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왜 나는 뇌가 아닌가

조회수 2018. 9. 16. 15: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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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나는 뇌가 아니다' 중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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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은 독일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신작 <나는 뇌가 아니다>에서 골라봤습니다.


독일어 원서 제목은 Ich ist nicht Gehirn입니다. 2015년 11월 출간됐습니다.


최근 유행인 뇌과학을 기반으로 한 인간 이해에 반기를 들고, 철학적 전통에서 자유를 추구하고 자화상을 그려가는 존재로서 인간 정신을 논증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1980년생의 젊은 나이에 독일 본 대학 철학과 석좌 교수이자 같은 대학 국제 철학 센터 소장을 맡고 있으면서, 이른바 자연과학주의에 맞서 철학의 관념적 전통을 잇는 신실존주의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전작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자연과학이 기반으로 삼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비판한 데 이어, 이번 책에서는 인간 정신의 자유와 자율성을 변론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처럼 보이는 것들의 홍수 속에 거의 수몰될 지경이다. 신경과학, 진화 심리학, 진화 인류학 등의 수많은 자연과학 분야들(혹은 그 분야들의 몇몇 대표자들)은 자기인식 분야에서 진보를 이뤄냈거나 적어도 결정적인 도약을 코앞에 두었다는 주장을 거의 매일같이 내놓는다.


독일 라디오 방송국 DLF의 연속 프로그램 <뇌 스캔 속의 철학>에서는 "인간 정신이 아니라, 뇌가 의사 결정을 조종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과 "자유 의지는 착각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 숙고되기까지 한다.


또 다른 프로그램은, 임마누엘 칸트가 우리는 세계를 그 자체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뇌과학이 그 주장을 확고하게 뒷받침함을 보여 주려 한다. 그 방송은 마인츠 대학교의 의식 철학자 토머스 메칭거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철학이 신경과학에 접근하는 것을 옹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철학과 뇌 과학의 견해는 일치한다. 지각은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형을 보여 준다. 유기체의 필요에 따라서 준비되고 고도의 처리 과정을 거친 아주 작은 파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심지어 공간과 시간, 원인과 결과도 뇌에서 산출된다. 그럼에도 당연히 실재는 존재한다. 실재는 직접 경험될 수 없지만 포위될 수 있다.

그러나 인식론과 지각 이론을 연구하는 철학자의 대다수는 오늘날 이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실재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고 포위할 수만 있다는 주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 이론의 비일관성이 드러난다. 그 이론은,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우리가 세계의 모형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비일관적이다.


사람들이 실재의 모형을 만든다는 것을 당신이 안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당신은 실재에 대하여 무언가 아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항상 모형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모형 안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모형을 실재의 일부로 보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가 숙고하는 대상보다 덜 실재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인식할 수도 있고 단지 모형만으로 만족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신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상을 스스로 만들어 보유해야 비로소 누군가이고, 그런 한에서 자유롭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누구이기를 원하고 누구여야 하는지 보여 주는 자화상을 그리고, 다양한 규범, 가치, 법, 제도, 규칙의 형태를 띤 그 자화상을 지침으로 삼아 길을 찾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아무튼 어떤 생각을 가지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석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가치들을 기준점으로 삼는다. 그 가치들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지도, 우리를 독단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 실재 속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삽입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런 존재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회상을 세계상을 그리고, 심지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대한 파노라마로 굽어보기 위하여 형이상학적 믿음 체계를 구성한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우리는 이런 활동을 하는 유일한 생물이다.

이 책이 말하려는 바는, 우리 인간이 의기양양하게 우리의 자유에 도취하여 이른바 인류세의 도래를 축하하며 건배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일차적인 의도는, 민주 사회의 대중들 사이에서 인문학이 변방으로 밀려남으로 인해 우리의 정신적 자유의 공간이 어두워지는 것에 맞서 그 공간을 환히 밝히는 것뿐이다.


