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북] 책장이 곧 나입니다

조회수 2018. 8. 18. 22: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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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떠나보내며> 의 저자 알베르토 망겔 이메일 인터뷰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독서가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작가 알베르토 망겔 인터뷰입니다. 최근 그의 에세이 <서재를 떠나보내며>가 번역돼 나왔습니다. 원제목은 Packing My Library(2018년 3월 출간)입니다.


2015년 개인적인 사정으로 넓은 서재가 딸린 프랑스의 시골집을 떠나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면서 3만5천여 권의 장서를 정리하던 중에 피어오른 단상들을 글로 썼습니다.


두 달 가까이 간격을 두고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그의 신상에 변동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맡고 있던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직을 떠나 다시 읽고 쓰는 작가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독서 내력과 취향, 책과 읽기의 전망 등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독서를 단순히 여러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겸손한 표현이다. 내게 독서는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며, 모든 체험에 영향을 주면서 그걸 좀 더 견딜 만하고 나아가 좀 더 합리적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영어에서 read(읽다)라는 동사는 reason(추론하다)이라는 동사와 어원이 같다.


내게 이해가 필요한 어떤 일이 벌어지면 나는 그 일을 내가 이미 읽은 것과 비교해본다. 내가 그 벌어진 사건의 모델을 발견하는 데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경우 나의 독서 행위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모델을 제공하는 페이지에 아직 접근하지 못했거나 그 페이지를 과거에 이미 읽었는데 지금은 잊어버린 탓일 거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좀 더 현명한 독자에게는 모든 책의 모든 페이지가 지금 딱 필요한 대답 혹은 설명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우주를 반영하지 않는 텍스트는 없기 때문이다. 나의 독서 범위는 제한적인 편인데, 내가 종종 유익한 힌트를 찾아내는 책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들, <돈키호테>,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집 등이다. 나는 이런 책들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나는 이런 독서 목록이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목록은 누가 우리의 친구이고 또 누가 우리의 친구가 아닌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몽테뉴를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독자, 무인도나 죽음의 병상에 몽테뉴의 <수상록>을 가져가겠다는 독자라면 나의 벗이 될 수 있음을 안다.


반면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나는 그와 함께 카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애독서 목록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 사람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여부도 미리 알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이다.


<서재를 떠나보내며>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책과 독서에 관한 책을 많이 내셨지요. 이번에는 사적인 서재에 관한 책입니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쓰시게 되셨지요?

프랑스에 있던 저의 서가를 포기하고 인생의 새로운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장을 시작해야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경우, 어떤 상실이 한 편의 엘레지(elegy)를 쓰도록 이끕니다.

-개인적인 서가를 따로 갖는 것의 가치나 의미라면?

적어도 저에게 서가란 친구들과 목소리들, 그리고 약속들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로서는 개인 서가가 사치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당신은 비디오 게임과 아이폰 같은 기기들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지요? 피자나 청량음료에는 얼마나 쓰지요? 책은 그런 다른 불필요한 것들보다 훨씬 돈이 적게 들 수 있습니다.

-파리 시절 자택 서재의 장서가 3만5천 권이라고 쓰셨더군요.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분류하셨지요?

그 서재의 주 독자가 저였기 때문에(제 파트너는 자신의 책 대부분을 집 안의 별도 공간에 두었습니다.) 제가 자연스럽게 책을 관련지우는 방식으로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책의 원어에 따라 몇가지 주요 구획을 짜서 구분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경우 제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저는 러시아어를 못 하기 때문에) 번역서이긴 하지만 러시아 도서 칸에 꽂아 두는 식이었지요.

한국어 책도 칸이 작긴 하지만 그렇게 정해 꽂아 두었습니다. 홍명희의 고전 '도적 임꺽정 이야기'도 프랑스어 번역본이 거기에 있었고, 현대 시인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도 영어 번역본이 있었습니다. (황지우 시인이 손으로 쓴 시-물론 한국어-가 적힌 부채도 그 칸에 있었지요.)

이런 큰 원칙에 몇 가지 예외도 있었습니다. 추리 소설과 요리책,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신학책, 단테와 보르헤스의 작품 등등은 별도의 칸을 정해 두었습니다.

