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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북] 나는 실존주의 작가

조회수 2018. 2. 24. 11: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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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설 <나의 투쟁> 의 저자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인터뷰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자전적인 연작 소설 '나의 투쟁'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모은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인터뷰입니다.


원서로 총 6권 3622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작가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유년 시절부터 성장 후 결혼, 다시 아버지가 되기까지 40년 삶을 혹독할 만큼 사실적으로 써나간 작품입니다.


현재 우리말로는 3권까지 번역된 상태입니다. (번역자의 건강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고 합니다. 쾌유를 빕니다.)


현재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는 저자와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휴대전화끼리의 장거리 국제 통화여서 혹시라도 장애가 생길까 조마조마하게 이어간 대화가 끊고 나니 43분이었습니다.


애연가로 알려진 대로, 질문을 받고는 잠깐씩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이 이어질 때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내뿜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나는 그때의 아버지 나이에 이르러서야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선 무언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이를 얻기 위해 경험해야 하는 고통이 줄어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삶의 의미도 줄어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너무 작아서 맨눈으로 보기 힘든 분자와 원자들은 확대해야 하고 기상 시스템이나 삼각주, 별자리 등 거대한 것들은 축소해야 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것들을 우리 감각기관의 범주에 배치하고 고정해놓고, 우리는 이것들을 지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유아이와 청소년기에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읽고, 배우고, 경험하고, 수정하는 일을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이런 것들에 대해 적당한 거리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후엔 시간이 점점 빨리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을 멈추려 방해하는 것을 찾아볼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잡고, 시간은 우리 삶 속에서 폭포수처럼 흐른다. 하루하루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우리를 스쳐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사십대, 오십대, 육십대...가 되어버린다.


의미에는 충만함이 필요하고, 충만함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시간에는 저항이 필요하다. 지식은 사물과 현상과의 간격이고, 정체적 상태이며, 의미의 적이다. 1976년 그날 저녁, 내 머릿속에 그린 아버지의 모습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그 당시 여덟 살 소년의 눈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다.


예상이 불가능하고 조금은 두려운 존재.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의 내 눈, 즉 아버지와 비슷한 또래의 성인 남자의 눈으로 본 모습이다. 거쳐간 시간에 따라 삶의 의미가 하나하나 뜯겨져 나간 그런 존재 말이다.


크나우스고르, <나의 투쟁> 1권 중에서

-안녕하세요. 혹시 지금 전화를 받으신 곳은 어디시지요?

지금 차 안입니다. 아이들 치과에 데리고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통화에 문제는 없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곳 시간이 오전 11시(한국은 오후 7시)일 텐데요. 늦은 아침이지요. 이 시간이면 보통 뭘 하시나요?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보통 이 시간에는 일을 합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난 후에 주로 글을 씁니다.

-하루에 글은 얼마나 읽고 쓰세요?

그때그때 무슨 일이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보통은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때 주로 글을 씁니다. 5-6시간쯤. 그러고 난 다음에 저녁 시간에도 좀 씁니다.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하루 12시간, 14시간을 쓰기도 합니다.

-한국에는 대표작 <나의 투쟁>이 3권까지 번역된 상태입니다. 출간된 후로 지금까지 해외 여러 나라에서 반응이 아주 좋았지요. 전문가들도 주목했고 호평도 많았습니다. 쓸 때 어느 정도 예상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 정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그 소설을 쓸 때는 나와 나의 삶에 관한 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책을 낸 출판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대가 높지 않았어요. 그런데 막상 책이 나온 후에 노르웨이에서는 일종의 센세이션을 일으키다 시피했습니다. 책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컸지요. 그 다음 다른 나라에서도 출간되면서 비슷한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그렇게 인기를 끈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제 책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부분을 많이 찾아낸 것 아닌가 싶어요. 어린 시절과 자신의 삶 속에서 겪어온 일들을 떠올린 거겠지요. 최소한 노르웨이에서는 그 책이 그동안에는 대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것들에 대해 서슴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일종의 구실(excuse)을 준 것 아닌가 싶어요.

자기 동일시라고나 할까요. 사람들이 책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알아본 거지요. 그게 적어도 제가 독자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받은 인상입니다. 거의 늘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비슷한 일들을 이야기해주곤 합니다.

