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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비로소 나에 눈을 뜨다

조회수 2018. 12. 17. 08: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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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새로 읽는 고전 시학 선집 <나는 나다> 중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오늘의 큐레이션]은 고전 한시에서 골라봤습니다.


출처는 정민 교수의 신간 <나는 나다: 허균에서 정약용까지, 새로 읽는 고전 시학>입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내로라하는 문장가였던 허균, 이용휴, 성대중, 이언진, 이덕무, 박제가, 이옥, 정약용 등 여덟 명의 시론을 압축해 소개합니다.


조선 문단에서는 18세기 이후 비로소 시를 쓰는 주체에 주목하는 움직임이 생겨났으며, 이제 ‘나는 누군가,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나’의 목소리를 드러내려는 시도가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그중에서 이용휴의 시 한 편을 풀이와 함께 소개합니다.


이용휴(李用休, 1707-1782)는 조선 후기 문으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惠寰)입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李重煥)이 그의 조카였고, 당대의 천재로 이름 높았던 이가환(李家煥)이 그의 아들입니다.


아들의 벼슬은 형조판서에 이르렀지만 신유사옥 때 사학 죄인으로 몰려 죽으면서이후 그의 집안 문적들은 모두 금기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이용휴는 18세기 문단의 거벽이다. 정약용은 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마음을 쏟아 문사에 전념하여 동국의 비루함을 씻어내고 힘써 중국을 따랐다. 지은 글은 기굴(奇崛)하고 새로우면서도 교묘하였다. 명성이 한 시대에 우뚝하였으므로 탁마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하려는 자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잘못을 바로잡았다. 몸은 벼슬하지 않은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지만 손으로 문단의 저울대를 잡은 것이 30여 년이다. 예로부터 있지 않았던 바다."


이용휴의 손아귀에서 18세기 문단의 저울대가 30여 년 좌지우지되었다는 얘기다.


그의 글은 평범하지 않고, 그의 시는 늘 의표를 찌른다. 때로 기굴함이 지나쳐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한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을 돌려 말했고, 어떤 때는 반대로 단도직입으로 찔러 말했다. 남이 백 마디 천 마디로도 못할 말을 단 몇 줄의 짧은 글에 넘치게 담았고, 남에게 이야깃거리도 못 될 일을 백 마디 천 마디로 늘려 말하기도 했다.


먼저 읽을 글은 <환아잠還我箴>이다. 신득녕(申得寧)을 위해 지은 작품이다. 신득녕의 본명은 신의측(矣測)이다. 자가 하사(何思)인데, 환아는 그의 다른 자다. 자를 '무슨 생각'이나 '내게로 돌아가리'로 삼은 것을 보면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이 시는 이용휴가 신의측의 이름 풀이로 써준 글이지만, 자신을 향한 다짐도 함께 담았다.


그가 돌아가고 싶었던 '나'는 어떤 나인가?

