제일 많이 초심을 잃고 변했다는 얘기도 듣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가슴 아프고 하는데 그런 기간이 저한테는 없었지요. 굉장히 큰 사건이 저한테는 미리 해결이 된 상태에서 가니까 부침 없이 쭉 올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저한테는 영화가 제일 우선이었어요. 가령 인터뷰나 다른 행사나, 그런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일 다음이었어요. 무슨 일이 생긴다고 순서를 바꾸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여행 한 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어요. 재작년까지는 없었어요. 진짜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어요. 그런 바람에 지금까지 온 것이고. 하지만 앞으로는 제 시간을 좀 가지려고 해요.(웃음) 여행도 하고. 예전에 비해 그만큼 시간 여유도 좀 생겼고...

-매사에 아주 계획적이고 준비를 착실히 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았어요. 뭘 어떻게 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식으로 아주 계획적이지는 않았어요. 막연했어요. 다만, 어떻게 되든지 한번 가보자 하는 그런 막연한 건 있었어요. 베트남을 생각했을 때도, 당시 한진상사가 진출해 있으니 그걸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어떻게 해야지 이런 게 없었고, 하여튼 장교로 가보자, 가면 뭔가 길이 또 있겠지 이 정도로 생각하다가 이렇게 된 거죠.

-그래도 무직 기간 중에도 생활 계획을 세워서 집에 틀어박혀서 시나리오 공부한 것을 보면.

그건 그랬던 것 같아요. 저 자신을 아꼈어요. 막 내팽개치고 자학하고 술 마시고 마구 구는 식은 없었어요.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리고 매사가 긍정적인 편이에요. 남 탓 안 하고, 내가 잘하면 되는 것이고 잘못되는 것도 내가 한 것이고, 모든 걸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큰 어려움이나 갈등 같은 것도 생각보다는 완화돼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시나리오 습작을 시작했을 때는 영화에 대한 인생 목표가 확고히 섰나 보죠?

그럼요. 그래서 군대 제대할 때 강제 적금 탄 게 몇 십만 원 있었어요. 그걸로 중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을 등록했어요. 한 학기를 지나는데 다른 친구들에 비해 저는 공부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습관이 안 돼 있고 방법이 차곡차곡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막 외워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됐죠. 공부는 안 되겠다, 때려치고 현장으로 가자 싶었어요.

그 뒤로 배우 수업을 나름대로 혼자 한 거죠. 영화 많이 보고, 운동 하고. 시나리오 쓰기를 계속 했죠. 당시에 아버님이 계시던 곳이 그전엔 영화 제작도 하다가 실패하고 기획을 하셨는데, 그 회사의 스크린쿼터용 계몽 영화 비슷한 작품 '병사와 아가씨들'에 제가 출연했죠. 흥행과 상관 없어서 누가 해도 되는 거였어요. 터널을 지키는 병사와 터널 안에 사고가 나서 갇힌 버스의 여자 차장과의 이야기.(웃음) 영화계 사람들은 '아 저놈이 영화를 새로 시작했구나' 아는 정도였지만 일반 사람은 전혀 모르는 영화였어요.

그리고 두 편의 상업영화를 했는데 존재가 많이 알려지진 않았고, 반공영화는 심적으로 힘들었는데 더 이상 나빠질 게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그러던 중에 이장호 감독을 만났고, 80년대라는 시대가 꺾이면서 저와 맞는 시대가 된 거죠.

-그 뒤로는 계속 승승장구하셨나요?

더 고비는 없었어요. 고비는 자기가 만든다고 봐요. 예를 들어 조연 배역에 대한 요청이 자꾸 나오는데 "나는 조연 안 해" 그러면 자기가 고비를 만드는 거죠.

주연을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사람들 요구에 달린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현재 위치를 얘기해주는 거거든요. 상품으로 치면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인데 수요는 생각 안 하고 자기 고집만 피우면 거기서 차질이 생기는 거죠. 저도 사실 약간 마음이 아팠지만 시장의 논리를 따르기로 했어요.(웃음)

왜냐 하면 새로운 사람이 많이 나왔으니까. 내가 그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젊어서 그 역할을 할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자연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거라 생각하는 거죠. 나는 그 중의 일원이 돼서 같이 작업하면 되죠.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이, 그래도 존재감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잠깐 나와도 저 사람은 화면에 떴을 때 존재감이 뚜렷하면 생명력이 있어요.