-소설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오래전에 일어난 일과 대화들에 대한 아주 세세한 묘사가 놀랍습니다. 마치 홈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다 녹화해뒀다가 풀어 쓴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하하.

-혹시 오래 일기를 써왔었나요? 어떻게 가능했지요?

저는 일기를 써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시각적인 기억력이 아주 좋긴 합니다. 가본 곳은 거의 다 기억합니다. 그리고 글을 쓸 때는 기억력에 많이 의존합니다. 가령 열 살 때 일어난 일에 관해서 쓰기 시작하면, 제가 자란 집에 있을 때라든가, 어떨 때 어땠는지를 하나하나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글쓰기가 마치 저를 과거로 데려다주는 운송수단(vehicle) 같습니다. 글을 써내려 가면서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해내지요. 그전에는 잘 떠올려보지 않았던 것들까지. 평소에 삶 속에서 일어난 많은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우리 정신(mind)에는 우리가 지나온 모든 시기가 저장돼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정신 어딘가에 있어서 접속만 잘하면 떠올릴 수 있는 거지요. 글쓰기는 그런 과거의 기억에 가닿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가장 좋은 방법 아닐까 싶어요.

-<나의 투쟁>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과 논평, 심지어 논란까지 있었지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빗대어 '노르웨이의 프루스트'라 불리기도 했지요. 그런 해석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나요? 혹시 오해라면?

대체로 잘 이해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나본 많은 독자들은 그런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책에 대한 비평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책에 대한 비평을 읽는 것은 오래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래서 사실 사람들이 제 책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들을 만날 때 받는 느낌으로는 아주 잘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책은 다양하게 읽힐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받은 인상은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참회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후회 같은 것이 짙게 깔려 있더군요. 최소한 길게 이어진 소설 전체의 출발점이 된 첫 권은 그렇게 느꼈습니다. 당신 소설에서 아버지의 의미는 뭔가요?

그 말이 맞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발단이었습니다. 제가 쓰려고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를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저의 삶 속에서 차지했던 역할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로 그렇게 해보려고 몇 년 동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잘 안 됐습니다. 결국 나중에야 자전적인 이야기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내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다, 지어낸 아버지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를 포함한 가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게 책의 의미입니다. 출발점은 아버지의 죽음이었고, 여섯 권 소설 전체에 걸쳐 아주 중요합니다. 그 소설은 가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저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지금은 화해를 했나요?

거의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그게 책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어쨌든 지금은 아주 많이 화해했고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셰익스피어였지요 아마, "이해는 용서"라고 했지요. 어떤 것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어떤 식으로든 용서하는 것도 많아지게 됩니다.

책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비하면 지금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주 달라졌습니다. 쓰기 전에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랄까요, 일종의 증오 같은 것으로 화가 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해합니다. 그전보다 훨씬 더 많이요.

-마지막 권이 영역본으로는 올 9월에 출간될 예정이라더군요. 그 앞의 권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히틀러의 이야기라고 들었습니다. 원래 '나의 투쟁'이라는 제목도 히틀러의 자서전과 같지요. 왜 마지막 권에 히틀러 이야기를 쓰게 됐지요?

저는 직관에 아주 많이 의존하는 편입니다. 뭘 쓸지 미리 계획을 세우는 법이 없습니다.(웃음) 처음에 이 소설을 쓰면서 제목을 '나의 투쟁'이라고 붙였는데, 히틀러의 책과 똑같은 제목입니다. 그 책과는 무관했는데 그런 제목으로 소설을 쓰고 보니 아돌프 히틀러의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늦게 실제로 읽어봤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것에 관해서도 좀 써보고 싶었습니다. 쓰기 시작하고 보니 400쪽으로 늘어나버린 겁니다. 히틀러 자신과 나치즘, 그리고 당시 독일, 전쟁, 홀로코스트,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까지 점점 늘어났습니다. 대단히 직관적인(즉흥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 책은 우리 가족과도 연결점들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거실에 히틀러의 책을 두고 있었지요.(웃음) 또 제가 히틀러에 대해 쓰려고 보니, 히틀러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신에 대해, 자기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상당 부분 정치에 대해서도 쓰고 있었습니다만 그것 역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걸 들여다보게 된 거죠.