과학적 기술적 진보는 당연히 환영해야 마땅하다. 원자폭탄, 기후 변화, 은밀한 데이터 조사를 통한 더 정확한 시민 감시와 같은 문제들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과학 기술의 발전을 비난하는 것은 전혀 비합리적인 행동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일으킨 근대의 문제들을 오직 계속적인 진보를 통해서만 다룰 수 있다.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될지, 혹은 어쩌면 인류가 가까운 미래에 심지어 멸종하게 될지는 예단할 수 없다. 미래를 결정할 여러 요인들 중 한 가지는 우리가 그 문제들을 알아차리고 적절하게 서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과학적-기술적 진보에는 당연히 어두운 면이 있다. 진보는 예기치 못한 규모의 문제들을 일으켰다. 사이버 전쟁, 환경 파괴, 인구 과밀, 드론, 사이버 왕따, 사회 연결망을 통해 계획된 테러, 원자 폭탄, 주의력 장애를 정당하거나 부당하게 진단받고 향정신성 약에 찌든 아이들 등의 문제들을 말이다. 그럼에도 최근의 디지털 진보는 '자유 의식의 진보'(헤겔)와 조화를 이루는 한에서 환영할 만하다.


다른 한편으로-이것이 이 책의 의도인데-자기인식 분야에서의 주목할 만한 퇴보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퇴보들의 바탕에는 이데올로기, 곧 특정한 형태의 환상이 있다. 아무도 이데올로기에 반발하지 않으면 이데올로기는 계속 즐겁게 번창할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사회 전체의 맥락 안에서 철학의 주요 기능들 중 하나이며 우리가 방기하지 말아야 할 책임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영국 의학자 레이먼드 탈리스는 신경강박Neuromanie와 다윈염Darwiniti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 단어들로 현재 인류의 자기오해를 표현한다. 신경강박이란 인간의 중추신경계-특히 뇌의 작동방식-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계속 늘리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다윈염은 우리의 까마득한 생물학적 과거를 끌어들여 신경강박을 보완한다.


다윈염에 걸린 사람들은, 지구상의 다양한 종들 사이에서 벌어진 생존 투쟁에서의 적응적 장점들을 재구성하면 현 인류의 행태를 더 잘 혹은 비로소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경중심주의는 신경강박과 다윈염의 조합이다. 즉, 뇌의 진화 역사를 고려하면서 뇌를 연구해야만 정신적 생물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신경중심주의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꺼이 인정하듯이, 우리의 자연과학은 그 목표에서 아직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 예컨대 저널 <뇌와 정신>에 실린 '뇌 과학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선도적 신경과학자 11인의 선언문'의 말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설령 우리가 인간의 공감, 사랑에 빠져 있음, 도덕적 책임감의 바탕에 깔린 신경과학적 과정 전체를 해명한다 하더라도, 이 내면 관점의 독자성은 여전히 존속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바흐의 푸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더라도 그 음악의 매력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뇌 과학자는 자기가 말할 수 있는 것과 자기의 관할 범위를 벗어난 것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이는-다시 위의 예를 들면-음악학자가 바흐의 푸가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더라도 그 음악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것과 같다.

신경중심주의-곧, '나'=뇌라는 주장-의 대표적인 예로 네덜란드 뇌 과학자 디크 스왑의 저서 <우리는 우리 뇌다>를 들 수 있다. 이 책의 도입 글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고 방치하는 모든 것이 우리 뇌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 환상적인 기계의 구조가 우리의 능력, 한계, 성격을 결정한다. 우리는 우리 뇌다. 뇌 과학은 이제 더는 뇌 질병의 원인을 찾는 작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뇌 과학은 왜 우리는 이러이러한 우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작업, 우리 자신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보다시피 신경중심자들에게 뇌 과학은 매우 유용한 기관인 뇌의 작동 방식에 대한 연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제 뇌 과학은-적어도 디크 스왑에 따르면- '우리 자신을 찾는 작업'에 나서려 한다.


