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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

[오늘의 큐레이션] 평범한 미덕의 힘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의 '평범한 미덕의 공동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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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으로 평범한 미덕의 힘에 관한 책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합니다.


출처는 캐나다 출신 석학 마이클 이그나티에프<평범한 미덕의 공동체: 일상을 구축하고 삶을 재건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힘에 대하여>입니다.


인류 사회는 나아지고 있는가. 끊이지 않는 물음입니다.


이 책은 카네기국제문제윤리위원회가 1백주년을 맞아 경제적 세계화와 더불어 도덕적 세계화도 이뤄지고 있는지 현장 답사에 나선 결과물입니다.


뉴욕, LA, 리우데자네이루, 보스니아, 미얀마, 후쿠시마, 남아공 등 세계 7개 지역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 일상의 모습과 내면의 생각을 취재한 후 얻은 결론으로 '평범한 미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자 마이클 이그나티에프(1947년생)는 캐나다 출신의 공공지식인으로 토론토대와 옥스퍼드대, 하버드대 교수를 거쳐 현재 조지 소로스가 설립한 중부유럽대학(CEU) 총장을 맡고 있습니다.


책의 원제목은 The Ordinary Virtues: Moral Order in a Divided World이며 2017년 9월 출간됐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언어가 있다. 그건 선의 언어나 세계 윤리의 언어가 아니라, 도덕 질서를 바라고, 삶이 제 아무리 잔혹하거나 힘겹더라도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생각하도록 하는 기대의 틀을 바라는, 각 지역의 상황에 근거한 구체적인 욕망이다.


우리의 모든 대화에서 사람들은 급격하고도 불안정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의 불안은 자기 나라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혼돈스러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도덕적 질서를 추구하면서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기울어지는 공동 영역을 통제할 힘을 자신들이 과연 지니고 있는지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술 진보의 불가피성, 민주주의의 확산, 자유주의의 승리라는 세속적 서사는 엘리트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가난한 사람과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코스모폴리탄 엘리트조차도 거대 서사에 대해서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처럼 산산조각이 난 서사들에 맞닥뜨리고, 극단적인 대중적 경쟁자의 공격을 모든 방면에서 받았을 때,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더 큰 사회적 의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확신과 질서를 실제로 제공해준 한 가지 실천만을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평범한 미덕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여준 미덕들은 꾸준하게 공통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상의 삶은 똑같은 도전들을 제시하기 때문이었다.


그 도전들은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우리를 통치하는 사람들을 (만약 가능하다면) 얼마나 신뢰해야 하는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약 가능하다면) 얼마나 관용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만약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우리가 달성하려 노력하던 것들이 운명과 불운에 휩쓸려 사라졌을 때에 어떻게 삶을 재건할 수 있는가 등등.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가 인종과 종교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는 미덕을 인식했다는 것은 사실 우리가 보편적인 절대선을 인식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인간 본성에 근거하고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도덕적 실천의 공통 핵심 말이다.


하지만 다음 역시 마찬가지로 그럴싸해 보인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절대선이 아니라 단지 그 모두 놀라우리만치 맥락적인 특이성에서의 선이라고.


평범한 미덕이라는 지평에서 관찰되는 가장 놀라운 특징은, 우리의 모든 대화 상대자가 인류에 대한 일반적 의무라는 관점에서 보편적 원칙의 사례를 말해준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지역적인 것의 맥락에서, 우연적인 것의 맥락에서, 지금 여기의 맥락에서, 그리고 자기가 가까운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일의 맥락에서 추론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에 상상한 관객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그들 자신, 즉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무지의 베일 너머에 있는 어떤 추상적 표준이나, 인권 텍스트를 작성한 어떤 원칙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을 빼고서 정말 중요한 관객이 있다면, 바로 이웃, 친구, 가족과 같이 그들에게 중요한 타인들이었다. 미덕은 지역적이었다.