-히틀러 부분 때문에 논란도 일었지요. 개인적으로 정치적 신념이 있나요?

네, 물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염려하고,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은 언론의 자유(freedom of speech)입니다. 최근 들어 더욱 중요해지고 있지요. 저는 소설이 차지하는 공간을 지키고 싶은 열망이 아주 강합니다. 그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종류의 것들, 아주 불쾌한 것들, 아주 위험한 것들까지 다 시도해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유일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소설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예술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정치적 발언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의 발언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가령, 독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저로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6권의 끝 부분에서 더 이상 작가이기를 그만두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 뒤에도 글쓰기는 계속됐습니다. 그때 왜 그렇게 썼지요? 그 뒤로 생각이 바뀌었나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대단히 직관적인 작가입니다. 어떤 것도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나의 투쟁>을 쓰면서 미리 한 가지 계획한 게 있었습니다. 바로 (작가이기를 그만두겠다는) 마지막 문장입니다. 처음 쓰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해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에서 내 삶의 모든 것에 대해 남김없이 쓰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후에 퇴장할 생각이었습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책을 마쳤을 때 실제로 그랬습니다. 더 이상 다른 어떤 것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투쟁' 속에서 주인공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책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투쟁> 같은 책은 다시는 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후로 에세이는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시나리오라든가 다른 종류의 글은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저는 작가입니다. 그 뒤로도 책을 써왔고, 지금도 여전히 작가입니다.

-<나의 투쟁> 다음에 쓴 책이 사계절에 관한 4연작 에세이지요. 앞 소설이 내적인 격동을 다뤘다면 그 다음에는 바깥 세계인 자연으로 옮겨간 셈인데요.

네,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렇게 옮겨간 이유는 뭐지요? <나의 투쟁>에서 너무 지쳤던 건가요?

<나의 투쟁>을 쓰는 동안에는 저의 내적인 삶, 심리와 격동을 다뤘습니다. 마쳤을 때는 더 이상은 그것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외부 세계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세계의 물질성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탐구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투쟁>에서는 모든 것이 위태했습니다만, 이 4부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내용이 아니지요. 저로서는 (바깥 세계를 다룬)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있었습니다.

-영역된 에세이 몇 편을 읽어보니, 스타일이 전작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어떤 게 진짜 모습인가요? 양쪽 다인가요? 자신을 어떤 작가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네, 둘 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작가는 보통 한 가지 스타일을 발견하고, 그렇게 해서 잘 써진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고수합니다. 마치 탄광을 캐 들어갈 때와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탄광이 비게 되고 더 이상 파 내려갈 수가 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캐낼 것이 더 이상 없게 되는 거지요 <나의 투쟁>을 마쳤을 때 그렇다고 느꼈습니다. 나 자신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소설을 계속해서 쓰자면 열 편을 더 쓸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게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그래서 좀 다른 글쓰기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짧은 글쓰기를 시도해봤습니다. <나의 투쟁>은 아주 길었던 반면, 계절 4부작의 글 한 편은 한 쪽, 두 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써나가면서 세계에 관해 어떻게든 다른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글의 모든 형식에는 나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이런 형식으로 말할 수 있고, 저런 것은 저런 형식으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똑같은 형식으로) 저 자신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계속 변화하고 싶습니다. 물론 너무 큰 변화는 아니고. 결국 핵심은 동일하니까요. 글을 보면 그 안에 같은 사람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4부작은 아직 뱃속에 있는 딸에게 이야기하듯 썼지요. 그 무렵 했던 인터뷰 중에서 당신으로서는 지금은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좋은 작가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더군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나의 투쟁>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저의 바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글을 쓰는 동안 저 자신이 너무 정직해짐으로써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했습니다. (형과 삼촌, 저 아내 등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여과없는 이야기로 출간 후 갈등과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안 좋은 것들을 안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걸 쓰지 않았다면 저는 (제가 목표로 했던)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냉정해져야 했던 거지요. 그것은 일종의 딜레마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희생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는 갈등이 일어나고 맙니다. 글쓰기는 끝없는 그런 갈등의 연속입니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에고이스트'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2년 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인터뷰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동의하시나요?