-서가에 NYT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은 거의 없다고 쓰셨더군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런 목록들은 상업적인 목록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그 다음 주까지 살아남아 있지도 않을 책들로 구성돼 있지요. 일종의 출판계의 '그달의 취향' 같은 거지요.

-좋은 책 외에 '끔찍한 책'도 예를 들기 위해 수집해 놓았다고 쓰셨지요. 어떤 책이 '끔찍한 책'인가요? '좋은' 책은 어떤 책인가요?

물론 저의 취향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좋아하고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제가 '좋다'고 호명하는 책이 됩니다. 책 읽기는 누적적인 과정입니다. 어떤 책을 집어 들 때마다 그 동작 이면에는 그전까지 수많은 세월 동안 읽어온 책을 골라 집어든 경험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전의 것에 덧쓰기 방식을 통해 새 책을 읽는 거지요.

우리가 어떤 책을 '좋다'고 보는 것은, 우리가 그 책을 읽는 시점에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으며, 그때까지 우리의 이전 경험이 무엇이었느냐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결코 '처음으로' 읽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책을 펼 때마다 매번 이전에 읽은 책들, 그 순간 느끼는 기분, 그 책에서 찾고 싶은 것에 의해 마음이 눌려 그 책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책을 우리의 경험 속으로 번역해 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번역된 것들이 유동적이 되고, 어떤 단어와 주인공, 상황 들이 우리 안에서 메아리치면서 온갖 다양한 감정들을 촉발한다면, 우리는 그 책을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콘텐츠도 과잉인 시대 같습니다. 쏟아지는 책들 속에서 선택에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개인만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직접 읽기를 시도해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선택한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관두면 됩니다. 읽기가 의무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독서가로서 오랫동안 많은 책을 읽어오셨지요. 그동안 취향의 변화를 느끼시나요?

저는 언제나 모험 이야기, 심리 스릴러, 모호성과 아이러니를 즐겨왔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유년기에는 철저히 모험을 원했을 뿐 사실의 기술과 철학적 통찰은 피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즐깁니다. 아마 느리게 읽는 독자가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또 저는 언제나 시를 즐겨왔지만 유년기에는 낭만주의와 후기낭만주의, 모더니즘 작가들을 열렬히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보다 꾸밈이 없는 시, 우리 시대의 경구에 가까운 것들을 훨씬 선호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감상적인 독자입니다.

-특별히 좋아하거나 피하는 장르나 책들이 있나요?

피하는 책은 정치 회고록, 서부극, 첩보 이야기(존 르 카레는 예외입니다), 문학적 가치는 없는 비밀 회고록, 자기계발서, 파울루 코엘료.

좋아하는 책은 추리소설(특히 황금기 시절의 작품들), 토마스 브라운 경, 보르헤스, 세르반테스, 단테, E. M. 포스터, R. L. 스티븐슨, 후안 룰포의 소설들, 아이작 디네센(<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저자인 카렌 블릭센), 앨리스 먼로의 이야기들, 루이스 캐롤의 전 작품, 쇼펜하우어, 플라톤, 일리아드, 세이 쇼나곤, 십자가의 성 요한,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등등 그밖에도 많습니다.

-당신과는 대조적으로 보르헤스는 생전에 개인 서재에 수백 권 정도만 가지고 있었다고 쓰셨더군요. 두 사람의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한다고 보세요?

보르헤스가 애착을 느낀 것은 책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텍스트였습니다. 저는 책이 말해야 하는 것 못지않게 책의 물리적 현존을 좋아합니다.

-왜지요?

저는 물신숭배자입니다. 종이의 촉감, 제본과 잉크 특유의 향, 책을 제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함 같은 것들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어휘(amorous vocabulary)를 사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침상(잠자리)으로 가져가서, 표지(겉옷)에 손을 얹고, 책장(얇은 천)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지듯 밀어넣습니다.

프랑스인들은 'jouir de la lecture'라는 표현을 씁니다. 독서에서 쾌락을 찾는다는 뜻으로, 오르가즘에 이르렀을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요.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작가 베르고트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작가의 책들이 서재 윗칸에 3-4권씩 줄지어 꽂혀 있는 것을 두고, 그가 깨어있는 동안 긴 밤 내내 날개를 펼친 천사들이 그들의 독자(베르고트)의 몸 위에서 지켜보는 장면처럼 묘사했습니다. 저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제가 침상에서 죽을 때도 아마 저의 많은 책들이 빚어내는 어두운 형체들의 호위를 받고 있을 겁니다.