평범한 미덕의 관점에서 볼 때, 도덕적 삶이란 끊임없는 정체성 시험의 연속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자평하게 해줄, 그릭 최소한 타인이 자신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않도록 보장해줄 행동 경로를 물색한다. 우리는 되도록 올바른 일을 하고 싶어 하고, 계속해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가 일관성에 신경성을 쓴다는 사실을 배웠다. 일반 원칙과의 일치가 아니라 자신의 평생에 걸친 품행의 일관성에 우리는 신경을 쓴다. 우리는 어제 잘 행동한 것처럼 오늘 잘 행동하기 위해 분투하는데, 이는 살아가는 내내 자기 자신에 대한 일관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에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실제 인간, 즉 옷을 걸치고, 성별이 있고, 부유하거나 가난하고, 인종이 뚜렷이 식별되는 인간에 대해 판단한다. 그리고 도덕과 관련해 우리가 그들에게 품는 느낌은 그들과 우리의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이웃인지 낯선이인지, 시민인지 방문객인지, 친구인지 적인지, 우리와 같은지 '그들'과 같은지에 따라 다른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고찰한 바는 정말로 옳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이 지상에서 살아가고 세계에 거주한다." 아렌트는 추상적인 인간 개념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250년 전 철학자 데이비드 흄도 "인류에 대한 사람" 같은 것은 없고 단지 이 상황에서 저 이유로 이 사람에 대한 사랑만 있을 뿐이라며 아렌트와 똑같은 논지를 펼쳤다. 인류에 대해서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 대신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는 인간에 관해 생각할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전부다.

그렇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도덕적 관점이 여전히 평범한 미덕에 의해서 결정되는 세계에서, 인권 같은 보편 윤리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인권과 평범한 미덕은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는 법률과 도덕적인 감정이 긴장 관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법률과 윤리 사이의, 그리고 법률과 대중의 정서 사이의 긴장을 정치적 지혜가 줄여주기는 하겠지만, 긴장은 항상 남아 있을 것이다.


인권의 언어와 평범한 미덕 사이의 접점은 실제로 공감과 연민과 관대의 언어이다. 신중한 정치인이라면 낯선이와 난민을 원조하기 위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는 일은, 인권의 언어가 아니라 선물의 언어로 호소할 때 더 잘 이뤄진다는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주권적인 것이 귀환하는 가운데 보편적인 것이 진정한 위기에 처한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세계 어디에서나 주권 국가는 보편적 의무에 저항한다. 그 의무가 난민 규약이건 전쟁법이건 인권 서약이건 간에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두려움의 시대에서 평범한 미덕은 안전 없이는 기능하지 못하며, 인권이 과연 이런 추세를 거꾸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격분한 광신자들로 인한 세계적인 위협의 시대에, 주권적인 것이 돌아오고 보편적인 것이 장악력을 잃고 있다. 단지 지배자에 대한 장악력만이 아니라 지배받는 사람들에 대한 장악력까지 말이다.


평범한 미덕은 공공 영역에서의 환기와 육성에 의존한다. 평범한 미덕은 지역적이고 개인적이겠지만, 그래도 공적인 선택에 의존하고, 지도자들이 자국 시민들의 최악의 면모가 아닌 최선의 면모에 호소하느냐의 여부에 의존한다. 아울러 대중의 지도자들이 두려움을 먹이로 삼는 대신에 관대를 실천하느냐 여부에 의존한다.


또한 번듯한 학교, 안전한 거리, 악이 아니라 선을 위해 체포하는 경찰, 뇌물을 받지 않는 판사, 재난이 일어났을 때 가동되는 행정 제도가 있느냐 여부에 의존한다.


그 어떤 사회도 그 시민의 눈에는 완벽하게 합리적일 수 없으며, 항상 시민의 분노를 일깨우는 남용과 불의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과연 언제쯤 시민이 들고 일어서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여행에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그 티핑포인트는 도덕적이었다. 즉 남용이 오랫동안 묵과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엘리트가 자국민에게 보내는 도덕적 경멸의 표현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불의가 너무나도 명백하고, 모욕적이고, 인간 존엄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는 이 순간이 되면, 평범한 미덕이 유지시켜주던 가로대가 간단히 부서져버린다. 거꾸로 제도가 기능하는 곳, 즉 공무원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곳에서는 공공 제도가 회복탄력을 발휘하고 공무원이 돌봄의 의무를 떠맡기 때문에 평범한 미덕이 소생될 수 있다.