물론입니다. 모든 예술가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그 일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100%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뭔가를 희생시켜야만 합니다. 어떻게든 가혹해져야 하고 그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습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같이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기 방식 대로 뭔가를 만들어내면서 말이지요. 관심이 가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머릿속에 든 것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 생각에만 취해 있는 거지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만, 그래봐야 여전히 저 자신이 에고이스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작품 뒤로 철저히 사생활을 숨기는 유형입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당신은 후자 같습니다. 자기 삶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위험을 무릅씁니다. 삶의 내용을 소설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뭔가요?

저의 첫 소설은 <세상 밖으로>였습니다. 그 책을 쓸 때는, 제 생각에, 거의 모든 소설가들이 하는 방식을 따랐습니다. 내 자신의 삶과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아는 세계를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저기 어딘가에서 취해서 뭔가를 만들어냈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썼습니다. 그게 바로 픽션이지요.

핵심은 내가 아는 것들이지만 다른 어딘가로 데려가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픽션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저는 뭔가 진실된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진실 말이지요.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강하게 느꼈습니다. 아마도 요즘 우리가 너무 많은 이야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뉴스 스토리며 수많은 영화, 수많은 책이 있습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이야기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은 내 삶은 그렇게 구성된 이야기와는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이야기 이상의 것을 쓰고 싶었습니다. 내가 본 모든 세세한 것, 그 따분한 것들을 다 쓰기로 한 이유입니다. 그 전부가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내 삶까지도 다시 이야기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그걸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상투적인 이야기보다는 덜 이야기스럽고 삶에 더 가까운(less a story, more a life) 것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존재에 관해서,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허구화(fictionalize)하지 않는 방식으로 쓰려고 했던 거지요. 실제로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느껴지는가를 그대로 쓰는 것. 그게 기본적으로 <나의 투쟁>에서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아주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해보고 있습니다만.

-최근 들어 소설은 물론 논픽션 장르에서도 일종의 경계 파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사실과 허구,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도 성과 속 혹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것 사이의 구분이 흐려지는 거지요. 당신도 문학에서 앞장서 그런 실험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 자신은 대단히 실존주의적 작가 같다고 느낍니다. '존재한다는 것(to be)'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의 투쟁>은 그 주제에 아주 집중한 작품입니다. 존재의 리얼리스틱한 측면 말이지요. 하지만 그 전에 제가 쓴 소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의 경우에는 천사와 신적인 것에 관해서 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종교나 철학 같은 류의 글과 이미지, 생각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지금 내가 세속적인 것에 대해 쓰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 가까이에는 늘 다른 뭔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모든 작가와 예술가들이 언제나 동일한 것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을 뿐이지요. 관심은 늘 기본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작가들이 이런 문제를 다뤄온 방식이 변해온 것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셰익스피어든 누가 되었든 작품을 읽어 보면 기본적으로 동일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묻는 방식을 달리 했을 뿐이지요.

-작년 여름 예루살렘 국제 도서전에서 예루살렘 어워드를 받으면서 한 연설문에서 성서를 언급하면서 '가장 변혁적이고 획기적인 텍스트'라고 했더군요. 노르웨이에서 벌인 구약 새 번역 사업에도 자문역으로 참여했지요. 종교와 신앙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신에 대한 생각이며 형이상학이 무너진 세속적인 세상에서도 신실한 신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네, 물론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러시아를 둘러보고 온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거기엔 70년 동안 종교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종교는 억압됐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종교가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마치 늘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만큼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기본적인 욕구였다고 생각합니다.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모색. 그런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종교가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대단히 많습니다. 다만 믿음을 갖기에 저는 너무나 이성적입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합리성(rationality)을 포기해야 합니다. 합리성보다 신앙이 더 지배를 해야 하지요. 저는 그러지 못합니다. 신앙에 필요한 도약을 감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이야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 시대의 산물인 허무주의와는 어떻게 함께 살아내거나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글쓰기를 통해 생명(혹은 삶)의 풍요함과 복잡성을 탐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일상 생활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이 의미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상투적이고 뻔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그리고 예술을 통해 생명의 강렬함과 세계의 강렬함, 존재의 강렬함, 우리 주변 모든 것들의 강렬함, 의미의 충만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생각은 허무주의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결국엔 죽음으로 끝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양극성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왜 그러한지에 대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삶과 세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제시하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작년 여름 뉴욕타임스와 한 책 인터뷰를 보니 전자책으로는 읽지 않는다고 했더군요. 디지털 기술을 경계하는 편인가요? 자동화 물결이라든가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술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전망의 어떤 것들은 참 두렵습니다. 우리를 '지금 여기'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어딘가에서 진행되면서 다른 어딘가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육체성(physicality)에서 우리를 분리시키고 다른 곳으로 데려갑니다.

