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권력자 앞에서 박수가 멈추지 않는 이유

조회수 2016. 10. 5. 21: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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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박산호의 '책바다에서 헤엄치기'(4) 독재자 이야기 ①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장르 소설 번역가 '코랄' 박산호[책바다에서 헤엄치기] 4화입니다. 번역을 하다가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독재자 이야기입니다. 우리 귀에도 익은, 하지만 어떻게 나고 자라고 흥하고 멸했는지는 잘 모르는 인물입니다.


그나저나 최고 권력자 앞에서 박수로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은 어디나 같군요.

지난해 베스트셀러 중에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이 있었다. 먹고 살기 바쁜 한국인들을 겨냥해 다방면의 지식을 일상 대화에 쓸 수 있도록 쉽게 풀어준다는 전략이 주효했던 모양이다. 나는 굳이 읽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넓고 얕은 지식'에 관한 한 웬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직업적인 이유에서다.


번역가는 새 책을 맡을 때마다 내용은 물론 관련 분야를 속성으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 가령 요리책을 번역할 때는 거기 나온 요리들을 직접 하진 않아도 가능한 먹어보는 성의는 있어야 하고, 클래식 음악 책이라면 음악을 들어보는 것은 기본이고, 관련서 몇 권 정도는 따로 공부도 한다.


그렇다 보니 바흐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절대 음감의 광대 이야기를 번역할 때는 내내 바흐만 듣다가 덩달아 팬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벼락치기가 그렇듯 번역이 끝나면 머릿속에 우겨넣은 지식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기 쉽다는 게 문제다.


그래도 모든 법칙엔 예외가 있는 법. 번역을 맡은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에 매료돼 필요 이상의 많은 자료를 찾고 책 내용과 직접 상관없는 공부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차일드 44>란 소설을 번역하면서 만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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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33년 1월 25일 우크라이나의 체르보이라는 마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리아는 죽기로 결심했고, 이제 고양이는 혼자 살아가야 했다. 마리아는 이미 가죽 부츠를 가늘고 길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 쐐기풀과 근대뿌리 씨를 넣고 끓여 먹었다. 지렁이를 잡아먹으려고 흙을 파기도 했고, 나무껍질을 빨아먹은 적도 있다. 오늘 아침에는 열에 들떠 혼미한 상태에서 부엌에 있던 걸상을 이빨로 갉아서 잇몸에서 나뭇조각이 튀어나올 때까지 씹어 먹었다. 주인을 본 고양이는 침대 밑으로 냉큼 숨었고,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름을 부르며 꾀는데도 한사코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식량도 없고, 애정을 쏟을 대상도 없어진 바로 그때 마리아는 죽기로 결심했다.'

이 도입부를 번역하면서 나는 작가가 묘사한 참상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역자 후기를 쓰기 위해 역사 자료를 찾아보다가 또 한 번 놀랐다. 소설은 마리아가 놓아준 고양이를 사냥하러 나선 어린 형제에게 비극이 닥치면서 결국 44명의 아이가 살해된다는 이야기인데, 역사적 배경이 바로 1932~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었고, 5백만~천만 명의 아사자를 낳은 인위적 기근의 주범이 스탈린이었다. 

소설에는 이런 대목까지 나온다.


'어른들은 개미나 곤충 알이 있을까 싶어서 흙덩어리를 씹고, 아이들은 미처 소화되지 못한 낟알 껍질이라도 섞여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말똥을 쑤석거리고, 여자들은 뼈다귀 하나를 가지고 몸싸움을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체구가 졸아들었고,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늙어버렸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남의 아이를 사냥하는 부모까지 나오는 대목에서는 망연자실했다. 실제로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인육을 먹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이를 소재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구울>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 개봉됐지만 역사적 사실보다 흥미 위주의 삼류 영화라는 혹평을 받았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상영 금지됐다. 나는 스탈린이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1878년 12월 6일 그루지야의 고리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요시프 비사리오노보치 주가시빌리였다. 아버지는 주정뱅이 구두 제조공이었다. 신앙심이 깊은 엄마는 걸핏하면 아들을 때리는 남편을 쫓아내고 삯바느질로 아들과 가난하게 살았다.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던 엄마는 스탈린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신학교에 보냈지만, 시 잘 쓰고 머리가 뛰어났던 스탈린은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을 읽고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 삶은 파란만장했다. 1898년 소규모 사회주의자 단체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를 쉽게 설명하면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일곱 번이나 붙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됐지만 여섯 번 탈출했다. 요시프 스탈린으로 개명한 것도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스탈린이란 '강철의 사나이'란 뜻이었다.