경제적 세계화는 우리 마음과 정신의 세계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물론 미덕의 지형은 변한 것이 맞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앞에서 지역적 갈등을 내보이고 있으며,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우리와 연결된 낯선이에게 그렇게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세계화의 의미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정당화의 관객으로 인식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대상의 꾸준한 확장인 것이다.


만약 시간이 흘러 우리의 지역적 정당화가 실패한다면, 우리는 지역적 확신을 부끄러워하고 우리의 양심을 확장하기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변화는 언제나 느리게 진행될 것이다. 우리는 늘 평범한 악덕과의 전투에 갇혀 있다. 공공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권력, 자원, 지위, 의미를 둘러싼 충돌은 고질적이며, 이런 충돌 가운데 상당수는 논쟁이 아니라 피와 불로만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똑같은 생명 활동을 하고, 똑같은 신체를 지녔으며, 똑같은 궁극의 운명을 공유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평범한 미덕을 공유하고, 우리의 모든 차이를 가로질러 그것을 인식한다. 그런 미덕이 평범한 까닭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반복되는 본질적인 것들과 연관되어 있는 동시에, 살아남아서 가족과 이웃과 친지의 삶을 재생산하려면 어떤 도덕적 삶이 요구되는지에 관한 우리의 학습된 본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덕적 존재인 까닭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인 우리의 생존과 성공은 미덕에 의존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우리는 영웅이 되라는 요구를 받지는 않았지만, 적절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과 딸이, 이웃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는 거울 속 우리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기를 원한다.


공공 제도를 검증하고자 한다며, 그 제도가 우리를 서로에게 번듯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어주는지를 따져보면 된다. 이런 미덕을 육성하는 가능성이 가장 큰 제도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제도라고 주장함으로써, 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 어떤 사회도 과두제, 부패, 불의라는 시련에서 스스로를 해방할 수는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는 아무런 보장도 없을 것이며, 단지 평범한 미덕에 의거하여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항상적이고, 반복적이고, 끝이 없는 투쟁만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미덕이란


평범한 미덕은 일반화하지 않는다. 평범한 미덕은 차이를 망각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평범한 미덕은 우리가 지닌 모든 다양성의 배후에 있다는 보편적 인간이라는 관념에 과도하게 주목하지 않는다. 평범한 미덕은 윤리적 일관성에 대해서도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는다. 평범한 미덕은 인간관계에서 전제로서 기능하여 우리가 서로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도록 하지만,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우리가 스스로를 먼저 챙기도록 움츠러들기도 한다. 평범한 미덕은 반이데올로기적이며 반정치적이다. 평범한 미덕은 가족과 친구를 낯선이나 다른 시민보다 더 선호한다. 평범한 미덕은 미래가 어떠할지 잘 알지 못하더라도 삶에 대해 희망적이고, 역경에 직면하더라도 종종 깜짝 놀랄 만큼 잘 딛고 일어선다. 마지막으로 평범한 미덕은, 윤리란 추상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며 우리가 사는 방식이라고 믿으며, 미덕을 최대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핵심이자 목표라고 믿는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5백년 전에 몽테뉴가 말했듯이, 평범한 미덕이란 탐욕, 욕정, 질투, 증오 같은 평범한 악덕과의 투쟁이다. 평범한 미덕은 또한 이례적인 악덕과 직면하여 무기력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테러리즘에 직면할 경우, 평범한 미덕은 침묵하고 무감각해질 수 있다. 하지만 폭력스럽고 잔혹한 재난이 지나간 후 재건을 담당하는 것은 평범한 미덕이며, 일상이 지속되는 데에 필수적인 신뢰와 회복탄력의 네트워크를 재건하는 것도 역시 평범한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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