그런 존재감을 갖추기 위해 지금 자신의 준비, 마음가짐, 이런 걸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배우의 역할은 자기가 진짜 힘들 때까지는 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역할이 어떤 것이든, 자기가 영화 현장에 있고 싶다고 할 때까지, 자기가 충실하기만 하면. 출연할 수 있는 작품이 1년에 한 편이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연 200편 쏟아지는데. 할아버지 역할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 역할에 충실하다보면, 나름 그 영화 속에서 잘했다면 감동을 줄 수도 있겠고, 그 감동이 어떨 때는 굉장히, 관객이 보기에 '야, 이건 짧게 산 사람은 줄 수 없는 그런 감동이네' 이런 것이면 좋겠죠.

그러니까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죠. 그게 참 힘들긴 하겠지만 하여튼 출발 지점의 초심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도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터져나오는 거죠.

저는 현장이 좋아요. 현장 없이 그냥 몇 년 있으라고 하면 아주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1년에 한 번이라도 몇 달 동안 현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영화 속 인물과 새로운 장소를 다니면서 찍는 그런 여행이 사람을 굉장히 생기있게 만드는 거죠.

-오래 지나오고 나니 영화계의 변화가 보입니까?

전체 파이가 굉장히 커졌어요. 돈 가치가 바뀐 걸 감안하더라도, 가령 1억 들여 만들던 영화가 지금은 50억, 100억으로 만드는 때가 됐죠. 무엇보다 일반인의 생각이 굉장히 많이 변했죠. 제가 시작할 때만 해도 영화 하는 사람은 조금 이상한 사람들, 성을 갈았거나 예명을 쓰거나 집을 뛰쳐나왔거나 그런 사람이 많았어요.

당시엔 연극영화과도 예비고사 떨어진 사람도 갈 수 있는 곳, 좀 논다는 학생들이 다 모이는 과라고 보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부모들도 거긴 골치 아픈 애들 가는 덴가 보다,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영화니 오죽하겠냐, 뭐 이런 식이었죠.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연극영화과 가려고 하면 "네 실력으로 어떻게 가려고 그래" 그럴 정도로 바뀌었죠. 주위를 봐도 이쪽 선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음악, 연극, TV 이런 것 통틀어서 다른 분야 사람들이 영화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요. 언젠가는 꼭 한번 영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80년대만 해도 분장 같은 것도 제가 직접 했어요. 지금은 전문인력들이 다 붙어서, 영화가 선도하는 느낌이 있어요. 예전에 헐리우드가 패션 선도했듯이. 우리 분야의 각 엘리트들의 참여도 많아졌고.

그 다음으로 큰 힘을 얻게 된 것이 디지털이에요. 몇 년 사이에 우리도 헐리우드 못지 않은 영상미를 보여줄 수 있게 됐어요. 예전에는 카메라 한 대로 찍고 찍고 했는데, 지금은 사방에서 찍고 들어가니까 장면 이음도 좋아졌고. 카메라도 싸지고 모든 기재를 거의 동등하게 쓰게 되니까 우리 영화도 손색이 없죠. CG도 나름 잘하고 경쟁력이 높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일의 분량은 훨씬 많아졌어요.

-연기는요?

아주 잘들 해요. 주연배우는 말할 것도 없고 조연도 뛰어나고 심지어 단역 하는 분들도 영화에 대한 헌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영화가 섬세해졌어요. 예전엔 뒤에 엑스트라는 뭘 해도 별 상관 않고 찍었어요. 나중에 보면 울고 있어야 하는데 웃고 있는 장면이 진짜 많았어요. 요즘은 현장에서 모니터도 두개 세개 놓고 다 체크를 하니까.

모니터를 보기 시작하면서 연출자와 연기자의 호흡이 좀 끊긴다는 말이 있긴 해요. 직접 연기자 모습과 감정을 보고 했던 때와 지금 모니터로 진행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소통이 미진한 것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기술적인 변화 과정에서 겪는 일이고 지금은 익숙해져서.