1917년 공산 혁명과 러일 전쟁이 그에게는 기회였다. 레닌을 비롯한 공산당 고위 인사들이 해외로 나갔을 때 스탈린은 수도에 남아 조직을 장악했다. 1922년 당의 총간사가 된 데 이어 레닌이 뇌출혈로 쓰러진 후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경쟁자였던 트로츠키는 외국으로 탈출했다가 끝내 멕시코시티에서 암살됐다.

스탈린은 레닌의 공포 정치와 비밀경찰을 물려받아 러시아 전체로 확대했다. 서유럽 강대국을 10년 안에 따라잡겠다며 5개년 경제계획(우리나라도 1970년대에 이를 모방했다)을 추진하고 농업 집단화 정책도 폈다.


이 과정에서 끔찍한 희생이 따랐다. 자산 몰수에 불응하는 농민은 강제추방당하거나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당시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이 비옥한 곡창 지대였던 우크라이나였다. 스탈린은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곡물 5백만 톤을 빼앗아 수출했다.


종교는 금지하는 대신 자신을 우상화하는 한편, 공포 정치를 극대화했다. 당원들은 충성심을 의심받을까봐 누구도 먼저 박수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종료 신호를 주는 종까지 등장했다. 소설에도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사랑하는 스탈린 동지'를 찬양하는 박수를 멈추지 않아 교사가 애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충성심을 의심받아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최소 연령이 12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살아남은 농민들은 스탈린이 지은 공장에서 일했다. 임금은 낮았지만 무상 의료 혜택과 값싼 임대 주택, 퇴직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농민 대다수가 까막눈이었지만 10년 후에는 평균 교육 수준이 서방과 비슷해졌다. 스탈린은 이 모든 업적의 영웅으로 선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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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된 국민은 대규모 아사 뒤에 스탈린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소설의 주인공 레오도 그런 사람이었다. 전쟁 영웅이자 비밀경찰 MGB(KGB의 전신)인 그는 '국가의 적'을 쫓는 자신의 일이 내키지 않을 때도 있지만, 혁명을 수호하고 만인이 평등한 이 사회를 내부의 적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스탈린의 말년은 불행했다. 큰 아들은 죽고 둘째 아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자신이 싫어하는 유대인과 결혼을 고집한 딸과는 결국 절연했다. 친구들은 거의 다 그의 손에 죽었거나 수모를 당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1953년 1월 그는 소련에 사는 유대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수백 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3월에 뇌혈관이 터졌고 며칠 후 사망했다. 유대인 검거 당시 자신의 주치의까지 포함되면서 그를 진료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소설 속 주인공 레오 부부는 스탈린의 죽음 덕분에 유배지로 끌려갈 운명을 가까스로 피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에서 시작된 이 소설은 스탈린 공포 정치의 첨병인 주인공 레오의 눈을 통해 갖가지 참상을 '소설처럼' 그려낸다. 인간이 가장 연약해지는 시간이라는 새벽 4시에 속옷 바람으로 체포되는 사람들, 살아남기 위해 이웃과 친구와 가족까지 고발해야 하는 현실.


거기에는 살인, 강간, 도둑질 같은 '자본주의적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죄부까지 더해지면서 44명의 소년소녀들을 살해한 연쇄살인범까지 날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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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역사 속의 참극과 흉물스런 독재자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과연 그럴까. 지금도 권력의 난폭함은 곳곳에서 데자뷔처럼 출몰하고 있다.


게다가 스탈린은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에는 미국의 원폭 투하뿐 아니라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만주 관동군을 격파한 것도 일조했다는 해석이 있다.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이 1953년 정전 협정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그해 스탈린의 사망이 큰 원인이었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1991년 소련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스탈린으로 집약되는 독재와 전체주의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뒤를 이은 러시아의 권력자 푸틴은 뿌리깊은 스탈린 향수에 기대어 1인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사실은 또 다른 소설 <레드 스패로우>의 번역을 맡으면서 소상히 알게 됐다. 소설은 허구(fiction)라고 한다. 하지만 소설만큼 실감나게 현실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다음번엔 소설 속 푸틴의 모습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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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산호

한국 외국어대 인도어과와 한양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루넬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3년 ‘못 말리는 유모’ 시트콤으로 영상 번역에 데뷔해 시트콤과 요리 프로를 번역하다가 2005년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영화 <양들의 침묵>에 매료돼 동네 도서대여점의 장르 소설들을 독파하면서 애정을 키우던 중,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스릴러 소설 대가인 매튜 스커더의 <무덤으로 향하다>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번역한 책은 <세계대전Z>, <싸울 기회>, <차일드 44 시리즈>, <레드 스패로우>, <100세 혁명>, <퍼시픽 림>, <솔로이스트>, <비독 소사이어티>, <도살장>,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등 60여 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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