옛날 처음 내 모습은                 昔我之初

천리 따라 순수했지.                 純然天理

지각이 생긴 뒤로                     逮其有知

해치는 것 생겨났네.                 害者紛起

식견이 해가 되고                     見識爲害

재능이 해가 됐지.                    才能爲害

마음과 일 익히는 것                 習心習事

갈수록 어려워져.                     輾轉難解

다른 이를 떠받들어                  復奉別人

아무개 씨 아무개 님                 某氏某公

끌어대고 잔뜩 기대                  援引藉重

바보들을 놀래켰네.                  以驚羣蒙

옛 나를 잃고 나자                    故我旣失

참 나마저 숨어버려.                 眞我又隱

일 꾸미는 자가 있어                 有用事者

나를 잃은 틈을 탔네.                乘我未返

오래 떠나 집 생각나                 久離思歸

꿈을 깨니 해가 떴다.                夢覺日出

번드쳐 몸 돌리매                     翻然轉身

내 방으로 와 있구나.                已還于室

광경은 변함없고                      光景依舊

몸의 기운 편안하다.                 軆氣淸平

차꼬와 형틀 벗어                     發錮脫機

오늘에 태어난 듯.                     今日如生

눈의 밝음 변함없고                  目不加明

귀의 총명 그대롤세.                 耳不加聡

타고난 총명함이                      天明天聡

옛날과 같아졌네.                      只與故同

모든 성인 그림자라                  千聖過影

나는 내게 돌아가리.                 我求還我

갓난애와 큰 어른이                  赤子大人

그 마음이 한가지라.                 其心一也

신기한 것 없고 보면                 還無新奇

딴 마음이 쉬 생기리.                別念易馳

만약 다시 떠나가면                  若復離次

되올 기약 영영 없다.                永無還期

향 사르며 머리 숙여                 焚香稽首

천신께 맹서하리.                      盟神誓天

이 몸이 마치도록                     庶幾終身

나와 함께 지낼 것을.                與我周旋

<풀이>


애초의 나는 티끌 하나 없이 순수했다. 나는 천리天理 그 자체였다. 세상은 나를 위해 움직이고, 사물과 나 사이에는 아무 간격이 없었다. 차츰 지각이 생기면서 천리는 나와 조금씩 멀어졌다. 무얼 얻어들으면 그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것에 의심에 생겼다. 내가 내 재능을 의식하자 뭔가 자꾸 작위하고픈 마음이 일었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순연했던 천리는 내게서 떠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오늘은 이걸 익히고, 내일은 저걸 배웠다. 식견을 늘리고 재능을 기르는 동안 세상일은 점점 알 수 없게 되고, 자연스러워 걸림 엇던 팔다리에 난마가 얽혔다. 나는 운신의 폭을 잃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다른 이는 어찌하나 궁금했다. 이런저런 대가들을 지켜보았다. 그들도 빈 쭉정이이긴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실상을 보지 못한 채 명성을 높이고 존경으로 받들었다. 나는 그 그늘에 숨기로 했다.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을 따르던 바보들은 나를 보고 놀라 새롭게 열광했다. 나는 내 말을 잊고 그들의 언어를 되뇐다. 나는 참 나를 잃고 옛 나를 버렸다. 사람들은 멋있다 하고 굉장하다 하고 근사하다 했다. 그 장단에 춤추는 사이에 나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렸다.


어느나 날 아침 일어나 문득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 여기는 어딘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 길은 바르고, 내 일은 기쁜가? 하나도 알 수 없었고,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허깨비 명성에 달콤하게 취해 있었다. 문득 보니 그들의 열광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참 나를 잃고 옛 나를 버렸다. 지금에 안주하고 빈 껍데기에 환호하며 가짜 나를 추종했다.


나는 시를 원했는데 시가 나를 버렸다. 나는 참을 바랐으나 참은 내게서 떠나갔다.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해 오래도록 슬펐다. 돌아가리라! 떠나왔던 첫 자리로. 떠나리라! 덧없는 명성으로부터. 버리리라! 내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툴툴 털고 나자 첫 나, 참 나, 옛 나가 돌아왔다. 눈은 맑고 귀는 밝았다. 눈꺼풀에 쓰였던 콩깍지가 벗겨지고, 꽉 막혔던 귓구멍이 뻥 뚫렸다. 나를 얽어매고 옥죄던 차꼬와 형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팔을 쭉 뻗고 발을 쭉 내질러도 아무 걸림이 없었다. 굳었던 든육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믿기지 않았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이 든 갓난아이다. 천리는 늘 나와 동행한다. 천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신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간 사람들 눈을 놀라게 할 신기한 일만 찾아다녔다. 평범한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문득 돌아 보니 자연스러운 것만이 소중했다.


나는 이제 심심해도 신기한 것을 찾느라 나를 길 위에 두지 않겠다. 이제 한 번 더 나를 떠나면 나는 영영 내게로 돌아올 수가 없으리. 나는 나와 살겠다. 남은 마음에 두지 않겠다. 내가 나와 있을 때만 나는 나다. 내가 남과 있으면 나는 허깨비다.


나는 이제 허깨비 인생과 작별한다. 나는 새 삶을 원치 않고 옛 삶을 되찾기 원한다. 나는 새 나를 바라지 않고 옛 나를 돌아가기를 원한다. 나는 거짓 나를 버려 참 나와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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