산업화하면서 상업화한 것도 많죠. 예전엔 감정이 섞여 비벼졌다면 이제는 비벼지는 것 없이 매끄럽게 잘 잘려져 있는. 그것의 편안함이 있다면 아쉬움이 있고, 그런 양면은 늘 있는 것 같아요.

-대선배인 셈인데 연기 수업이나 지도도 해주세요?

전혀. 저는 누구를 가르치거나 심사하거나 이런 능력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 참 싫어해요.

-후배가 멘토링을 청하진 않나요?

그러진 않아요. 뭐, 어쩌다 얘기할 게 있으면 지금 이런 식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영화에 대한 생각, "뭐, 이런 게 좋지 않겠나" 이런 얘기는 하는 기회가 자주 있죠.

-혹시라도 진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세요? 뭘 유념하라든가.

계속 준비하라는 거죠. 준비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신인도 마찬가지고, 준비가 잘돼 있으면 언제든지 뽑혀요. 뽑혔는데 준비가 안 돼 있으면 그렇게 몇 년 또 가요. 준비가 잘 돼 있으면 바로 뽑히고, 그 다음이 바로 연결이 돼서 일을 계속 하게 돼요.

그러니까 자기한테 굉장히 철저하게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으면 자기는 계속 할 수 있어요. 자기를 놔버린다거나 다른 데서 뭘 찾아보려고 한다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러면 곤란해요. 뭘 해도 불안한 미래인데, 자기가 준비를 잘하고 있으면 된다고 늘 생각해요.

-시나리오도 써보셨는데 앞으로 제작에 대한 꿈은 없으세요?

아뇨. 제작, 감독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건 다른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외국은 감독 겸한 배우도 많잖아요?

외국은 아마 시스템이 잘돼 있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경우에도 배우 때보다 훨씬 더 좋은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쪽은 시스템적으로 감독을 보호해주는 장치들이 잘돼 있는 반면에 우리는 감독 일이 너무 많아요. 부담스러운 일도 상당히 많고. 감독들 고충을 아는데 고통스러움에 들어가보려는 용기도 안 나요.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창작 열망이 넘쳐야 해요. 그것 없이 한번 해봐야 되지 않겠나, 이래서는 성공하기 어려워요. 시나리오가 아주 좋아도 성공하기 힘든데 애매한 상태에서는 어렵죠.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어떤 세계를 그려보고 싶다, 그런 게 없는 거죠.

저는 그냥 연기하는 것 이것만 해도 아직 멀었다, 좀더 훌륭한 연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진짜 날마다 보면서 아쉽다 아쉽다 그래요.(웃음) 성격 탓도 있을 거예요. "좋아" 이게 아니라 늘 "아, 저때 분명히 최고의 감정, 최고의 표현이 있을 텐데.." 안타까워하죠.

늘 선택의 상황에 놓이는데 이쪽을 택하면 다른 쪽이 아쉬운 거죠. 이렇게 했으면 다른 방향으로 갔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주 죽을 맛이에요.(웃음) 연기만 해도 이렇게 생각할 게 많은데, 연출 제작 쪽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는 것 같고, 그건 또 다른 그릇이라고 생각해요.

-완벽주의자라는 생각을 본인도 하세요?

그런 것 있어요.

-오늘 말씀 듣다보니 양면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낙천적이라고 하면서도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것도 그렇고.

그럼요. 그런 것 있어요. 그런 게 있으면서, 또 "아이, 뭐 그럴 수 있지 뭐, 다음에 보지 뭐" 이러고.(웃음)

-책은 얼마나 읽는 편이세요?

사실은 많이 못 읽는 편이에요. 특히 촬영 중에는 거의 다른 책을 안 읽어요. 촬영 끝나고 좀 편안할 때 읽는 편이죠. 가끔씩 조금씩 읽는 편이에요.

문학을 좋아해요. 인문서는 좀 어렵고. 이번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받은 한강 작가를 보니 예전에 이상문학상 수상작(2005년 중편 '몽고반점'으로 수상)이 생각났어요. 굉장히 강렬한 작품이었다는 기억이 나요. 소설을 좋아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잘 못 읽었어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은 1회부터 한동안 계속 사 봤어요. 소설을 볼 때도 영화적으로 봐요. 인물을 보면서 영화적인 시나리오, 장소 같은 것도 설정해가면서. 배우를 하다 보니까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감성, 어떤 표현 같은 것들에서 얻는 게 많아요.