이런 입장에 맞서 나는, 인간을 그 자체로 뇌라고 생각하면 우리 자신을 찾는 작업 곧 자기인식 프로젝트는 완전히 망가진다고 주장한다. 건강한 뇌가 없으면, 당연히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생각할 수도 없고, 깨어 있거나 의식을 가지고 살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우리가 우리 뇌와 동일하다는 결론이-많은 추가 논증들을 거치지 않는다면-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 뇌와 동일하지 않은 이유 하나는 우리가 당장 몸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몸은 신경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세포들로 구성된 다른 많은 장기들을 포함한다는 점에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타인들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의 이러이러한 우리와 근사적으로도 닮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없다면, 우리는 언어를 보유하지 못할 테고 심지어 생존 능력조차 없을 것이다. 인간은 타인들과의 소통 없이도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타고난 유아론자가 결코 아니다.


이런 문화적 사실들을 뇌 하나를 관찰함으로써 설명할 수는 없다. 최소한 온전한 유기체들이 보유한 다수의 뇌들을 관찰해야 한다. 이 때문에 신경과학의 입장에서는 영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뇌조차도 그것의 개별 특징과 가소성 때문에 완전히 기술하기가 전혀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신경 생물학의 방법들로 현재 중국 어느 대도시, 또는 독일 슈바르츠발트 지역 어느 마을의 사회문화적 구조를 연구한다고 해보자. 이 시도는 성공할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 심지어 완전히 유토피아적일뿐더러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연구를 위한 전혀 다른 방법들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의 오랜 자기인식의 역사에서 기원한 그 방법들은 철학 외에도 당연히 문학, 음악, 미술 사회학, 심리학, 다양한 인문학들, 종교 등을 아우른다.

인간 정신은 불특정 다수의 정신적 역량들을 산출한다. 인간 정신은 그 자기해석들을 통해 자화상을 제작하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은 자화상을 제작하고 그럼으로써 다수의 정신적 실재들을 산출한다. 이 과정은 역사적으로 열린 구조를 가지며, 그 구조를 신경 생물학의 언어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성의 이유는 우리가 지금 다양한 언어들을 가진다는 데 있지 않다. 인간 정신이 순수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거짓된 세계상과 자아상도 그릴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이데올로기로 이어진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거짓된 자아상도 그것을 참된 자아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무언가 말해 준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많은 상상을 한다는 것,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솜씨와 능력에 관한 상을 만들고 타인들(친구와 적)과의 대화에서 그 상을 시험대에 올린다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경험이다.


정신적 실재 산출의 스펙트럼은 예술, 종교, 학문(인문학, 사회과학, 공학, 자연과학 등)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서부터 매우 다양한 형태의 환상-이데올로기, 자기기만, 환각, 정신병 등-까지 폭이 넓다. 우리는 의식, 자기의식, 사유, '나', 몸, 무의식 등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들은 인간 정신이 그리는 자화상의 요소들이다. 이 때 인간 정신은 이 자화상의 요소들로부터 독립적인-따라서 이 자화상의 요소들과 비교할 수 있는- 실재성을 가지지 않는다. 인간 정신은 오직 자화상을 그리는 방식으로만 실존한다. 따라서 인간 정신은 항상 스스로 만드는 결과가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 정신은 역사를, 정신사를 가진다.


정신사에서 우리의 시대, 곧 근대는 신경중심주의를 산출했고, 그 입장은 근대의 근본 동기들 중 하나인 '과학을 통한 계몽'과 전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점점 더 망각해 온 것은 이 시대의 역사성, 그리고 이 시대가 좌초하고 붕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적은 근대성이 아니라 더 많은 근대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근대성은 우리 자화상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을 포함한다. 우리 자화상의 역사성은 지난 200년 동안 철학의 핵심 주제였다. 정신의 개념을 다룰 때 우리는 그 역사성을 등한시하지 말아야 한다.


21세기의 중요한 과제 하나는, 정신적 생물로서 우리의 처지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오로지 (엄격한 익명의 원인들로 이루어진 물질적-에너지적 실재를 뜻하는) 우주 안에 현전하는 것만 존재한다고 가르치는, 그래서 정신을 의식으로 또 의식을 신경 활동으로 환원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정신관을 갈구하는 유물론을 우리는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세계들에 속한 시민이며, 자유의 조건들을 제공하는 목적들의 나라 안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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