-디지털 기기는 멀리하시는 편인가요?

멀리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즐기지 않을 뿐이지요. 가상 섹스를 즐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제게 읽기란 저 자신의 모든 것이 개입하는 물리적 행동이어야 합니다. 저의 신체와 책의 몸이 상호작용하는 거지요. 저는 유령을 상대하는 시간은 힘들어 합니다.

몇 년 동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준 많은 행운아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방과 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영어/독일어 전문서점에서 일을 했는데, 보르헤스가 그 서점의 단골이었다. 피그말리온은 문학 애호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중략)


국립도서관장을 지내던 보르헤스는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물녘에 피그말리온에 들렀다. 하루는 책 두어 권을 고르더니, 아흔 줄에 접어든 어머니가 쉬이 지친다면서 내게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저녁에 집에 와서 책을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보르헤스는 거의 아무에게나 그런 부탁을 하곤 했다. 학생들, 인터뷰하러 찾아온 기자들, 다른 작가들에게도 그랬다. 한 번이라도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준 사람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는 모르더라도 한데 모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독자의 기억을 구성해낼 수 있는 작은 보스웰(영국의 전기 작가)들, 숨은 전기 작가들인 셈이다.


당시엔 그 사람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내 나이 열 여섯 살이었다. 나는 그의 청을 수락했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어머니와 가정부 파니가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로 보르헤스를 만나러 갔다.


그땐 그게 일종의 특권이라는 걸 까맣게 몰랐다. 보르헤스를 너무나 존경했던 우리 고모는 무덤덤한 내 태도에 거의 분개하다시피 하면서 그를 만날 때마다 기록을 해두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보르헤스와 함께 지내는 저녁 시간은 특별할 게 없었고(건방진 사춘기였으니) 늘 내 것으로 여겨왔던 책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다른 대화들이야말로 이질감이 들고 지루했다. 선생님들이 화학이나 남대서양의 지리에 대해 하는 얘기, 친구들의 축구 얘기, 친척들이 내 시험 결과나 건강에 대해 물으며 하는 얘기, 동네 사람들이 모여 다른 이웃들에 대해 주고받는 얘기들이 전부 그랬다.


하지만 보르헤스와 나누는 대화는 내가 생각하기에 모름지기 대화란 그래야 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책에 대해, 책의 태엽장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들과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 또는 확신 없이 직관적으로 얼핏 스쳐갔던 것들을 보르헤스의 목소리로 들으면 그 짙고도 명백한 광채 속에서 그것들은 찬란하게 반짝였다. 기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와 마주 앉은 저녁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중에서

-당신의 옛 영웅이었던 보르헤스를 이어 국립도서관장직을 맡게 되었을 때 소감이 어땠나요?

대단히 과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보르헤스의 뒤를 이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 우뚝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코 저는 아닙니다. 그는 도서관의 상징이었습니다. 저는 겨우 행정가에 불과합니다.

-보르헤스나 당신에게 도서관은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우주를 도서관에 비유했고, <드림타이거>에서는 "나는 언제나 천국을 일종의 도서관일 거라고 상상했다"고 썼지요. 당신은 도서관은 '불완전한 질서의 꿈'이라고 표현했더군요.

우주는 아름다운 혼돈이고, 우주의 이미지를 따서 지어진 도서관은 그 혼돈에 (아무리 불완전하게라도) 질서를 주려는 시도라는 뜻입니다.

-국립도서관장직을 맡아보니 어떤가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실용적인 이유에서 도서관에 살고 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사무실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합니다. 국립 도서관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기억의 저장고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최대한 많이 수집해야 합니다. 최신 서지목록을 갖고 있어야 하고, 모든 독자들이 어디에 있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디지털화해야 합니다. 공공 도서관은 납본 제도를 통해 (전국 출판사들로부터) 책을 받는 동시에, 해외 출판사들로부터 구매도 해야 합니다.

-일상의 의례적인 일과(ritual)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읽기와 쓰기는?

지금은 국립도서관장을 맡아서 행정적인 업무에 쫓겨 바쁩니다. 그러다 보니 읽기와 쓰기를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이른 아침의 읽기와 아침식사 후 점심 전까지의 쓰기, 그 다음 오후와 저녁의 산책과 사색, 읽기에 이르는 판에 박힌 일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두 번째 이메일 문답) 이제는 일상적인 읽기와 쓰기로 복귀하셨나요?