하지만 저 역시 약합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인터넷에 잡혀 있습니다. 내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그게 싫지만 거기에 너무나 좋아할 만한 게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가슴(=마음)은 똑같습니다. 그 점에 관한 한 아마 우리는 언제나 그대로일 겁니다.

제가 좀 더 우려하는 것은 생명공학기술입니다. 복제라든가 DNA 변형을 통해 하려는 것들이 저로서는 두렵습니다. 그것에 대해 글을 꼭 한번 써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소설로 그걸 다루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저는 어떤 식으로든 설교를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를 다뤄볼 방법을 한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지난달 작고한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Earthsea> 시리즈를 여러 곳에서 추천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뭐지요?

<어스시> 시리즈 첫 책을 읽은 것은 제가 열 살 때였습니다. 그 후로도 어린 시절과 10대 시절 내내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 책은 아주 단순하지만 대단히 현명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제가 읽은 첫 번째 실존주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 살일 때도 이미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만 그 책은 내 안의 뭔가를 크게 바꿔놓았지요. 그리고 그 책을 읽었을 때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몇 년쯤 전에 그 책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여전히 아주 아주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것이 모두 한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너무나 멋진 책입니다. 정말이지 책에서 바라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설정도 마술 같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냈으니 대단히 뛰어난 작가지요.

-얼마 전 인터뷰에서 당신의 작품을 포함해서 요즘 소설 중에는 읽을 만한 작품을 보기 어렵다고 말했더군요. 좋은 작품은 10년, 20년에 한두 권 정도라고 했지요. 현대 소설 중에 그런 한두 권에 들 만한 것은 어느 책이라고 생각하세요?

사실, 그런 책은 당대에는 알기 어렵지요. 제대로 알아보려면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20세기로 돌아가보면 위대한 책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찾아서 읽는 명작들이지요. 시간이 책을 골라냅니다. 굳이 우리 시대라고 한다면,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같은 책이 그런 책에 속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른 책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어느 책이 거기에 속하는지 지금 당장에는 알 수 없습니다. 100년 후에나 물어본다면 어떤 책이 위대한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하하.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 전시회의 큐레이터를 맡아 전시회를 연 적도 있지요?

작년 봄과 여름, 여섯 달 동안 오슬로에서 있었던 특별전의 큐레이터를 맡았습니다. 뭉크 작품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큐레이트했습니다. 뭉크는 노르웨이 예술에서는 두드러진 아이콘이지만 보지 못한 작품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알려진 작품은 기껏해야 열 작품 정도지요.

하지만 그에게는 훨씬 더 많은 면모가 있습니다. 대단히 흥미진진하고 도발적인 그림들입니다.그래서 이번에 다른 종류의 화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은 저로서는 큰 도전이었지요. 저는 뭉크 그림에 관한 책도 한 권 썼고,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봤지요.

크나우스고르 기획 뭉크 특별전

-지금 이 시대에 뭉크 미술의 의미는 뭔가요?

뭉크의 어떤 시기를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는 그림과 관객 사이에 간막이가 없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관객과 그림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아무것도 없도록 하려던 게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게 그의 30대 시절이었습니다. 스크림 같은 유명한 작품을 그린 시기입니다. 작가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했고 관객도 곧바로 경험할 수 있게 했지요. 그림을 정교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단히 강렬합니다.