-최근에 읽은 책이라면요?

최근엔 다시 꺼내 읽게 된 게 있어요. 최인호 작가의 '인생'이에요.

최인호 작가의 말


이 책 속에 실린 글들은 2008년 5월 첫 수술을 받고 난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1부는 가톨릭 <서울 주보>에 5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인데, 일종의 묵상록(默想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얕은 신앙인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은 건방진 일이다. 2부는 수상(隨想)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며 굳이 이름 하자면 연작소설이라 할까.


법정 스님에 관한 글은 2010년 9월에 쓴 미공개 작품인데 문학지에 발표하려다가 주제넘은 것 같아 그냥 갖고 있었던 단편소설이다. 어쨌든 신작들이니 나로서는 힘겨운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책 속에 낱장으로 들어간 삽화(揷畵)는 1994년 1월, 성 이냐시오 피정을 하던 어느 날 내가 그린 상상화인데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두메꽃」이란 시도 나오고 해서 내용을 충실하게 설명하고 싶어 넣은 것이니 치기(稚氣)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글들이 종교적이어서 보편적인 것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작가는 어차피 그때그때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들을 쏟아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우연히 올해가 문단에 나선 지 정확하게 50년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반세기 동안의 작가 인생을 기념하는 문집인 셈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춘문예에 입선함으로써 데뷔했는데, 그동안 명색이 작가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지냈음이 문득 느껴져 부끄럽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한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어서 어서 꽃 피는 춘삼월이 왔으면 좋겠다. 혹여나 이 책을 읽다가 공감을 느끼면 마음속으로 따뜻한 숨결을 보내주셨으면 한다. 그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을 피울 것이다.


/등단 50주년에 펴내는 신작 작품집에 붙여

생전에 형이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출간된 책이죠. 암 수술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힘든 투병 생활하면서 고통 속에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고 쓴 글이에요. "작가로 죽고 싶다" 이렇게 외칠 정도로.

제가 명동성당에서 조사도 읽었잖아요. 그 정도로 좀 특별한 관계였어요.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까 남은 날이 적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어떻게 또 살아갈 것인가 마음가짐, 이런 걸 자꾸 생각하게 돼요.

이 책은 고백에 가까운데, 가톨릭 주보에 쓰신 거예요. 신자들이 굉장한 즐거움을 갖고 이 글을 읽었어요. 왜냐 하면 하느님한테 글로 막 대들고 그랬거든요. 어리광도 부리고. 보통 신자들은 글 쓸 때 그렇게 못 쓰잖아요. 뭔가 파격을 보여주니까 신도들이 굉장히 좋아했는데, 나중에는 거기서 나오는 어떤 순수함 그런 것도 많이 느끼게 되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잖아요. 남은 시간에 이것만큼은 해봐야겠다는 게 있나요? 오직 연기인가요?

그렇죠. 영화 속에서 모든 얘기를 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그래요. 그게 좀더 충실하게 삶을 얘기하는 것 같고, 깊이를 갖고 사는 것일 것 같아요.

예전에 젊었을 때 책을 마구 읽은 적이 있었어요. 다독을 했어요. 무슨 책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왜냐 하면, 제가 고등학교 때 책을 많이 못 읽었어요. 기회가 참 없었어요.

그래서 군대 가서는 문고판 다 가지고 OP(관측소)에 올라가서 하루에 한 권씩 읽어대고 했거든요. 그때는 읽는 재미를 느꼈다기보다 욕심만 나가지고. 그리고 영화 시작한 후에도 배우(연기자)는 책을 읽어야 된다고 얘기도 많이 했고 그런 식으로 살려고 했어요.

그런 식으로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갖고 살다 보면 나중에 지금 제 나이가 되면 거의 철학자가 돼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지금 내 모습을 보면 한참 모자란 것 같아요.

사람 좋다는 이야기는 듣는데, 나름의 어떤 깊이 있는 생각 같은 것은..., 하여튼 지금은 세상이 좀 변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굉장히 가벼워진 세상이기 때문에 나도 같이 가벼워진 감이 사실은 있다고 보는 거지요.