지난주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기 동안 나 홀로 시간을 내 읽고 쓰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도서관장직에는 엄청난 행정 업무가 뒤따릅니다. 각종 숫자와 관료적 규제와 씨름하느라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일상적인 읽기와 쓰기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아주 일찍 일어나서 차 한 잔을 들고 책상으로 가서 정오까지 쓰고 점심 식사를 한 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읽을 겁니다.

-당신은 일찌기 시력을 잃은 보르헤스를 위해 책을 읽어준 사람 중 한 명이었지요. 보르헤스와의 추억이나 그가 한 말 중에 지금도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가령 이런 말들입니다.

"독서는 지시될 수 없다. 행복이 의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쓸 수 있는 것을 쓰지만 독자는 읽고 싶은 것을 읽는다."

"발생하지 않는 계시의 임박성은 미학적 사실일 것이다."

"망각은 최선의 복수다."

"정치는 사람이 떠맡으려고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에 가장 비루한 것이다."

"확정적 텍스트라는 개념은 종교 아니면 (피로로 인한) 마비에 해당한다."

"모든 작가는 자기 자신의 선구자들을 만들어낸다."

"번역은 원본의 또 다른 초고이다. 다른 언어로 옮겨졌을 뿐."

"우리 모두 죽기 전까지는 불사의 존재다.

다른 많은 일화들은 저의 책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With Borges)>에 썼습니다.

보르헤스에게 책읽기는 자신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이를테면 행동이 앞서는 사람, 세기의 연인, 위대한 전사. 그에게 독서는 일종의 범신론, 스피노자가 관심을 가졌던 고대의 그 철학적 사상체계다. 나는 그의 단편 '죽지 않는 사람(El Inmortal)'을 언급한다. 호머가 죽지 못하고 여러 이름으로 몇 세기에 걸쳐 살아가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보르헤스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한다.


"범신론자들은 단 한 존재, 즉 신만이 거하는 세계를 상상했고, 신은 우리를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꿈꾸는 거야. 이 철학에서 우리는 신의 꿈인데, 우리는 그걸 몰라."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중에서

-일상이 디지털화하고 자동화하면서 책(특히 종이책)을 읽는 사람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읽기에서도 양극화를 볼 수 있습니다. 소수의 열성적인 독자들은 더 많이 읽는 반면, 다수는 그 반대로 가는 양상을 보입니다. 아르헨티나는 어떤가요?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책 읽는 사람은 전체 인구에서 작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독서가 즐거움과 지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지적인 행동을 비하해 왔습니다. 그리고 빠르고 쉬운 것을 공통의 가치로 설정했지요.

우리 사회의 거의 전부가 빠르고 쉬운 것의 가치를 편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그런 가치에 반하는, 느리고 어려운(긍정적인 가치라는 의미를 동반한 어려움) 무엇을 택하도록 설득하기란 대단히 힘이 듭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에게 다른 방향으로 가르치는 것을 시도해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서 잘 쓴 에세이의 효과가, 일관성도 없고 신경질적인 트윗보다 훨씬 못한 시대에 그렇게 하기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층, 디지털 네이티브는 모바일 여흥거리에 점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 생산/소비의 패러다임 전환 같은 것을 예상하시나요? 책과 작가, 독자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인간인 한 독자로 남을 것입니다. 페이지로 읽든 스크린으로 보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자살적인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종이 얼마나 오래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립도서관장으로서는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교사들을 상대로 독서의 기술(arts of reading)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해왔습니다. 교사 자신이 열정적인 독서가가 아니고서는 학생들에게 독자가 되도록 가르칠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사들에게 읽기의 즐거움을 가르쳐주고, 그들을 열정적인 독자들로 만들어, 그 열정을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떨지 여부를 평가하기에는 지금으로서는 너무 이른 감이 있습니다.

-당신 책 대부분이 한국에도 번역이 됐습니다. 쓴 책 중에 가장 아끼거나 개인적으로 의미가 각별한 것은 무엇인가요?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자식들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지요. 가장 유명한 책은 <독서의 역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크게 아끼는 책이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도한 에세이 글쓰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마 개인적인 친밀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책은 <독서 읽기>인 듯 싶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읽기와 사적인 삶, 공공 환경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모두 사람은 거짓말쟁이> 같은 저의 소설도 좋아합니다. 소설을 통해 작가는 기록된 사실의 제약을 덜 받으면서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탐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준비 중이거나 앞으로 계획하는 저서가 있나요?