그 뒤 인생의 후반부에 가서는 그런 걸 버렸습니다. 자기 감정보다 세계를 그리는 데 훨씬 더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보기 시작한 거죠.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것을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그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이미 너무나 많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이미지들이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표준화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표준적인 관점 뒤의 세계로 들어가보려 한 거지요.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당신(세상을 마주한 자신)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했습니다. 그게 그가 한 작업입니다.

-다음 소설을 집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르헤스와 칼비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했더군요. 이전 작품과는 다른가요?

네, 지금 쓰고 있는 중입니다. 네, 아주 다릅니다. 순수 소설입니다. 그 안에 환상적인 요소도 들어 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 점에서 이전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SF 계열인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아주 리얼리스틱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예컨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 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어두움이 많은 소설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북유럽 문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라이프스타일도, 문학도. 북유럽 문화의 특징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워낙 그속의 일부이다 보니 다른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의 뭘 보고 이야기하는지 알기가 어렵군요.

-가령, 같은 서방이라도 북유럽과 서유럽, 미국 문화 간에 차이를 느끼나요?

네, 그렇습니다.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미국에 가보면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사람들 사고방식이나 생활 문화랄까요. 노르웨이는 기본적으로 아주 평등주의적인 사회입니다. 누구든 다른 사람보다 그 이상이기를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는 편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비슷할 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심지어 국왕조차 다른 모든 사람과 같아야 합니다.

한 편으로는 아주 좋은 점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다른 면에서는 제약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가령 예술가인 경우에 그렇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스칸디나비안적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다를 수 없다는 느낌. 모두가 아주 비슷해야 한다는, 어떤 식으로든.

-아시아에 대한 경험은 있나요? 문화나 사상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일본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제가 가본 곳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었어요. 참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무슨 의미인지 이해도 못했는데 그 점이 무엇보다 흥미로웠습니다.

아주 오래된 것과 너무나 현대적인 게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 그것이 만들어내는 구성이 아주 독특했어요. 여기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들이거든요. 한국에도 정말 가보고 싶습니다. 초대받은 적은 있었지만 사정상 갈 수 없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려고 합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다음 소설도 기대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난 몇 년간, 문학에 대한 내 믿음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나면, 그건 항상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픽션이라는 장르에 속박되어버린 건 아닐까. 지난 몇 년 동안 픽션은 인플레이션처럼 불어났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픽션밖에 눈에 띄지 않았으니 말이다.


수백만 권의 포켓북, 하드커버 북, DVD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물. 이 모든 것은 현실을 모방해 지어낸 세상과 그 속에 있는 가상의 인간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문 기사, 텔레비전 뉴스, 라디오 뉴스도 형태가 같았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형태도 마찬가지다.


물론 다큐멘터리 속에서 잘 짜인 이야기를 찾을 수 있지만, 그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누군가가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변해버렸다.


이것은 재앙이다. 나는 픽션의 핵심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 같을 정도로 일정하다는 사실 때문에 온몸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무기력해지고, 의식 속에서 부서져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고통스럽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픽션 속에서 일률적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우리가 독특하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지금은 아주 다른 모습의 세상 속에서 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시대다.


나는 그런 유의 픽션을 쓰고 싶지 않다. 글을 써보려 마음을 다잡고 앉아도 이건 내가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한 문장 간격으로 나를 덮쳐 괴롭힌다. 그렇게 쓴 글은 아무런 가치도 찾아볼 수 없다.


지어낸 것은 가치가 없다. 심지어는 다큐멘터리적 글도 무의미하다. 내게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은 일기와 수필밖에 없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문학, 무언가를 억지로 이야기하려 하지도 않고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와 인성, 삶과 얼굴과 눈빛을 그대로 담아내는 문학 말이다.


타인의 눈빛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을 감히 예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눈빛도 아니요, 우리를 우러러보는 눈빛도 아닌, 우리와 눈높이가 같은 타인의 눈빛 말이다. 예술은 집단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작품 속의 눈빛을 홀로 만나야 한다.


그렇게 흐르던 내 생각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만약 픽션이 무가치한 것이라면 이 세상도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는 픽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니 말이다.


<나의 투쟁> 3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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