90년대 중반이 되면서 영화도 산업화되고 자유민주화되면서 자본의 힘이 커지면서 그전까지는 영화가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해야 되고 어떤 이야기를 통해 대중을 일깨운다는 식의 의식들이 조금은 있었거든요.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에 엔터테인먼트로 많이 갔다는 거죠.

물론 소수의 작품은 굉장히 작가주의 영화로 서 있지만. 대개는 관객과 만나지는 부분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까, 그리고 영화에서 더 이상 진지한 것을 찾으려 하는 것 같지 않고, 그건 다른 분야, 다른 매체에서 찾고 영화는 그냥 즐겁게 해주라, 이런 쪽으로 많이 대하는 것 같아요.

예전엔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영화감상, 독서, 이랬잖아요. 지금은 영화감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나요? 영화는 그저 즐겁게 보고 그 시간은 날 잊어버리게 해주는 그런 것이 됐죠. 정말 소수의 작품만 오래 명작으로 남는 거죠.

그러니까 요즘은 배우의 모습도 제가 젊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더 (겉)멋스러움이 있어야 되거든요. 예전에는 군복, 이런 것 물들여서도 많이 입고 다녔잖아요, 학교 다닐 때. 지금은 그러면 아주 꾀죄죄하다고 보지요. 사람들 생각이 많이 바뀌어 있으니까 나도 그쪽으로 많이 바뀌어져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생각했던 나의 모습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예전엔 더 진지하셨나 보죠?

진지하게 생각했고... 그러니까 그때 세상이 좀 그랬던 거죠. 그때는 제 나이 정도 되면 굉장히 좀 어른스럽고 자기 세계를 이야기하고 좀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이랬는데. 지금은 그것보다는 훨씬 가볍다는 거죠.

-아까는 어른 행세하는 것 싫다고 하셨는데요.

아, 그건 에너지의 문제지요. 다른 문제였어요. 그건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고 싶다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지금도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존재감과 더불어 있어야 한다고 봐요. 노쇠하면 상대도 맥 빠지게 하는 일이니까.

세상 일이 늘 선택 상황에 부딪히는데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은 어떤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좋은 의미의 마음의 어떤 타협이 있는 것이고 적절함 속에서 살아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인 경우에는 작가와도 달라서, 작가라면 "너무 상업화된 세계는 싫어" 이러면서 나만의 세계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의미 있는 것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배우는 사실 그런 삶이 힘들긴 해요.

-그래도 여기 CGV에 이름을 딴 안성기 헌정관도 생긴 걸 보면 잘 살아오신 것 아닌가요.

이 아래층에 예술영화 상영하는 독립영화관이 있는데, 거기가 너무 귀퉁이에다 이름도 없이 있는 것 같으니까, 독립영화 관객들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헌정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죠.

좀 더 알리기 위한 것이 있고 또 거기 수익금 일부는 독립영화 지원도 하고. 앞으로는 분기에 한 번 정도는 관객과의 만남도 주선하고, 독립영화 쪽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하려고 해요. 지난달에도 와서 회의를 했어요.

-좋든 싫든 한국 영화의 간판이신데 책임감 같은 것 많이 느끼세요?

물론 그런 건 있죠. 나 개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예전부터 생각이, 처음 영화 시작할 때는 이쪽이 존중받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 그런 분위기에서 일을 하는 집단으로 비쳤지만, 젊었을 때 일을 하면서 영화를 하면서도 진짜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어요.

요즘 분위기가 상당히 거기까지 간 것 같아서 다행이고 고맙게 생각하지요. 헌정관에 이름을 붙인 것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가 있거든요. 용기를 주고 우리가 함께 나아가는, 그런 역할을 앞으로 계속 잘 해나가야 되겠죠.

-긴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순서로는 누구를 추천하고싶으세요?

가수 김수철 씨를 추천합니다. 영화 '고래사냥'(1984)에도 같이 출연했습니다만 그전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입니다. 꾸준히 한길을 가는 고집과 끈기를 좋아합니다. 늘 철들지 않은 아이 같은 모습도 좋구요.


작성자 정보

북클럽 오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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