12세기 철학자이자 의사였던 모제스 마이모니데스의 짧은 전기를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토라 연구자입니다.

-마이모니데스를 택한 특별한 이유라면?

미국 예일대 출판부에서 의뢰가 있었습니다. 마이모니데스라는 인물에 매료된 이유는 이성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는 이성을 통해 모든 것, 심지어 신앙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외에도 유대교, 아랍, 기독교를 아울러 문명의 다원성에 뿌리를 둔 인물로서 최고의 사례였습니다. 마이모니데스에게 인간의 정신은 하나였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 언어, 문화의 단위로 묶이는 것이 아니었지요. 절대주의와 독단적 사고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습니다.

-요즘 곁에 두고 읽는 책은?

1930년대의 뛰어난 추리소설인 린 브록의 <Nightmare(악몽)>, 매리언 울프의 <The Reading Brain in the Digital World(디지털 세상의 읽는 뇌)>, 라이너 슈타크의 카프카 전기 제3권, 페드로 올라라의 <Historia menor de Grecia(그리스의 소역사)>입니다.

-최근에 읽은 것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은?

에텔 그로피에(Ethel Groffier)의 <Réflexions sur l’université: le devoir de vigilance(대학에 대한 고찰: 경계의 의미>. 우리 시대 대학의 역할에 관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색물이자, 탐욕스런 상인과 기술 지배에 의한 끊임없는 공격에 맞서 인문학을 열렬히 옹호하는 책입니다.

-반복해서 읽는 특별한 책이 있나요?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키플링의 <킴>, 보르헤스의 <드림타이거>입니다.

-이제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셨지요. 지금 나이가 되니 그전에 비해 좋게 생각되는 것이 있나요?

있습니다.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옛날 책과 친구들, 그리고 오랜 습관 속에서 즐거움을 누립니다.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것이라든가, 곤혹스럽게 한다든가, 빠져드는 생각이 있다면?

우리의 광기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도무지 멈추기나 할지 계속해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젊은 세대에 물려줄 지옥 같은 세계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낼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지능(intelligence)을 믿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나요? 최근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자진해서 죽음을 택하고 이행 과정까지 소개된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이지요. 제가 지금까지 읽어온 (제 인생이라는) 책(volume)은 아름답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책에 종결이 없다면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그 대단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없습니다. 하루하루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갈 겁니다. 그뿐입니다.

독자가 선택하기 전의 도서관은 원시 수프, 즉 지구상에 생명을 발생시킨 유기물의 혼합용액과 같다. 거기에 모든 게 들어 있어서 요구만 하면 독자의 소원대로 내준다. 모든 비유, 모든 스토리, 모든 개인 독자의 정체성이 거기에 오롯이 들어 있다. 내가 도서관에서 하는 선택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뽑아 드는 행위는 내가 상상하는 천국의 좌표를 잡아주고 내 정체성을 확립시킨다.


이제 진실을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나의 일상적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나의 이해는 독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어린 시절에 나는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사랑을, 추리소설에서 죽음을, 스티븐슨의 소설에서 바다를 , 키플링의 소설에서 정글을,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서 양탄자의 무늬를, 쥘 베른의 소설에서 놀라운 모험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그런 것들을 실생활 속에서 체험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으나, 그것들을 체험할 때 나는 그것들에 이름 붙일 단어들을 갖고 있었다. 내게 독서는 언제나 아주 실용적인 작도법이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작도해주는 독서의 능력을 철저하게 신봉한다. 나는 서가의 어딘가에 좌정하여 나를 내려다보는 어떤 책의 특정 페이지에 내가 오늘 고통스럽게 씨름하는 문제의 해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존재는 아예 알지도 못하고, 나의 부모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 지구상에 살았던 어떤 사람이 오래전에 써놓은 문장의 글자 안에 문제의 해답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독자와 책의 관계는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관계이고, 16세기의 스페인 작가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가 말한 것처럼 '죽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 대화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그 대화가 나를 형성한다.


<서재를 떠나보내며>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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