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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

[오늘의 큐레이션] 현대사회의 자기애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강연 저서 '불안한 현대 사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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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북클럽 오리진이 휴면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큐레이션]은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불안한 현대 사회>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찰스 테일러는 근대성에 대해 오랫동안 비판적으로 사고해온 캐나다의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현실 정치와 저술, 대중 강연 등 다방면에서 공공 지식인으로 활발히 활동해온 학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캐나다 공영방송(CBC)의 매시 강연(Massey Lectures Series) 내용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으로, 근대성의 병폐에서 기인하는 현대 사회의 불안 원인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원 제목은 The Malaise of Modernity이며 1991년에 출간됐습니다. 국내에는 2001년에 번역돼 나왔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습니다. 첫째, 삶의 의미와 그것의 기반이 되는 도덕적 지평의 실종, 둘째,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소멸하는 삶의 목표들에 관한 것, 마지막으로 자유, 자결권의 상실과 무력감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지배적인 '자기 실현'의 개인주의가 자기도취, 나아가 상대주의적인 무관심주의로 치닫고, 그 과정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더 중요한 가치나 의미의 추구, 그것을 위한 노력을 잊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나는 인간 생활의 일반적 특징은 기본적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특성에 있음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인간의 표현 언어를 획득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인간 고유의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원숙한 행위자들이 된다. 이런 것들을 토론할 목적으로 나는 광의의 '언어'를 취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낱말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자신들을 정의하는 다른 표현 양태들, 예를 들면 예술, 몸짓, 사랑 등등과 같은 '언어들'을 포괄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타인들과의 의사의 교환[소통]을 통해서 비로소 이런 언어들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도 자기 정의self-definition에 필수적인 언어들을 자기 혼자서 습득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관계하는 타인들, 즉 조지 허버트 미드(1863-1931)가 말하는 '의미 있는 타인들'과의 의사 교환을 통해 언어들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이런 의미에서 결코 '독백적monological'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대화의 과정에 의해 생성된다.


더 나아가 언어의 습득은, 나중에는 거의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언어의] 맨 처음의 발생genesis만이 상호의 대화를 통해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화를 통해 언어들을 습득하고 난 뒤에는 우리들이 언어들을 자기 멋대로 자기 방식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물론 일단 언어를 습득하고 나면 우리들은 자기 문화 속에 있는 우리 자신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까지는 기술할 수 있다. 그리고 고독한 사색을 통해 우리들은 상당한 정도까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나 태도나 입장의 개진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를 묻는 정체성의 정의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혼자의 사색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대화를 통해, 또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타인들이 우리들 마음속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다양한 정체성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여 가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만들어 간다.


사실 우리들의 성장과 발전이 이들 몇몇 의미 있는 타인들-예를 들면, 부모들-의 그것보다도 더 커진 경우나, 심지어 그들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사라진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과의 대화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 속에서 계속된다. 그래서 의미 있는 타인들의 공헌은 우리의 어린 시절에 일어난 것일지라도 평생을 통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지점까지는 내 의견을 인정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형태의 독백적 이상을 고집하고 싶어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인생의 유년기에 우리를 사랑하고 보살펴 준 이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할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독백적인 이상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우리는 부모님의 영향을 제대로 잘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더 이상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우리 자신을 독립적으로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물론 타인들과의 관계는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의 확립은 오직 자신에 의해 스스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사람들이 대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독백적 이상을 고집하는] 입장이 인간 생활에서 대화 기능의 위상을 심각하게 격하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여전히 대화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최대의 한도 내에서, 발생의 단계에 한정시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인생에서 좋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것들을 함께 즐김으로써 얼마만큼 변화될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어떤 좋은 것들은 오직 이러한 공동의 즐김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의 정체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무척 많이 노력해야 하고, 또한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통스런 결별이 요구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누구'이고, '우리들의 존재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에 관한 물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체성이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무엇에 입맛을 느끼고 무엇을 소원하며 무엇을 생각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바탕[근거]이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들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사람은 바로 나의 정체성의 형성에 내재적 구성 요소가 된다.

[주위 타인들과의 내재적인] 이런 관계는 혹자들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중세 시대의] 은자들, 혹은 우리 현대 문화에서 비근한 예를 들자면 고독한 예술가들의 삶의 충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삶조차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일종의 대화적인 태도dialogicality로 볼 수 있다. 은자의 경우에 대화 상대자는 하느님이다. 고독한 예술가의 경우에 그의 대화는 예술 작품 자체를 통하여, 아마도 앞으로 그 작품에 의하여 형성될 미래의 감상자들을 겨냥하여 열려져 있다.


요컨대 예술 작품의 형식 그 자체가 그 작품의 특성상 누군가를 겨냥하여 대화의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혼자서 무엇을 수용하고 느끼고 있다고 할지라도, 일상적 현존재로부터의 영웅적인 단절이 수반되지 않는 한, 우리의 정체성 형성과 유지는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자기 진실성은 실질적으로 자기 결정의 자유에 근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조차도 [오직 자기 선택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고상하고 용기 있는 어떤 것, 따라서 내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어떤 것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자기 선택과 무관하게 독립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보다 유의미한 삶의 지평에 비추어 볼 때] 인간들이 살아 나가는 다양한 그림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각고에 시달리는] 자기 창조적인 삶에서부터, 보다 안일하게 살아가는 형태들, 즉 시류에 합류하고 대중과 영합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의] 선택들 사이에는 [분명히 질적인] 차이가 있다. 요컨대 인생의 그림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진실한 것을 찾아서 그려 나가는 그런 그림이다. 오직 삶의 지평들만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유의미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존재를 중요한 문제들의 지평 앞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사회, 혹은 자연의 요구들에 '정면 대립하면서', 역사나 연대적 고리를 '차단해 가면서', 오직 자기 실현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 문화의 생활 양태들 속에서 이상은 스스로 파괴되고 있다.


이렇게 자기만을 중심에 놓고 있는 '나르시시즘'의 형태들은 정말로 천박하고 진부하다. 그런 삶들은, 앨런 블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높낮이 없이] 덤덤해진 것이고 안목이 매우 좁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이런 삶들이 자기 진실성의 문화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진실성의 요구들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생겨나는 요구들을 차단한다는 말은 정확히 의미 창출의 조건을 억제하는 것이요, 따라서 진부한 삶을 따라가는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만큼, [이상의 추구를 포기하는] 자기 폐쇄self-immuring는 자기 자신을 망쳐 버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기 폐쇄는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내 삶에] 의미가 있는 그런 것들을 배경에 두고서야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자연, 사회, 연대적인 요구들, 즉 [좁은] 내 자신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괄호 속에 묶는다는 것은 내 삶에 의미 있는 모든 가능한 사항들을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나는 역사, 자연의 요구, 동료 인간들에 대한 수요, 시민의 의무, 혹은 하느님, 또는 그런 정도의 권위를 가진 어떤 존재로부터의 소명 등등이 결정적으로 문젯거리가 되는 세상에 존재할 때에만 나는 진부하지 않은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자기 진실성은 자신을 넘어서는 영역으로부터 오는 요구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러한 요구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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